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5월 11일 주일[(백)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5. 5. 11. 04:46

[매묵]2025년 5월 11일 주일[(백)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해마다 부활 제4주일은 ‘성소 주일’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인 성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의 증진을 위한 날이다. 성소 주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던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정하셨다. 이날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소를 계발하고 키우는 일에 꾸준히 기도하고 활동하며 협력하도록 일깨우는 기회가 되고 있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며 성소 주일입니다. 기쁨과 평화의 샘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앞날을 성자의 권능에 맡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어, 세상 일을 하면서도 생명의 샘으로 이끄시는 좋은 목자를 떠나지 않게 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입당송

시편 33(32),5-6 참조
주님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주님은 말씀으로 하늘을 여셨네. 알렐루야.
<대영광송>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앞장서 가신 나라로
나약한 양 떼인 저희를 이끄시어
하느님과 함께 천상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3,14.43-52
그 무렵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14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43 많은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 따라오자,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에게 이야기하며
하느님의 은총에 계속 충실하라고 권하였다.
44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45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46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47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48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49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50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51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0(99),1-2.3.5(◎ 3ㄷ 참조)
◎ 우리는 주님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또는
◎ 알렐루야.
○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 ◎
○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
○ 주님은 참으로 좋으시고, 그분 자애는 영원하시며, 그분 진실은 대대에 이르신다. ◎

제2독서

<어린양이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7,9.14ㄴ-17
나 요한이 9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원로 가운데 하나가 14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15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17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요한 10,14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 알렐루야.

복음

<나는 내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27-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목자이신 주님, 성소 주일을 맞은 교회를 굽어살피시어,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따르고자 준비하는 모든 이가 믿음과 열정을 간직하며, 각자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소서.

2.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평화의 주님, 여러 종교와 문화 속에 얽혀 있는 인류를 굽어보시어, 서로 갈등하며 맞서지 않고, 소통과 화합으로 평화로이 살아가게 하소서.

3. 스승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스승이신 주님, 학교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스승으로 불리는 이들을 이끌어 주시어,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본보기가 되게 하소서.

4.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저희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굽어살피시어, 저마다 자신의 자리에서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데 충실하며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이 거룩한 파스카 신비로 저희 구원을 이루시니
저희가 감사하며 드리는 이 제사가
저희에게 영원한 기쁨의 원천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부활 감사송 2 <그리스도의 새 생명>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빛의 자녀들이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났고,
믿는 이들에게 하늘 나라의 문이 열렸나이다.
주님의 죽음으로써 저희가 죽음에서 구원받았고,
주님의 부활로써 모든 이가 새 생명으로 부활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착한 목자, 당신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네. 당신 양 떼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사도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반박하는 이들 앞에서도 담대히 부활을 증언합니다. 우리도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하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예수님을 따르며, 우리에게 천막이 되어 주시는 하느님의 보호 아래 용감한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착한 목자이신 하느님,
성자의 고귀한 피로 구원하신 양 떼를 인자로이 돌보시고
하늘의 영원한 풀밭으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여러분은 가장 오래 기억나는 과자가 무엇인가요?” 저는 초코파이와 새우깡이 생각납니다. 오리온 초코파이는 1974 4월부터 판매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국민 과자의 위상을 지닌 대한민국 제과계를 대표하는 히트 상품입니다. 사실상 오리온 과자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제품입니다. 오리온은 출시 이래 누적 판매량은 500억 개를 돌파했으며, 누적 매출은 8조 원을 훌쩍 넘어섰다라고 밝혔습니다. 저도 군대에 초코파이를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리온 초코파이는 51년이 넘은 장수 브랜드입니다. 농심 새우깡은 1971 12월 대한민국의 식품회사 농심에서 출시한 과자입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새우깡 광고 노래가 있습니다. “손이 가요 손이 가/ 새우깡에 손이 가요/ 아이 손, 어른 손 자꾸만 손이 가/ 언제든지 새우깡 어디서나 맛있게/ 누구든지 즐겨요. 농심 새우깡/” 새우깡은 2023년 기준으로 누적 판매량은 85 3,500만 봉, 누적 매출액 2 34백억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농심 새우깡은 54년이 넘은 장수 브랜드입니다. 사람들의 입맛은 변해도 이 과자들은 살아남았고, 그 안엔 정성과 철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자도 이렇게 오래 사랑받는데, 신앙은 어떨까?”

 

그렇다면 우리 가톨릭 신앙,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져 왔을까요?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열두 제자와 함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 13 8,900만 명의 가톨릭 신자가 그 뜻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오래되고, 깊고, 넓게 퍼진 브랜드입니까? 한국교회도 1784년에 시작되어, 이제 24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선조들은 성직자도 없고, 성당도 없고, 미사도 없는 상황에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박해 속에서 고향을 떠났고, 재산을 잃었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바쳤습니다. '한국 천주교회 통계에 따르면 국내 천주교 신자는 597 675명에 이릅니다. 성직자는 총 5,721명에 이릅니다. 추기경 2, 주교 40명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오늘 우리는 성당에서 평화롭게 미사 드릴 수 있습니다. 이분들이야말로 신앙의 장수 브랜드입니다. 신앙은 마케팅이 아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생명을 바치게 했고, 세상을 바꾸게 했습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다른 방식으로 부르십니다. 어떤 이는 사제로, 수도자로, 또 어떤 이는 부모로, 선생님으로, 간호사로, 교사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 이익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삶이라는 점입니다. 초코파이와 새우깡도 먹는 사람을 생각하며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랑받았습니다. 성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자신보다 다른 이를 위해 살아가겠다는 용기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요즘 세상은 나를 위한 선택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진짜 의미 있는 삶은, 타인을 위한 선택에서 피어납니다. 미국의 작가 조지 엘리엇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을 조용히 바꾼 사람은 역사책에 나오지 않지만, 그들의 선함 덕분에 우리는 지금 숨 쉬고 있다.” 오늘, 이 성소 주일에, 그런 조용한 부르심에 응답한 삶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초코파이와 새우깡에는 손이 갑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마음이 가야 합니다. 성소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을, 가장 의미 있는 길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소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받은 부르심을 돌아보며 묻겠습니다. “주님, 저를 어디로 부르고 계십니까?” 그리고 이렇게 응답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4주일

복음요한 10,27-30

 

나란 존재는 과연 누군가에게 기쁨과 희망이 되고 있는가요?

 

성소 주일을 맞아 제 지난 성소 여정을 돌아봅니다.

참으로 과분하고 감지덕지한 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나처럼 나약하고 부족함 투성이인 존재, 정말이지 부당한 존재를 불러주신 하느님께

그저 감사밖에 드릴 수 없는 나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라는 존재는 과연 누군가에게 기쁨과 희망이 되고, 더 나아가, 젊은이들 마음 안에

‘그래, 나도 저렇게 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 자문해봅니다.

 

젊은 사제 돈보스코는 토리노에 있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성당 제의방에서 바르톨로메오 가렐리라는

한 가련한 아이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어딘지도 모르고 엉겁결에 제의방으로 들어온 길거리 소년은 제의방지기에 의해 강제로 쫒겨납니다.

 

그 모습을 본 돈보스코는 그 아이를 다시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유명한 돈보스코와 아이 사이의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세상 따뜻하고 자상한 목소리로 이름이 뭐냐? 어디서 왔냐, 부모님은 살아계시냐?...

 

돈보스코의 친절함 앞에 잔뜩 경직되어 있던 아이는 순식간에 무장해제가 되고,

돈보스코는 아이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 잡습니다.

촌각의 순간에 둘은 절친이 되고, 스승 제자 사이로 발전합니다.

 

교구 신부님들께 한 말씀 드릴 기회가 오면 저는 어김없이 돈보스코와 바르톨로메오 가렐리 사이에서 이루어진 대화를

소개합니다.

신부님들께 미사 직전 제의방에서 5분, 10분 동안 복사 아이들과 어떤 대화를 하시는지 물어봅니다.

 

거룩한 미사 직전이니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대침묵 속에 서 있는 것도 괜찮은 일입니다.

그러나 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 시간이 부담스럽고 힘든 순간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이지만, 자상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안부와 근황을 물어보고, 아이의 삶에 큰 관심을 가져주고

격려해준다면, 아이 입장에서 얼마나 기쁜 일이 되겠습니까?

 

신부님 가까이에서 복사를 서는 아이들은 어쩌면 사제나 수도성소로 초대하기에 가장 적합하고 준비된 아이들입니다.

우리 사제나 수도자들이 그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큰 사랑과 관심을 갖는다면,

나머지 일들은 하느님께서 반드시 하실 것입니다.

 

아이들도 다 보는 눈이 있다는 것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한 사제가 지극정성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그 미사를 충만한 기쁨으로 거행한다면, 그리고 미사의 정신을

구체적인 사목활동 안에 잘 실천한다면, 아이들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분명히 큰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성소는 그렇게 시작될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초유의 팬데믹과 탄핵 정국으로 인한 대혼란의 시대를 거쳐오며 기진맥진해있는

오늘 우리나라의 양들을 위해 더 많은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큰 부족함이나 나약함 앞에서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껄껄 웃으며 용서해줄 수 있는 착한 목자,

양들의 방황과 일탈 앞에서도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강조하는 착한 목자를 필요로 합니다.

 

성소 주일을 맞아 많은 분들이 큰 걱정을 넘어 탄식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저도 최근 발표된 한국천주교 통계자료 예비 사제·수도자 현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최근 지망자 숫자가 현격히 감소한 것입니다.

어느 한 지표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하락세가 심각합니다.

 

안 그래도 노령화 시대, 현직에서 물러난 사제·수도자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데,

입회자 숫자는 거의 절벽 수준이다 보니, 현상 유지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특히 대부분의 수도회·수녀회들에 있어 공동체나 사업체의 축소나 통폐합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다들 속수무책인 현실을 두려운 시선으로, 절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낙담만 하고 있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너무 비관적인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수도자들의 급감 현상은 평신도 형제자매들이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교회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선의와 열정을 지닌 훌륭한 평신도 형제자매들은 분명 우리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이런 기회에 사제·수도자들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것입니다.

더 치열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온몸과 마음으로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숫자나 외형에 연연하지 않고, 보다 내실 있는 사제 생활을 통한 증거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제의 삶, 수도자의 삶, 공동체적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줘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출처 - 살레시오회 내리피정 센터이야기


3. 이영근 신부님

 

부활 제4주일

복음요한 10,27-30

 

<믿고 사랑하는 이는 순명하게 됩니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며, 착한 목자 주일이요, 성소주일입니다. 

 

이날 우리는 참으로 귀한 말씀을 듣습니다.

 

사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목소리들이 혼탁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온갖 뉴스들과 비난 비판의 소리들, 그리고 우리 자신 안에서도 요란스런 생각들의 소리가 거세게 들려옵니다.

우리는 이 많은 소리들의 홍수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구별할 줄 알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사도13,47)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던 사도 바오로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던'(사도 13,52 참조) 제자들이 목자들의 모델로 제시됩니다. 

제2독서에서는 목자인 ‘어린양’의 보살핌으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성전 봉헌 축제’ 때 벌어진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논쟁을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둘러싸고 윽박지르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요한 10,27-28ㄱ)

여기에서, ‘목자’의 특성은 ‘알다’ 와 ‘준다’ 라는 동사로, ‘양’의 특성은 ‘알아듣는다’ 와 ‘따른다’ 라는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양들’은 들려오는 그 많은 말들 중에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들’이라면, 분명 그 많은 목소리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양들은 어떻게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는가?

그것은 먼저 목자가 양들을 '알고' 사랑하여 불렀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지극한 사랑의 목소리로 양들을 거듭거듭 불렀고, 그 바람에 목자의 목소리가 양들의 귀에 담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목소리를 체험으로 알고 기억하고 있어 알아듣게 된 까닭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들어,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그의 모든 명령을 성심껏 실천하면, 너희 하느님께서는 땅 위에 너희를 높여주실 것이다.”

(신명 28,1)

그러니 이미 ‘마음에 새겨 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신명기>의 ‘쉐마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하느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신명 6,4-6)

그러니 '알다' 라는 단어의 뜻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밀애의 영역에서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알아듣는다' 라는 말은 단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 곧 ‘믿음으로 듣는 것’이요, ‘사랑을 깨달아 알아듣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믿음으로 사랑을 받아들인 내면적인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며, 인격적인 교류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양들은 목자를 따르게 됩니다. 

'따른다'는 뜻은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란 의미를 넘어서, ‘곁에 있다’는 표현입니다.

곧 ‘곁에서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믿고 사랑하는 이는 순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명으로 따르면, 더 더욱 사랑을 깊이 깨달아 알아갑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믿고 따르는 이에게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 곧 당신의 생명이신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요한 10,28)  

결국 이 네 동사는 모두가 관계를 깊이 맺는 진실 된 ‘관계성’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성소의 길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주님과의 관계를 깊고 진실 되게 맺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말씀을 듣고 체험하면서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내 양들)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요한 10,28)

'당신의 손'은 바로 ‘당신의 권능’을 드러냅니다.

당신의 권능의 손에서 아무도 그분의 양들을 빼앗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잘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지적을 들어봅니다.

“그러나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라고 했지,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을 가진 이는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아무도 우리를 하느님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고, 아무도 우리를 채갈 수 없지만, 우리가 게으르다면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강해 18,3)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처럼 스스로 완고함으로 '주님의 목소리'를 믿지 않고 배척하는 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결코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서 스스로 떨어져 내리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목장의 주인이신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 10,30)  

그렇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자와 양들도 서로 알아보고 한 몸을 이루며, 목자는 당신의 지체인 양들을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무엇보다도 양들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양들을 구하시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요한 10,27)

주님!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서 숨지 않고 피해 달아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면전에 나서서 주님임을 알고 당신 사랑의 목소리 듣게 하소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게 하시고 깨달아 알게 하소서!

깨달아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새기게 하시고 따르게 하소서!

당신 말씀을 따름이 제 행복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5.10.부활 제3주간 토요일                                                           

사도9,31-42 요한6,60ㄴ-69

 

삶은 선택이다

“선택의 달인, 베드로와 열한 제자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시편116,12-13)

 

삶은 선택입니다.

삶은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우리가 수도생활을 선택한 것도 선택이전에 부르심의 은총이 선행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바 좋은 선택에 이어 훈련, 그리고 습관화입니다.

이에 해당되지 않는 수행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도 침묵도 겸손도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세월흐르면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좋은 습관으로 삽니다.

습관의 힘, 습관의 고마움입니다. 

 

오는 복음은 생명의 빵을 주제로 한 요한복음 6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영원히 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대의 많은 제자들에게

이해 난망의 큰 걸림돌이 됐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당대의 이런 처지에 놓인다면 우리 역시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당대 제자들 대부분의 보편적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발상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이해 은총이 절실한 때입니다.

육적인 사고에서 영적인 사고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는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주님의 깨달음의 은총없이 기존의 육적 이해 차원으로는 참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입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이 아버지의 이끄시는 은총의 필요성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어쨌든 이 일로 많은 제자들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당대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선택하여 항구히 따를 것인지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열두 제자를 대변한 시몬 베드로의 선택이 탁월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몬 베드로를 위시한 열두 제자를 선택의 달인이라 극찬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앞을 전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열두 제자뿐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 모두를 대변한 시몬 베드로의 답변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잘 훈련되고 습관화된 열두제자의 믿음인지 짐작이 갑니다.

자나깨나 어떤 상황에서든 한결같이 주님을 찾아, 주님을 따라 수도생활을 해온 우리 수도자들의 정주의 믿음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시 첫째 연도 정주의 선택, 훈련에 한결같은 노력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이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가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주님을 선택하여 항구했던 정주의 믿음을 상징하는 늘 거기 그 자리의 나무들을 닮은 여기 성 요셉 수도원의

베네딕도회 정주의 수도자들입니다.

주님을 선택한 베드로의 선택도, 주님만을 찾는 정주의 삶을 선택한 여기 수도자들의 선택도 옳았습니다.

물론 주님의 부르심의 은총이 선행한 덕분입니다.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의 선택이 옳았음이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눈부신 활약상이 생생한 증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완전히 하나된 베드로의 삶이요 베드로를 통해 일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동안 주님과의 일치를 위해 전심전력 노력을 다한 베드로의 항구한 믿음의 노력과 훈련을 능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베드로의 눈부신 성과는 애네아스 중풍병자를 고치는 장면에서,

또 타비타라는 도르카스를 다시 살리는 장면에서 환히 드러납니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타비타, 일어나시오.”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과 얼마나 깊은 일치의 삶을 살고 있는지 입증하는 치유와 소생의 기적입니다.

좌절할 때마다 내 이름을 부르고 “일어나시오.” 외치고 즉시 타비타처럼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탁월한 믿음의 베드로를 통해 일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새삼 예수님을 우리 삶에 동화시키는 것은 단지 ‘좋은 신자’(a good Christian)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처럼 우리 삶의 영원한 모델인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분 예수님과 함께 하나되어

‘완전한 인간 존재’(a perfect human being)가 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렇지만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믿기를 멈추고, ‘예수님의 길’(Jesus’ Way)을 더 이상 걷지 않는지요!

죽을 때 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주님을 한결같이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야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이자 학인인 우리의 신원임을 절감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을 선택한 우리 모두를 주님과의 온전한 일치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14,8).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요셉수도원


5/11(일) [(백)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되새김 구절

 

1. 미국의 작가 조지 엘리엇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을 조용히 바꾼 사람은 역사책에 나오지 않지만, 그들의 선함 덕분에 우리는 지금 숨 쉬고 있다.” 오늘, 이 성소 주일에, 그런 조용한 부르심에 응답한 삶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를 어디로 부르고 계십니까?” 그리고 이렇게 응답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조재형 신부)

 

2. 이런 기회에 사제·수도자들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것입니다.

더 치열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온몸과 마음으로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숫자나 외형에 연연하지 않고, 보다 내실 있는 사제 생활을 통한 증거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제의 삶, 수도자의 삶, 공동체적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줘야겠습니다.

(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요한 10,27)

주님!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서 숨지 않고 피해 달아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면전에 나서서 주님임을 알고 당신 사랑의 목소리 듣게 하소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게 하시고 깨달아 알게 하소서!

깨달아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새기게 하시고 따르게 하소서!

당신 말씀을 따름이 제 행복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베드로의 눈부신 성과는 애네아스 중풍병자를 고치는 장면에서,

또 타비타라는 도르카스를 다시 살리는 장면에서 환히 드러납니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타비타, 일어나시오.”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과 얼마나 깊은 일치의 삶을 살고 있는지 입증하는 치유와 소생의 기적입니다.

좌절할 때마다 내 이름을 부르고 “일어나시오.” 외치고 즉시 타비타처럼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이수철 신부)

 

5/11(일) [(백)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오늘의 기도

 

복음 <나는 내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요한 10,27)

주님!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서 숨지 않고 피해 달아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면전에 나서서 주님임을 알고 당신 사랑의 목소리 듣게 하소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게 하시고 깨달아 알게 하소서!

깨달아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새기게 하시고 따르게 하소서!

당신 말씀을 따름이 제 행복입니다.

아멘.

 

- 2025년 5월11일(일) 4시3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