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5월 18일 주일[(백) 부활 제5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5월 18일 주일[(백) 부활 제5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 드러내셨네. 알렐루야.
<대영광송>
본기도
거룩한 세례로 새로 난 저희가
하느님의 도우심과 보호로 이 세상에서 믿음의 열매를 맺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4,21ㄴ-27
그 무렵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21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25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27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저의 임금이신 하느님,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
○ 주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
○ 당신의 위업과 그 나라의 존귀한 영광, 사람들에게 알리나이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무궁한 나라, 당신의 통치는 모든 세대에 미치나이다. ◎
제2독서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21,1-5ㄴ
나 요한은 1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2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3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5 그리고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31-33ㄱ.34-35
방에서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인자하신 주님,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를 이끌어 주시어,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서로 사랑하며 사랑의 새 계명을 실천하게 하소서.
2.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인도자이신 주님, 갖가지 혼란을 겪어 온 이 나라를 굽어보시어, 이 나라에 참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경제적으로 안정되며 평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
3. 교육 주간을 맞이하여 기도합시다.
지혜의 샘이신 주님, 이 땅의 교육이 경쟁의 논리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인간의 전인적 성숙을 지향하며, 여러 교육 기관들이 영적 돌봄의 장이 되게 하소서.
4. 본당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저희 본당 공동체를 보살펴 주시어, 본당 구성원 모두가 하나 되고 이웃에 참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예물기도
한 분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과 저희를 하나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거룩한 진리를 깨닫고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빛의 자녀들이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났고,
믿는 이들에게 하늘 나라의 문이 열렸나이다.
주님의 죽음으로써 저희가 죽음에서 구원받았고,
주님의 부활로써 모든 이가 새 생명으로 부활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제5주일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집 축성하면 읽는 시편의 기도입니다. 지금 이렇게 좋은 집을 축성하는 것은 본인들의 수고와 땀도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으면 이렇게 좋은 집도 허물어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좋은 집을 축성 받을 때는 겸손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좋은 집을 축복 받았으니,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도 일이 잘 안 풀렸습니다.” 계획하고, 광고하고, 주변을 움직이고, 기대감이 한껏 부풀었는데 그 순간,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져 모든 준비가 물거품이 되는 일. 저도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작년 가을, 황창연 신부님의 강연을 부활 제2주일인 4월 26일로 계획했습니다. 지역 신문에 광고를 내고, 포스터를 만들고, 상점에 붙이고, 다른 본당에도 돌렸습니다. 기대가 컸고, 분위기도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연 4일 전, 갑작스럽게 신부님의 모친께서 선종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강연은 취소되었고, 준비는 중단되었습니다. 허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저는 곧 시편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리로다.” 이 말씀이 머리를 지나 가슴으로 내려왔습니다. 인간의 뜻과 계획이 아무리 완벽해도, 하느님의 뜻이 함께하지 않으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 동시에, 우리가 계획한 일이 무너졌다고 해서 그 시간이 모두 헛된 것은 아니라는 진리도 함께 떠올랐습니다.
부활 시기는 생명의 회복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길은 단순히 “살아났다”라는 기쁨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활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너의 인생을 하느님과 함께 지어가고 있는가?” 그리고 “너의 계획과 수고는 하느님의 뜻과 얼마나 함께하고 있는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삶은 언어의 집이며, 그 안에 우리가 존재한다"라고 했고, 문학가들은 종종 인생을 ‘건축의 예술’이라고 표현합니다. 좋은 삶이란 단지 튼튼한 기반 위에 올린 집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벽돌 하나하나 쌓아 올린 ‘은총의 집’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말씀은 우리 삶의 지향점을 다시금 알려 줍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줄기인 주님께 붙어 있을 때만 생명을 얻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룬 것이 아무리 크고 웅장해 보여도, 주님의 뜻과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반대로, 외견상 실패처럼 보이는 일도 하느님의 뜻 안에 있다면, 그것은 언젠가 아름다운 열매로 맺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회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회개’하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닭이 울면서 베드로 사도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베드로 사도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초대교회의 두 기둥인 바오로와 베드로 사도는 회개함으로써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행동’입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겸손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생기가 돋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사람은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고 해도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친교는 구체적인 우리의 행동과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5주일
복음: 요한 13,31-33a.34-35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잡목과 칡넝쿨, 가시덤불에 둘러싸여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반송 한 그루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모습이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가련한 아이 같았습니다.
잘 드는 톱으로 잡목을 잘라내고, 굵은 칡넝쿨과 가시덤불을 과감히 쳐주었습니다.
이미 오래전 말라 죽어버린 가지들도 깨끗이 잘라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점점 본래 지니고 있었던 어여쁜 자태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그루를 끝내고 다른 나무로 옮겨가려는데, 말끔하게 단장한 그 나무가 제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제게 와줘서 고맙습니다. 관심 가져줘서 고맙습니다.
죽어가던 저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쁘게 단장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 나무가 제게 건넨 말은 저 역시 날이면 날마다 주님께 말씀드려야 할 말씀 같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께서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제자들에게 건네시는데, 말씀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애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3-34)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사랑은 그냥 사랑, 통속적인 사랑, 드라마에 나오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상대방을 살리는 사랑, 상대방에게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를 주는 사랑,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사랑입니다.
언젠가 임종을 목전에 둔 한 형제님께 병자성사를 집전하러 중환자실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랄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미 병세가 깊어질 대로 깊어져 의식도 없는 듯 보였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저는 정성껏 병자성사를 정성껏 집전했고, 돌아서 나오기 직전,
그 형제의 귀에 대고 큰 목소리로 말씀드렸습니다.
“형제님, 그간 정말이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형제님께서 이 세상에 머무시는 동안 하신 일들을 보니 놀랍습니다.
달릴 길을 다 달리신 형제님의 삶을 보고 주님께서 정말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제 조금만 참으시면 영원하신 하느님 품에 안기실 것이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부디 마지막 순간까지 잘 견디시길 바랍니다.
형제님, 편안히 잘 가십시오. 먼저 천국에 도착하시면 주님께 안부 잘 전해주십시오. 형제님 사랑합니다. 파이팅!”
솔직히 저는 그 말씀을 드리면서, 설마 형제님께서 제 말씀을 들으실까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말씀을 끝내고 나니, 형제님의 얼굴 근육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형제님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형제님께서 제 말을 들으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인간 존재는 그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랑 빼면 시체인 존재가 인간입니다.
죽기 일보 직전인 사람, 치유 불가능한 말기 암 환자, 임종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살리는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에게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에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주는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 사랑의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나를 위해 더 존재하는 그를 보며, 그가 더욱더 존재하기를 바라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그를 더욱 아름답게 존재하도록 노력하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그를 더 아름답게 성장시키려고 각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그가 더욱 활짝 꽃피울 수 있도록 내가 한 줌 거름이 되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그가 더욱 충만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내가 기꺼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랑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출처 - 살레시오회 내리피정 센터이야기
3. 이영근 신부님
부활 제5주일
복음: 요한 13,31-33a.34-35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의 ‘비움의 사랑’을 제자들에게 ‘새 계명’으로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흔히 말하는 예수님의 ‘고별담화’의 첫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유언이라 할 수 있는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난 다음 이스가리옷 유다가 나가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영광스럽게 되셨음을 선언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요한 13,31-32)
이는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이 아들의 죽음에서 드러난다니 말입니다.
곧 아들을 죽게 하여 아버지가 영광을 받게 되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신 결과입니다.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이 사랑인 까닭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가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선언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선언하십니다.
여기에는 자신을 비워 아버지를 드러내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십자가에서의 ‘비움의 사랑’을 제자들에게 ‘새 계명’으로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34)
이 말씀은 계명 이상의 것입니다.
곧 선물임을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당신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선물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유언을 주시는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 사랑은 아무런 조건이나 공로도 없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의 선물인 그 ‘사랑’을 우리도 형제들에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그리고 이 ‘새 계명’의 실천이 바로 당신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표지가 됩니다.
이 계명이 ‘새 계명’이 되는 까닭은 이처럼 그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하느님의 사랑을 눈으로 볼 수 있게 온전히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
자신을 비움으로써 자신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형상을 드러내십니다.
그렇게 십자가 죽음의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증언하게 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곧 자신이 비워지면 자신 안에 계시던 그리스도의 형상이 드러나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인 <요한묵시록>에서 말합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
(묵시 21,3)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거처를 마련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사랑은 관계 능력이요 공존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유대와 공존은 다름 아닌 자신을 비워줌으로써 타인이 흘러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타인을 사랑하되, ‘먼저’ 자신을 건네주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자신을 비워낼 때 타인은 비워진 그 자리로 들어와 바로 나 자신이 될 것입니다.
결국 비워진 바로 그 자리가 형제들이 들어서는 자리요, 하느님이 드러나는 영광의 자리가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삼위일체 관계의 공존의 사랑에서 봅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자기 비움, 자기 죽음의 사랑으로 관계의 사랑, 공존의 사랑을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인 ‘사랑의 새 계명’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주신 이 사랑의 힘이 흐르고 있습니다.
바로 이 힘으로 우리들 사이에 사랑의 유대가 드러나는 곳에서, 사람들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영광은 형제 사랑 안에서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가운데 거처하시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형제들에게 바로 이 사랑을 선물해야 할 일입니다.
선물로 받은 그 사랑을 선물로 건네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선물로 건넨 그 자리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이 드러나게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처하시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34)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기 전에 ‘먼저’ 저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토록 당신께서는 사랑으로 저희 안에 거처하십니다.
당신께서 ‘먼저’ 주신 그 사랑을 깨닫게 하소서!
그 사랑에 흠뻑 젖고, 그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5,17.부활 제4주간 토요일
사도13,44-52 요한14,7-14
그리스도 예수님과 우정과 일치의 여정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마라”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시편92,3)
주차장 주위, 때되어 만개하기 시작한 이팝나무꽃들이 장관입니다.
비개인후 새벽 맑은 밤하늘에 유난히 밝게 빛나는 달과 샛별입니다.
아주 예전 임향한 그리움을 표현한 "별"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이 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그리움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당신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수호천사 별이 되어
언제나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1997.4. >
삶은 여정입니다. 모두가 예외없이 '언제나 길위의 존재들'(being always on the way)입니다.
길에서 태어나 길위를 걷다가 길위에서 죽습니다.
이런 도상의 여정에서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은 길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고양 국제 꽃 박람회”에서 70대 중반을 넘어선 사촌형제들과의 만남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번은 뜻밖에도 약속이나 한 듯이 부부동반해서 나타났습니다.
이제 완연한 노부부들의 모습이었고 사촌 형제들 모두가 소리없이 늙은 아내를 지극히 섬기는 모습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제 일간지에서 황지우 시인의 “늙어가는 아내에게”라는 긴 시를 읽었습니다.
중간 부분만 생략하고 인용합니다.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 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이 시에 대한 평자 박준 시인의 다음 글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침묵의 사랑도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혼자의 시간을 견디고 견디며 고요를 마주해야 합니다.
떠나는 일보다 머무는 일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균열을 도드라지기 하는 것은 대화입니다.
주고 받을 다정한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아니라, 서로 딛고 있는 다정한 침묵의 시간이 앙상해 질 때
사랑은 종말의 순간을 가까이 불러들입니다.”
아주 오래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제 물음에 “그냥 살면 돼.”라 답을 주신,
지금은 고인이 된 옛 장상도 생각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이치는 노부부든 노수도자든 똑같습니다.
최선을 다해 서로 늙어가는 일입니다.
노수도자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또 수도형제들과 함께, 사랑한다는 말이나 확인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처음 때부터 모임에 참석하는 미국에 사는 사촌 제수씨는 그때 마다 정성이 담긴 촌지를 주는 데,
아마도 평생 독신의 수도사제로 사는 제가 애틋한 마음에서 일 거라 추측이 되고 저는 가정미사를 봉헌해 드립니다.
삶은 여정입니다. 청춘으로 시작했던 도반 수도자들도 70대 중반 전후가 되니 완연한 노인의 모습들입니다.
모두가 나이가 더해 갈수록 서로, 또 주님께 최선을 다하며 사는 모습들이 참 아름답고 거룩해 보입니다.
이런 면에서 복음의 예수님 제자들은 너무 젊었습니다.
필립보와 예수님이 주고받는 대화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러나 젊은 필립보의 열정과 솔직함이 좋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느냐?”
그대로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서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평생 정주 수도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에 대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성 베네딕도가 누누이 강조하는 바,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시종여일 그리스도 예수님과 우정의 일치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필립보는 주님 말씀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며 이후 주님과 사랑과 우정의 일치의 여정에 한결같이,
끝까지 정성과 사랑을 다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순교로서 입증되는 일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다음 말씀도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겠다는 격려와 자극이 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과 일치의 믿음의 여정에서 우리의 바램은 그대로 주님의 바램과 하나가 될 것이고
그대로 응답될 것이라는 주님 약속의 말씀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다시피 이미 이런 성숙된 일치의 경지에 이른 바오로와 바르나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의 절정에 이른 제자들은 복음의 필립보와 달리 그대로 아버지의 얼굴을 뵙듯이
주님을 뵙고 믿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백절불굴의 자세와 다음 담대한 선언이 이를 입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성령따라 자유롭게 신바람나게 복음 선포의 활동에 매진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요,
이들 제자들은 유다인들에게 쫓겨 가면서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계속될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과
우정의 일치를 날로 깊게 해 주시며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하시는 일로 나를 기쁘게 하시니,
손수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시편92,5).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요셉수도원
5/18(일) [(백) 부활 제5주일], 되새김 구절
1.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조재형 신부)
2. 인간 존재는 그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랑 빼면 시체인 존재가 인간입니다.
죽기 일보 직전인 사람, 치유 불가능한 말기 암 환자, 임종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필요합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34)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기 전에 ‘먼저’ 저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토록 당신께서는 사랑으로 저희 안에 거처하십니다.
당신께서 ‘먼저’ 주신 그 사랑을 깨닫게 하소서!
그 사랑에 흠뻑 젖고, 그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느냐?”
(이수철 신부)
5/18(일) [(백) 부활 제5주일], 오늘의 기도
복음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34)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기 전에 ‘먼저’ 저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토록 당신께서는 사랑으로 저희 안에 거처하십니다.
당신께서 ‘먼저’ 주신 그 사랑을 깨닫게 하소서!
그 사랑에 흠뻑 젖고, 그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5월18일(일) 7시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