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5월 2일 금요일[(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5. 5. 2. 03:36

[매묵]2025년 5월 2일 금요일[(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295년 무렵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타나시오 성인은 알렉산데르 대주교를 수행하여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328년 알렉산데르 대주교의 후계자가 된 뒤, 아리우스파에 맞서 싸우다가 여러 차례 유배를 당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정통 신앙을 해설하고 옹호하는 책을 많이 남겼으며, 수도 생활의 창시자인 안토니오 성인의 전기를 써서 서방 교회에 수도 생활을 알리기도 하였다.

입당송

집회 15,5 참조
주님이 그를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회중 가운데에서 그의 입을 열어 주시고, 영광의 옷을 입혀 주셨네. 알렐루야.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복된 아타나시오 주교를 보내시어
성자의 신성을 힘껏 변호하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의 가르침과 보호로 기뻐하며
하느님을 더욱 깊이 깨닫고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5,34-42
그 무렵 34 최고 의회에서 어떤 사람이 일어났다.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로서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였다.
그는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내라고 명령한 뒤, 35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잘 생각하십시오.
36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 명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
37 그 뒤 호적 등록을 할 때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38 그래서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39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가말리엘의 말에 수긍하고,
40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42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7(26),1.4.13-14(◎ 4ㄱㄹ)
◎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

복음 환호송

마태 4,4
◎ 알렐루야.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요한 5,1-5)와 복음(마태 10,22-25ㄱ)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복된 아타나시오를 기리며 봉헌하는 제물을 굽어보시어
저희가 그를 본받아 온전한 신앙을 고백하고
주님의 진리를 증언하여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2 <그리스도의 새 생명>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빛의 자녀들이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났고,
믿는 이들에게 하늘 나라의 문이 열렸나이다.
주님의 죽음으로써 저희가 죽음에서 구원받았고,
주님의 부활로써 모든 이가 새 생명으로 부활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1코린 3,11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아타나시오와 함께 성자를 참하느님으로 굳게 믿어 고백하오니
저희가 이 성사로 힘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병이어의 기적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후배 신부님의 신앙 간증을 들었습니다. 신부님은 교우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갔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있는 성당까지 걸어가는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입니다. 10일 정도,  120킬로를 걷는 순례였습니다. 신부님은 5일째 되는 날 발톱이 빠지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걷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도저히 걷기 어려워서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걸을 수 있기를 청하며 기도하는데, ‘너는 걸을 수 있다.’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소름이 끼치기도 했지만 설마라는 생각으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니 신기하게도 아프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우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걸어서 순례했다고 합니다. 순례의 마지막 날에 신부님은 자신에게 있었던 놀라운 체험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이야기를 마치자, 교우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본인들에게도 이번 성지순례가 마치 은총 같았다고 합니다. 묵주기도 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기도 했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고 합니다. 루르드 성지에 가면 환자들이 놓고 간 목발이 있는데 신부님은 실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설마 하는 의심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발톱이 빠졌음에도 무사히 걸어서 순례를 하면서 토마 사도처럼 믿음이 부족했던 신부님에게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셨다며 감사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후배 신부님처럼 신기한 목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돌아보면 부끄러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지난번 성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청년이 아버지를 위해서 병자성사를 청하였습니다. 병자성사를 청하면 보통은 총구역장, 해당 구역장, 반장과 함께 갑니다. 총구역장에게 연락하고, 시간을 정했습니다. 병자성사를 청한 청년이 전화했습니다. 시간을 바꾸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연락했습니다. 병자성사 시간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바뀌었기 때문에 내일 해야 할 일들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또 전화하였습니다. 복잡한 일이 생겨서 병자성사는 다음에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도 화가 났습니다. 또다시 총구역장님께 전화해야 하고, 일정을 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겨우 두 번 전화했는데, 저는 참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번이 아니라 수십 번 저를 참아 주셨습니다.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제게 화를 내시지 않으셨고, 저를 기다려주셨습니다. 고작 두 번 바뀐 것을 가지고, 저는 화를 내고야 말았습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을 이해하고, 다음에 할 수 있도록 하자고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큰 기적을 행하신 후에도 아무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곳에 성당을 세우고, 밤샘 기도를 하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몰려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소유하려 하지 않으시고, 또 다른 곳으로 향해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과 치유의 은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참된 하느님의 나라는 기적과 치유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희생 위에서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권력과 명예는 오래 갈 것 같지만,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재물로 눈에 보이는 성전을 세울 수는 있지만 재물이 많아야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느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염불보다 제삿밥에 관심이 많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소유하여 욕심을 채워도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가말리엘은 자신의 권위와 능력을, 자신을 위해서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기득권을 유지하고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도록 하였습니다. 가말리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커다란 능력이 있었음에도 미련 없이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뿌리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떠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권위는 있었지만 권위적이지 않았던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힘은 있었지만, 그 힘을 언제나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주님, 아드님의 십자가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주님 사랑으로 저희를 지켜주시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5년 다해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요한 6,1-15

 

자캐오처럼 성체를 영하라

 

오늘부터는 그 유명한 요한복음 6장이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40년 동안이나 하늘에서 내려

백성을 먹인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성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아 주시는 당신 살과 피입니다.

광야에서 이 양식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책 출판이 허가되었습니다. 제 책은 아마 7월 전후로 나올 것 같습니다.

제목은 『사랑하는 조카들이, 이것만 읽고 냉담하면 안 되겠니?』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신자가 요즘 냉담이라는 말은 잘 안 쓰고 ‘쉬는 교우’라는 말을 쓴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쉬운 교우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음식을 먹는 것을 어떻게 쉬겠습니까?

그건 죽고 싶다는 뜻입니다. 성체를 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체를 영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쉰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현대 성체 교리의 문제점입니다. 

 

성체성사의 중요성을 알려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기 직전까지도 만나를 찾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보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고, 심지어 인육까지 먹는

일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성체를 영하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그대로 일어납니다.

이를 잘 표현하는 단편영화가 있습니다.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픽사 단편 애니메이션 ‘바오!’입니다. 

 

애니메이션 ‘바오’는 자녀가 떠나간 빈 둥지 증후군을 겪는 듯한 한 중국계 캐나다인 어머니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녀는 외로움 속에서 만두(바오)를 빚던 중, 자신이 만든 만두 하나가 아기처럼 생명을 얻어

움직이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어머니는 이 작고 귀여운 만두 아기를 실제 아들처럼 여기며

온갖 사랑과 정성을 쏟아붓습니다. 이는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참된 양식) 대신 다른 것을

갈망하듯, 어머니가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만두 아기에게 집착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 속에서 만두 아들은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점차 자신만의

세계를 원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서양인 여자친구를 데려와 함께 집을 떠나려 합니다.

어머니는 또다시 자식을 잃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상실감에 휩싸입니다.

아들이 떠나려는 마지막 순간, 어머니는 아들을 붙잡으려는 절박한 마음이 극단적으로 표출되어,

그 만두 아들을 한입에 삼켜버리고 맙니다.

 

이는 강론에서 지적하듯,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양식’(성체)을 받아 모시지 않을 때,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주변 사람, 특히 가장 사랑하는 이의 삶과 자유마저 집어삼키려 드는

왜곡된 사랑, 즉 '사람을 먹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음을 충격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머니는 만두 아들을 먹어버린 직후 엄청난 충격과 슬픔, 후회에 빠집니다.   

 

영화는 이 사건이 어머니의 깊은 내면과 두려움이 투영된 일종의 악몽이었음을 보여주며,

실제 아들과의 관계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 준, 참된 양식

(하느님의 사랑, 관계의 건강한 거리)이 부재할 때 사랑이 어떻게 집착과 소유욕으로 변질하여

상대를 '잡아먹는' 행위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를 섬뜩하게 묘사합니다.

이는 성체를 통해 참된 생명의 양식을 받아 모시는 것이 왜 우리 신앙생활과 인간관계에

필수적인지를 역설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예화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이사하는 데 못 쓰는 물건들이 상당히 많은데도 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언젠가는 다 쓸모가 있다고 하시면서. 불안한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들이 없어도 언제든 새로 사줄 수 있는 존재로 남으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물건을 먹고,

재물을 먹고, 나중에 사람까지 먹는 일이 없어집니다.

 

착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평화는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양식’을 주시는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 일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성체성사를 해야지, 세상 것에 대한 배고픔을 더 가중하는

욕구를 청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서서히 어떤 것들은 버려도 된다고 하십니다.

스스로 많은 발전을 하셨다고 생각됩니다. 

 

한국 사회가 더욱 배고픈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참다운 성체성사를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의 목적이 모르고 성체를 영하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 마음의 배를 채우는 일입니다.

언제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기 위해서입니다.

이 믿음이 사라지니 사람이 ‘나쁜 놈’, 곧 ‘나뿐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고 카인이 그랬고

그 이후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사람이 나빠지는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허무하고 불안한 열매처럼 나무 위에 위태롭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고는 모든 재산을 다 내어주어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의 효과가 되어야 합니다.

자캐오처럼 성체성사를 영해야 모기에서 예수님처럼 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 이영근 신부님

 

2025년 다해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요한 6,1-15

<생명의 충만함, 사랑의 충만함>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이야기를 '표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오늘 이 이야기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시며, 바로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모자람’과 ‘충만함’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시험해보려고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요한 6,5)

'빵'을 사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곧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도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지만,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뿐만 아니라 그것이 ‘소용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는 그것을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력한 ‘아이’는 ‘예수님 자신’을 표상합니다.
사실 그것은 제자들이 본 모자란 것이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 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감사와 찬양을 노래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질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모든 것에 감사하며, 더없이 존귀한 임께 감사하며, 늘 함께 하는 당신의 사랑과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5.1.부활 제2주간 목요일                                                                 
사도5,27-33 요한3,31-36


하늘에서 오시는 예수님
“존엄한 품위, 부활의 희망, 영원한 생명의 기초”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시편34,2)


신록의 기쁨으로 빛나는 계속되는 파스카 축제의 계절, 오늘 부터는 성모성월이 시작되는 5월 첫날입니다.
오늘 미사중에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에서는 김종훈 루카 수사의 유기서원식이 있습니다.
예식중 '수시페'는 늘 불러도 가슴 떨리는 감동을 줍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대로 저를 받으소서. 
 그러면 저는 살겠나이다.
 주님은 저의 희망을 어긋나게 하지 마소서.”


누구나 가장 좋아하는 계절의 여왕이라 칭하는 5월 성모성월에는 모든 어머니들이 성모님처럼 보이니
‘어머니의 달’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돌아가신 '신마리아'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달이요, 더불어 지금은 '구암리카페'가 자리한 옛 고향집이
많이 그리워집니다.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존엄한 품위의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얼마전 선종하신 성모님을 사랑한 프란치스코 교황님 유언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나는 평생 동안 사제이자 주교로서 언제나 주님의 어머니, 복된 성모 마리아께 나를 맡겨왔다.
그렇기에 나는 육신의 부활의 날을 기다리며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서 안식하길 바란다.” 


성모님의 달 성모성월 다음 성가 244장과 잘 어울리는 참 아름답고 싱그러운 계절 5월입니다.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 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
 가장 고운 꽃모아 성전 꾸미오며, 기쁜노래부르며 나를 드리오리.”


1절만 인용했지만 4절까지 전 내용이 깊고 아름답고 은혜로워 5월 한달 자주 부르려합니다.
어제 4월30일 본기도 역시 5월의 기도문으로 바쳐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주님, 성자의 부활로 인간의 존엄을 다시 찾아 주시고, 저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으니,
저희가 해마다 믿음으로 거행하는 신비를, 사랑으로 깨닫고 실천하게 하소서.”


인간의 존엄을 되찾고 부활의 희망을 안고 영원한 삶을 살면서 하늘에서 오시는 예수님을 닮을 수 있게 되었으니
참 행복한 5월입니다.
요즘 수도원은 물론 대한민국 산야에 하늘의 별무리처럼 샛노랗게 피어나는 애기똥풀꽃들이 한창입니다.
그늘진 음지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피어나 주위를 환히 밝힙니다.
아주 오래전, 무려 27년전  애송했던 '검정고무신'이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예전에는 검정고무신을 상용했습니다.


“볼품없는 검정고무신
 애기똥풀꽃밭에 다녀오더니
 꽃신이 되었다
 하늘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수놓은 꽃신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별 떠오른 하늘이 되었다”<1998.5.7.>


주님의 은혜로 하늘에서 오시는 분을 닮아 존엄한 품위의 삶을 누리게 된 우리를 상징하는 시입니다.
제가 애용하는 월력, 5월의 주제어는 천륜지락天倫之樂으로 부모형제등 혈족간에 잘 지내며
즐거워하는 것을 뜻하는 말마디입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는 저의 일생과 함께 할 인연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주님 안에서 한가족이 되어 살아가는
사랑하는 모든 형제자매들이 그 대상이 되겠습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사랑은 참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근본이자 길이다.”<다산>
이래서 평생학인에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요 새삼 사랑공부에는 영원한 초보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곧 사람이다. 사람과 사랑이 합해지면 그것이 바로 도道다.”<맹자>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중국 한자 성경에는 ‘태초에 도道가 있었다’로 번역합니다.
그러니 도道는 말씀이신, 하늘에서 오시는 예수님을 뜻하며 그대로 예수님과 일치된 우리의 복된 신원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하늘에서 오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가 평생 보고 배우며 닮으려는 분,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드님을 믿어 순종하는 이는 영원한 생명에 존엄한 품위의 삶입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바로 제1독서 사도행전이 베드로와 사도들이요 이분들의 담대하고 확신에 넘치는
명품설교를 들어보십시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이 미사에 참석해 하늘에서 오시는 주님을 모시는 우리도 주님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하늘에서 오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 것이 지상에서 존엄한 품위의 영원한 천상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과 하나되어 내 삶의 제자리,
꽃자리에서 존엄한 품위의 영원한 삶을, 지상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5/2(금)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커다란 능력이 있었음에도 미련 없이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뿌리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떠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권위는 있었지만 권위적이지 않았던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힘은 있었지만, 그 힘을 언제나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합니다.(조재형 신부)

 

2. 착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평화는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양식’을 주시는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 일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성체성사를 해야지, 세상 것에 대한 배고픔을 더 가중하는

욕구를 청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모든 것에 감사하며, 더없이 존귀한 임께 감사하며, 늘 함께 하는 당신의 사랑과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이수철 신부)

 

5/2(금)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의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모든 것에 감사하며, 더없이 존귀한 임께 감사하며, 

늘 함께 하는 당신의 사랑과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 2025년 5월2일(금) 3시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