[매묵]2025년 4월 22일 화요일[(백)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4월 20일 프란치스코 교황님 마지막 강론
[매묵]2025년 4월 22일 화요일[(백)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4월 20일 프란치스코 교황님 마지막 강론
입당송
지혜의 물을 마시면, 굳세어지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지혜가 너희를 영원히 들어 높이리라. 알렐루야. <대영광송>
본기도
천상 선물도 풍성히 내리시어
지금 세상에서 맛보는 기쁨과 자유를
하늘에서 온전히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36-41
오순절에, 베드로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36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37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8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41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
○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 ◎
부속가
파스카 희생제물 우리모두 찬미하세.
그리스도 죄인들을 아버지께 화해시켜
무죄하신 어린양이 양떼들을 구하셨네
죽음생명 싸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신
불사불멸 용사께서 다시살아 다스리네.
마리아 말하여라 무엇을 보았는지.
살아나신 주님무덤 부활하신 주님영광
목격자 천사들과 수의염포 난보았네.
그리스도 나의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너희보다 먼저앞서 갈릴래아 가시리라.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굳게 믿사오니
승리하신 임금님 자비를 베푸소서.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 알렐루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11-18
그때에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의 가족이 드리는 제물을 자비로이 받으시고
주님의 도우심과 보호로
저희가 받은 것을 잃지 않고 영원한 선물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저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세례의 은총으로 깨끗해졌으니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파견
╋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 하느님, 감사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인터넷 검색 중에 ‘언제나 당당한 사람’의 특징을 읽었습니다. “후회할 것 같으면 반드시 해 본다. 천천히는 가도 뒤로 가지는 않는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모르는 거라 인정한다. 실패는 용서해도 포기는 용서하지 않는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자만하지 않는다. 배움에는 망설임이 없다.” 여러분은 이 중에 몇 개가 해당하는지요? 저는 소심한 편이라 후횔 것 같아도 반드시 하지 않는 편입니다. 모세처럼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후회할 것 같으면 반드시 하는 성격 같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할지라도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가만히 있었는데 베드로 사도는 ‘선생님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저는 가끔 뒤로 가는 편입니다. 신학생들과 영신 수련할 때입니다. 묵상이 잘 안되면 성서 구절을 반복해서 하라고 말하곤 합니다. 성서 구절을 다시 묵상하면서 자기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앞으로 가기도 했고, 뒤로 가기도 했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왜 그러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늙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들까지도 기꺼이 하느님께 바치려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바오로 사도는 납득이 가지 않으면 교회의 원로인 베드로 사도에게도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을 이방인들에게 강요하는 베드로 사도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살면서 당당하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때로는 고개 숙이는 것도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설명할 수 없는 것도 때로는 아는 것처럼 말할 때가 많았습니다. 때로는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말하기도 했고, 때로는 착각 때문에 그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구글 검색과 챗지피티가 있어서 섣불리 아는 척하다가 창피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예 할 것은 예라고 말하고, 아니라고 할 것은 아니라고 말하여라.”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용기입니다. 저는 실패할 때도 많았고, 포기할 때도 많았습니다. 대형 면허 시험에 한 번 떨어졌고, 쉽게 포기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대한 열망 때문에, 복음에 대한 확신 때문에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부족한 제가 배워야 할 덕목입니다.
저는 급한 성격 때문에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는 편은 아닙니다. 신학교에서도 숙제를 가장 먼저 하는 편이었습니다. 미리 하는 성격이 좋은 때도 있지만, 때로는 아쉬울 때도 있습니다. 상황이 바뀌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미리 준비한 것들이 소용없을 때가 있습니다. 미리 하는 성격 때문에 큰 무리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상황이 생겨도 여유 있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리 내세울 것이 없어서 자만하고는 거리가 있는 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배움에는 망설임이 없어야 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걸 배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책을 가까이하고 싶은데 이 또한 쉽지 않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베드로 사도에게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방법이 있다고 베드로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은 능력보다, 재능보다, 업적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겸손하게 뉘우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달릴 곳을 다 달리신 프란치스코 교황님, 이제는 천상 정원에서 세상 편히 쉬시길!
최근 병원에서 퇴원하셔서 좀 더 우리 가운데 머물러 주실 것 같았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안타깝게도 선종하셨습니다. 살아생전 보여주셨던 수도자요, 사제, 주교요 교황으로 보여주셨던
그 따뜻하고 자애로운 모습, 그 소박하고 순수했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찰라같은 잠시의 만남이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알현했던 순간의 축복은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교황님으로부터 받은 느낌은 참으로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 연세의 다른 어르신들에게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느낄 수 없었던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이 깊이 느껴졌습니다.
한없이 그윽하고 맑은 눈길, 아버지로서의 깊은 애정과 관심이 담긴 미소 앞에 저는 순식간에
무장해제가 되었습니다. 잠깐 사이의 만남이 제게는 치유의 순간이요, 은총과 축복의 순간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셨다면, 이런 분위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살아생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행보는 언제나 일관된 것이었습니다. 노숙인들, 난민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자국의 이익에만 몰두하지,
약소국들의 딱한 처지를 나 몰라라 하는 강대국들의 횡포를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교회나 수도원이 담 안에 안주하지 말고, 세상의 끝, 변방으로 나아가도록 부단히 촉구하셨습니다.
지난 세월 교회가 약자들에게 저지른 과오와 실책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셨습니다.
자신의 삶과 관련해서 교황님께서는 지극히 겸손하고 탈권위적인 행보를 취하셨습니다.
극단적 청빈의 삶을 몸소 사시면서,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살아가는 교회와 사회 앞에
온몸으로 저항하셨습니다.
2001년 2월 21일 베르골리오 주교님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됩니다.
당시 추기경으로 서임되는 성직자들에게 주어지는 세 가지 특전이 있었습니다.
쾌적한 추기경 관저 제공, 고급 전용차와 운전 기사 제공, 전담 요리사 배치였습니다.
그러나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화려한 추기경 관저를 사양하고 작고 허름한 아파트로 들어갔습니다.
전담 요리사를 두지 않고, 직접 시장을 봐오고 요리를 했습니다.
전용차를 사양하고 언제나 대중교통을 애용했습니다.
언제나 예수회 수도자로서 추구했던 극단적 청빈은 교황으로 선출되고 나서도 한결 같았습니다.
넓고 쾌적한 교황 전용 공간을 사양하고, 일반 교황청 거주 성직자 50여명이 기거하는
공동 기숙사 성 마르타의 집 201호로 자신의 거주지를 정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회와 세상 앞에 드러내셨던 삶의 모습 중 가장 두드러진 특징 한 가지는
구체성입니다. 청빈을 강론대에서만 외치지 않으시고, 삶으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교황이 되고 나서도 시종일관 가난하게 사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으로
교황명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로 정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 일관되게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당신의 80회 생신 때, 고관대작이나 정치인들을 식탁에 초대한 것이 아니라 바티칸 인근 노숙자들과
유기견을 초대하셨습니다. 강론 때도 언제나 청빈의 덕을 크게 강조하셨습니다.
“부디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마십시오. 가난은 죄가 아닙니다. 가난을 저주하는 것이 죄입니다.”
당신의 고국 아르헨티나 신자들이 대규모로 바티칸에서 거행되는 교황 즉위 미사에 참석하려한다는
소식을 들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바티칸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이렇게 부탁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동포들이여! 비싼 돈 들여 저를 보러오지 마시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해주십시오!”
가난과 관련해 당신의 사제들을 향해서도 일관되게 강조하셨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더욱 문턱을 낮추고 사제들은 더욱 마음을 열고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저는 관료나 공무원처럼 행동하는 사제를 원치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 못지않게, 복음의 기쁨을 전하기 위해 달릴 곳을 다 달리셨던 교황님,
아시시 프란치스코 성인 못지않게 가난을 사랑했고, 가난하게 사셨던 교황님,
이제 더 이상 고통도 과로도 없는 하느님의 따뜻한 뜨락에서 세상 편히 쉬시며,
천상복락을 만끽하시길 기도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강론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부활은 사랑의 승리이며, 동시에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나는 죄인이어도
당신이 사랑이어서
또다시 나를 살게 하는
찬미의 힘찬 노래
거듭나게 하는 노래
알렐루야 알렐루야!"
- 이해인, '부활소곡' 중에서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부활 예수님께 대한 막달레나 마리아의 사랑이야기 2탄입니다.
사랑의 장소는 동산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처음 준비되고 이루어진 곳도 동산(에덴)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산에서 사랑으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 또 다시 동산에서 사랑으로 부활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그렇게 에덴동산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소명을 주십니다.
두 제자는 이미 돌아갔건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차마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울다'의 원어의 뜻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큰소리로 통곡하여 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곧 사랑이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무덤을 들여다보고 하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두 천사를 봅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습니다(요한 20,12).
성 그레고리우스는 천사가 있었던 '머리맡'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는 사실을, '발치'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곧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또한 그녀는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라는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그랬고(루카 24,13-35),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의 일곱 제자들도 그랬습니다(요한 2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곧 부활 체험은 ‘낯선 이’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낯선 이’의 요청 안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고 ‘눈이 열리어’(루카 24,31)야 할 일입니다.
그분이 나를 이집트에서 불러내듯, 동굴에서 불러내듯, 나를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요한 20,17)
이는 당신이 더 이상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아는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자신이 모르는 낮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손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든다."고 말합니다.
결국 부활은 다름 아닌 사랑의 승리이며, 동시에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결코 그 무엇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부활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일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늘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늘 사랑하는 일에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마태오 28,8-15
참되고 바른 진짜 삶을 삽시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주여, 나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는 이 몸이오이다.”(시편16,1)
12.3 비상계엄으로 인한 4개월 정도의 내란상태가 끝나니 나라가 안정되어 참 감사하고 기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나라에 주신 참 좋은 선물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그동안 불안과 두려움에 지냈고
가짜뉴스도 참 많았습니다.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기 힘든 세상, 그 분별의 지혜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참되고 바른 삶을, 즉 진국의 진짜 삶을 살 때에야 가능합니다.
이에 관해 생각나는, 또 어제 읽은 좋은 글귀도 나누고 싶습니다. 참된 삶, 바른 삶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입니다. 모두가 제가 전폭적으로 공감하고 찬동하는 내용들입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중국 당나라 임제선사의 ”어느 자리에서든 주인이 되어라. 서 있는 곳 모두가 참되다.”
어느 환경, 어느 자리에서든 참사람되어 참되고 바르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백제본기에 나오는 한자성어,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와 조선의 미를 뜻하는 멋진 말마디입니다.
역시 참되고 바른, 진짜 삶을 사는 이들의 모습이 이러할 것입니다.
“Ever Old, Ever New”, 즉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롭다”는 뜻으로 언제봐도 실증이 나지 않는
매력적인 경우를 지칭하는 말마디로 참되고 바른 진짜 삶을 사는 이들의 모습이 이러할 것입니다.
복자 골룸바 마르미옹 아빠스는
“지배하기보다는 유익이 되어라(Mugis prodesse quam praesse)”는 베네딕도 규칙(64,8)을 실천하며,
세계 1차 대전시 수도원을 벨기에의 응접실이라 불릴만큼 수많은 이들의 ‘영적 피난처’로 만들었습니다.
마르미옹은 사제생활 초기부터 시편 한구절을 인생의 모토로 삼았습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시편41,1).
하느님을 갈망하는 것이 그의 삶에서 유일한 목표였고,
그가 인도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똑같이 권고한 목표였습니다.
이번 베네딕도회 오틴리엔 연합회 신임 총재 아빠스로 뽑힌 하비에르 아파르시오 신부의
인터뷰 내용 일부도 소개합니다.
“수도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영적가치나 실천은 무엇인가요?”
-“여러 소임을 맡아 다양한 장소에서 살아오면서, 저는 두 가지 중요한 가치를 수도자로서
깊이 배웠습니다. 필요한 곳에 머무는 것, 곧 ‘현존’과 ‘경청’입니다.”-
“바쁜 일정 속에서 기도생활과의 균형을 어떻게 이루시나요?”
“이 질문은 자주 받습니다. 여행과 책임진 일이 많기에 기도할 시간이 없을 것 같다고들 생각하시죠.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이 분주하기에 저는 고요함과 침묵을 위한 시간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런 시간이 종종 참된 기도의 순간이 됩니다.
저는 제게 영적 정체성을 지켜주는 이 기도생활을 더욱 아끼고 소중히 여깁니다.”-
“오랫동안 실천해 오신 기도나 묵상방식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주님,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시편139,1), 이 구절을 자주 되뇝니다.
여행중이거나 어려운 상황에 마주할 때 이 기도는 저를 지탱해 줍니다.
이 기도는 신뢰의 기도이며, 제가 누구인지를 넘어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되새기게 합니다.”-
어느 현자의 ‘삶의 지혜’에도 공감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루틴(routine;일상의 규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말해요.
평소처럼 밥을 먹는 것, 잘 때 자는 것, 그렇게 루틴을 지키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어려운 일상을 견디는 데 생각보다 중요하더라구요.
산책도 하고 디져트도 먹고요. 이런 것들이 비탄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는 역할을 해요.
위로한답시고 쓸데없이 길게 얘기 하는 것보다 밥을 먹든, 탁구를 치든,
일상의 루틴을 함께 하는 게 좋다고 봐요.”
“시가 지닌 힘은 무엇일까요?”
-“가장 안전하게 ‘미칠 수’ 있는 형식이 아닐까해요.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 방식 중에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시가 가장 경제적인 방식이라고 봅니다.”
영혼의 활력소가 되어 참된 삶, 바른 삶을 살게 하는 좋은 시의 힘이요,
특히 성서의 시편을 능가하는 시들은 없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참된 삶, 바른 삶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을 소개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문제는 예수님의 부활문제입니다.
주님의 여제자들은 천사들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 소식을 듣고 기쁨이 충만합니다.
무엇보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함이 우선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주 오시면서 여자들에게 “평안하냐?”하신 다음 그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형제라 부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찾아 밖에서 멀리 방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내 삶의 자리 오늘 지금 여기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갈릴래아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시공에 제한되지 않기에 당신을 사랑하여 찾는 누구나의 갈릴래아에서
만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 삶의 자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참된 삶, 바른 삶을
사는 이들은 결코 가짜 뉴스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가 바로 가짜뉴스가 어디서 시작되는지 알아채게 합니다.
예수님의 빈무덤에서 둘중 하나는 가짜요 하나는 진짜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했느냐? 혹은 누가 훔쳐갔는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지 못한 이들은 부활보다는
누가 훔쳐갔을 것이라 생각하기가 쉬웠을 것이며 부활소문은 가짜뉴스로 치부했을 것입니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에 매수된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자기들이 잠든 사이에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가짜뉴스를 퍼뜨렸고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합니다.
경비병들이 잠들었다하는데 예수님 제자들이 훔쳐가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지 이 또한 모순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주님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이들은
예수님 부활이 진짜일지라도 가짜뉴스로 믿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참으로 내 일상의 삶의 자리 갈릴레아에서 주님 부활을 체험한 우리들에게
예수님 부활은 너무나 자명한 진짜 복음 뉴스입니다.
그 생생한 증거가 복음의 여제자들과 더불어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그 열화와 같은
오순절 설교로 예수님 부활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사도 베드로입니다.
사람들이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음을 고백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시편을 렉시오 디비나 하여
다윗은 시편 고백을 그대로 예수님의 입에 담아 드립니다.
다윗의 고백이자 부활하신 예수님의 고백인 시편을 여러분의 고백으로 삼아 진짜뉴스
‘주님 부활의 기쁨’을, 베드로 사도와 함께 한껏 누리시길 바랍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 내용이 깊고 아름다워 그대로 인용합니다.
“주님을 언제나 내 앞에 모시오니,
내 오른편에 계시옵기, 흔들리지 않으오리다.
그러기에 내 마음 즐겁고, 영혼은 봄놀고,
육신마저 편안히 쉬오리니,
내 영혼을 지옥에다 버리지 않으시리이다.
썩도록 당신 성도들 아니 버려두시리다.
당신은 나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어
당신을 모시고 흐뭇할 기꺼움을,
당신 오른편에서
영원히 누릴 즐거움을 보여 주시리이다.”(시편16,8-11)
이런 시편 묵상 은총이,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진짜뉴스 주님 부활의 기쁨을 맘껏 누리며
각자 삶의 제자리, 꽃자리 갈릴래아에서, 참된 삶, 바른 삶을, 꽃같은 하루 꽃같은 삶을,
파스카 주님의 꽃같은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아뢰오니, ‘당신은 나의 주님,
내 좋은 것 당신밖에 또 없나이다’”(시편16,2).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4/22(화) [(백)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베드로 사도에게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방법이 있다고 베드로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은 능력보다, 재능보다, 업적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겸손하게 뉘우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가난과 관련해 당신의 사제들을 향해서도 일관되게 강조하셨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더욱 문턱을 낮추고 사제들은 더욱 마음을 열고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저는 관료나 공무원처럼 행동하는 사제를 원치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 못지않게, 복음의 기쁨을 전하기 위해 달릴 곳을 다 달리셨던 교황님,
아시시 프란치스코 성인 못지않게 가난을 사랑했고, 가난하게 사셨던 교황님,
이제 더 이상 고통도 과로도 없는 하느님의 따뜻한 뜨락에서 세상 편히 쉬시며,
천상복락을 만끽하시길 기도합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늘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늘 사랑하는 일에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랫동안 실천해 오신 기도나 묵상방식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주님,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시편139,1), 이 구절을 자주 되뇝니다.
여행중이거나 어려운 상황에 마주할 때 이 기도는 저를 지탱해 줍니다.
이 기도는 신뢰의 기도이며, 제가 누구인지를 넘어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되새기게 합니다.”-
(이수철 신부)
4/22(화) [(백)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늘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늘 사랑하는 일에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4월22일(화) 10시-

4월 20일 프란치스코 교황님 마지막 강론입니다. 교황님께서 많은 이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부활대축일 낮미사를 봉헌하셨습니다. 2025년 부활주일 낮미사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론 (안젤로 코마스트리 추기경 대독) 성 베드로 광장, 2025년 4월 20일, 주일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의 돌이 치워진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알렸습니다. 깜짝 놀란 두 제자도 길을 나서는데, 복음서에 따르면 “두 사람이 함께 달렸다”(요한 20,4)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활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달리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달린 이유가 주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걱정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리아 막달레나, 베드로, 요한의 서두름은 마음의 갈망, 곧 예수님을 찾고자 하는 내면의 태도를 드러냅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더 이상 죽음의 포로가 아니시며, 수의에 감싸여 계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단지 옛 이야기 속의 인물로, 고대의 영웅으로, 박물관 속 조각상으로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일어나서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삶 속에서, 우리 이웃의 얼굴 속에서, 일상적인 일 속에서, 무덤이 아닌 모든 곳에서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쉬지 않고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부활하셨기에, 이제 어디에나 현존하시며,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가 만나는 형제자매들과의 길 위에서, 일상의 평범하고도 뜻밖의 순간들 속에서 당신 자신을 감추시기도 하고 드러내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살아 계시며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고통받는 이들의 눈물을 통해 함께하시고, 우리 각자가 행하는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삶을 아름답게 하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부활 신앙은 안락한 “종교적 위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활은 우리를 행동하게 합니다. 막달레나와 제자들처럼 달려가도록 우리를 재촉합니다.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보다 앞서 가시며,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도록 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우리는 매일 주님을 잃는 듯한 경험을 할 수도 있지만, 매일 다시 그분을 찾아 달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반드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당신을 발견하게 해주실 것이며, 당신 부활의 빛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이 우리 삶의 가장 큰 희망입니다. 우리는 이 가난하고, 연약하고, 상처 입은 삶을그리스도께 의지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죽음을 이기셨고, 우리의 어둠을 이기시며, 세상의 그늘까지도 이기셔서 기쁨 가운데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오로가 말한 우리의 목표입니다. “뒤의 것은 잊어버리고 앞의 것을 향하여 달려” (필립 3,13-14) 나아가는 것이지요. 마리아 막달레나, 베드로, 요한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갑시다. 희년은 우리 안에 희망의 선물을 새롭게 하라고 초대합니다. 우리의 고통과 근심을 희망 안에 맡기고, 길에서 만나는 이들과 희망을 나누며, 우리 삶의 미래와 인류 가족의 운명을 희망 안에 맡기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덧없는 것들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슬픔에 굴복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기쁨으로 달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달려갑시다. 그분의 친구가 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총을 다시 발견합시다. 그분의 생명과 진리의 말씀이 우리 삶을 비추게 합시다. 위대한 신학자 앙리 드 뤼박이 말했듯이,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그리스도교는 곧 그리스도다. 아니, 진정으로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다.” (앙리 드 뤼박, 「오늘날 세상에서 가톨릭의 교리적 책임」, 파리 2010, 276쪽)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신 이 ‘모든 것’이 우리 삶을 희망으로 열어줍니다. 그분은 살아 계시며, 오늘도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이 축일에 저희도 새로워질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이 영원한 새로움의 체험에 이르게 해주십시오. 습관의 슬픈 먼지와 피로, 무관심에서 저희를 정화하시고, 매일 아침, 놀라움으로 눈뜨게 하소서. 이 아침만의 새로운 빛깔을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주님. 아무것도 예전과 같지 않으며, 아무것도 낡은 것이 없습니다.” (아드리아나 차리, 「마치 기도처럼」) 자매 형제 여러분, 부활 신앙의 경이로움 안에서, 평화와 해방에 대한 모든 기대를 마음에 품고,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