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6월 19일 목요일[(녹) 연중 제11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6월 19일 목요일[(녹) 연중 제11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본기도
자비로이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희가
거룩한 은총의 도움으로 계명을 지키며
마음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11,1-11
형제 여러분,
1 아무쪼록 여러분은 내가 좀 어리석더라도 참아 주기를 바랍니다.
부디 참아 주십시오.
2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
3 그러나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4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
5 나는 결코 그 특출하다는 사도들보다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6 내가 비록 말은 서툴러도 지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든 일에서 갖가지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7 여러분을 높이려고 나 자신을 낮추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대가 없이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다고 해서,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는 말입니까?
8 나는 여러분에게 봉사하려고 여러 교회에서 보수를 받는 바람에
그들을 약탈한 꼴이 되었습니다.
9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마케도니아에서 온 형제들이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었습니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자제하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10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걸고 말하는데,
아카이아 지방에서는 나의 이러한 자랑을 아무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11 내가 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아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 손이 하신 일들 진실하고 공정하시옵니다.
○ 주님을 찬송하리라. 올곧은 이들의 모임, 그 집회에서, 내 마음 다하여 찬송하리라.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그 일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깨치네. ◎
○ 그분 업적은 엄위롭고 존귀하네. 그분 의로움은 영원히 이어지네. 당신 기적들 기억하게 하시니,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다. ◎
○ 그 손이 하신 일들 진실하고 공정하네. 그 계명들은 모두 참되고, 진실하고 바르게 이루어져, 영원무궁토록 견고하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우리는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네.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사람을 새롭게 하는 성사가 되게 하시니
이 제사가 저희 육신과 영혼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또는>
요한 17,1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가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소서.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거룩한 잔치에서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저희가 주님의 사랑으로 친교를 이루어
주님의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는 우물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물을 벗어나면 새로운 세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편견과 자신만의 고집으로 사는 사람을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있습니다. 우리의 태양계는 ‘우리은하’에 속해있습니다. 우리은하는 우주의 한쪽 끝에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주는 크고 넓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좀 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외로운 섬과 같은 지구에서 사는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의 별 지구에서 사는 우리는 생태계를 보전하여야 합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서로를 죽이고, 죽어야 하는 비극은 없어야 합니다. 미움과 원망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겸손과 나눔으로 평화와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가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는 사제들은 자신이 속한 본당이 전부인 줄 압니다. 하지만 미국에 오면 더 넓고 큰 공동체가 사제들을 환대하는 모습을 봅니다. 우선 교구 사제 모임이 있습니다. 교구 사제 모임은 낯선 곳에서 살아야 하는 사제들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를 줍니다. 같은 신학교에서 배웠고, 같은 교구에서 살았기에 서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1년에 한 번씩 모여서 피정합니다. 한국에서 주교님이 오셔서 함께 미사하고, 면담합니다. 지구 사제 모임이 있습니다. 북미주에는 10개의 지구가 있습니다. 제가 있는 곳은 ‘중남부 지구’입니다. 뉴욕에 있을 때는 ‘동북부 지구’였습니다. 지구 사제 모임에서는 사제들이 함께 연대하여 교우들의 신앙을 위해서 사목합니다. 꾸르실료, ME, 레지오, 성령 기도회와 같은 신심 단체를 지구 차원에서 지원합니다. 북미주 사제 협의회가 있습니다. 북미주 사제 협의회는 ‘매일 미사’를 발행합니다. 파견 사제와 수도자를 위한 피정을 개최합니다. 매년 사제 총회를 통해서 친교와 연대를 모색합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너(I-Thou)’ 관계와 ‘나-그것(I-It)’ 관계로 구분했습니다. ‘나-너’의 관계는 상대를 인격으로 대하며, 만남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관계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바로 이 ‘나-너’ 관계이며, 우리가 이웃과 맺는 모든 진정한 만남 역시 ‘나-너’의 영역에 속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내가 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아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이 고백은 바오로가 단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아니라, 신자들을 ‘너’로서 대하며, 사랑과 책임 속에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가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소서.” 이 기도는 단순한 소망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서로 연결된 존재로 살아가야 함을 선포하는, 사랑의 선언입니다.
우물 밖의 세계는 생각보다 넓고 아름답습니다. 자기중심의 삶을 벗어나,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더 큰 사랑, 더 깊은 연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겸손과 나눔으로 살아갈 때, 이 작은 지구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가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소서.”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마태오 6,7-15
세상이 그릇된 길로 나아갈때 교회가 침묵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아버지 아브라함,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의 뒤를 잇는
대예언자가 있었으니 엘리야 예언자였습니다.
살아생전 엘리야가 보여준 놀라운 예언의 능력과 통찰력, 지도층 인사들의 부패와 타락,
우상숭배 앞에서 보인 단호한 태도 앞에 백성들은 큰 갈채를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시자 세상 사람들은
엘리야 예언자가 환생했다고 믿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정도로 그는 당대 백성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었는데,
비결은 그가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하느님만이 전부였습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의중을 가감없이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릇된 길로 접어든 왕실과 고관대작들 앞에 목숨이 두려워 다들 찍소리 못하던 순간에도
엘리야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의 악행을 지적했고 고발했습니다.
엘리야가 예언자로 활동하던 시기는 이스라엘이 큰 위기에 봉착해있던 순간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듯 합니다. 우상숭배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합 임금과 혼인한 페니키아 출신 왕비 이제벨이 들여온 바알 신 숭배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왕국의 존립까지 위협받고 있었습다.
마치 타오르는 한줄기 횃불같았던 엘리야 예언자는 유일하신 하느님을 배반하고 존재하지도 않은
바알신에 푹빠져있던 왕과 왕비 지도층 인사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이란 유일하고 든든한 '빽'을 등에 업고 마치 활화산처럼 활활 뜨겁게 타오르던
엘리야 예언자의 모습이 참으로 멋져보입니다.
어쩔수 없는 한계와 나약함과으로 인해 쉼없이 흔들리는 세상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교회와
예언자의 몫을 살아내야하는 사목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세상과 교회는 늘 함께 가야 맞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눈물을 외면한채 사목자들이
교회 울타리 안에만 갇혀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오늘 엘리야 예언자는 온몸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이 그릇된 길로 향해 갈때, 죽음과 공멸로 나아갈때 교회는 침묵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엘리야 예언자처럼 하느님의 입이요 오른팔로서 거룩한 분노를 분출해야 마땅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출처 - 살레시오회 내리피정 센터이야기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마태오 6,7-15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를 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줍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를 보면, 그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을 목표로 살고 있으며,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욕망의 해석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기도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 있다.”
그러니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이 담겨 있습니다.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모든 말씀이 이 기도문 안에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 기도는 짧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또한 이 기도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드리는 ‘기도의 모범’을 제시해줍니다.
곧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는 어떤 형태로든 ‘주님의 기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준 기도’로서,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Oratio Domini)라는 전통적인 표현에 대해서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65)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드립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해서 맨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빠, 아버지”입니다.
곧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 “아버지”를 부르면서 비로소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입니다.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중세시대로부터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의 기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준다.”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사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를 올바르게 바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마태 6,8)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6.18.연중 제11주간 수요일
2코린9,6ㄴ-11 마태6,1-6.16-18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수행들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시편112,1)
참된 수행생활이 절박한 시대입니다.
생각이나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수행자로 사는 일이 으뜸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겸손하고 부지런한 수행자로 사는 것입니다.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참된 영성을 살려는 믿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예나 이제나 특히 요즘 부각되는 수도생활에 문제점 셋이 수행, 사람, 돈이요 우선순위의 으뜸은 수행입니다.
아무리 전통좋고, 자연환경좋고, 건물좋은 수도원도 그 안에 참된 수행자라는 보물이 없으면 다 쓸모없습니다.
수도자답게 사는 올바른 수행의 참 좋은 수행자들이 있을 때, 성소자 사람도 줄을 잇고, 돈도 따릅니다.
그러나 우선순위로 하면 참된 수행자들의 공동생활이요, 사람, 돈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고 따르는 수도자다운 본질적 삶에 충실할 때 성소자도, 돈도 자연스럽게 따르기 마련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라는 시집이 눈에 띕니다.
“살아 있는 것만 꿈꾼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진정 진선미(眞善美) 하느님을, 하늘나라를 꿈꿀 때 살아 있다 할 수 있고 또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하느님은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옛 현자 <다산>의 가르침도 수행생활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삶의 격을 높이는 것은 지위나 신분이 아니라, ‘부지런함’이다.”
“어찌하면 뭉툭한 것을 뚫을 수 있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
어찌하면 막힌 것을 트이게 할 수 있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
어찌하면 거친 것을 연마할 수 있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
분명 노력하는 천재, 수행자 다산의 체험을 반영한다 싶습니다.
예외없이 일가를 이룬 분들은 노력하는 천재들임을 봅니다.
어제 하느님의 진짜 농부 어느 자매님이 탐스런 무들을 농기계로 옮기며 환히 웃는 사진이
너무 건강하고 아름답고 감동스러워 보낸 카톡 메시지와 자매의 답글을 나눕니다.
말그대로 세상 속의 수행자 자매입니다.
“참 멋진 사진 감사합니다. 주님의 여전사! 사랑하는 자매님 위해 생미사 봉헌합니다.
하느님의 진짜 농부, 자매님, 파이팅!”
“아부지...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찬미영광 영원히 홀로 받으소서. 신부님, 감사합니다.”
아, 그렇습니다. 모든 수행들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런 순수한 하느님 사랑에서 샘솟는 열정의 수행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농사를 사랑하는, 일상의 삶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농부 자매입니다.
절로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옛 애송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자주 인용해도 늘 좋고 새롭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27년전 성탄절에 어느 수녀님으로부터 빨간 칸나 꽃을 선물받고 불현듯 떠오른 시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수행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세 수행들,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비단 세 수행뿐 아니라 참되고 올바른 겸손한 수행들을 통해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쌓습니다.
참된 관상가, 참된 신비가, 참된 영성가로 살아야 하는 우리 수행자들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듯 자선을, 기도를, 단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순결을, 공부를, 침묵을, 노동을, 겸손을, 모든 수행을, 자연을, 일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수행이 우리를 순수하게 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유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섬김의 활동을 목적으로 합니다.
섬김의 사랑,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 섬김의 리더십이 진짜입니다.
영성이 있다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뿐입니다.
이제 복음의 섬김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보편적 덕목이 되었습니다. 어제 읽은 글도 좋아 나눕니다.
“권력은 봉사다. 우리가 카르텔 정권에서 잃어버린 가장 근본적인 정치언어는 바로 공복(公僕)이라는 단어다.
공직자는 국민의 종이어야 한다는 말은, 그저 관료주의적 구호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원초적 계약이다.”
하느님 중심의 참된 수행자는 하느님의 충복(忠僕)도 됩니다.
충견(忠犬)만도 못한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사람 중심의 위선적이고 과시적인 허영이 말끔히 사라진, 하느님 중심의 수행이 참 아름답고 겸손하며
이런 관상의 숨겨진 삶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참되고 겸손한, 아름다운 수행의 원리입니다.
예전 불가의 대선사 성철 스님이 탄복한 구절들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자신에 마음을 활짝 열어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하느님 중심의 철석같은 믿음이요
사랑의 수행들입니다.
이런 수행을 통해 외적, 물적인 것으로부터 집착에서의 이탈로 날로 초연한 자유와 더불어 깊어지는
주님과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바오로 사도는 성서를 근거로 자발적인 사랑의 자선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참 좋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 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라는 성경의 기록도 있습니다.”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레오 교황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역시 각별합니다.
교황의 “하느님이 듣지 못하는 부르짖음은 없다(There is no cry God does not hear)”,
“주교들은 가난한 이들로부터 시선을 돌려서는 안된다(Bishops must not turn gaze from the poor)”라는
강론 대목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자발적 사랑의 참된 자선은 그대로 하느님 찬미가 되고 하늘에 보물을 쌓는 첩경의 지름길이 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참된 수행자로 살아가는데 좋은 도움이 됩니다.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 빛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시편112,4).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요셉수도원
6/19(목) [(녹)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우물 밖의 세계는 생각보다 넓고 아름답습니다. 자기중심의 삶을 벗어나,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더 큰 사랑, 더 깊은 연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겸손과 나눔으로 살아갈 때, 이 작은 지구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가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소서.”(조재형 신부)
2. 어쩔수 없는 한계와 나약함과으로 인해 쉼없이 흔들리는 세상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교회와
예언자의 몫을 살아내야하는 사목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세상과 교회는 늘 함께 가야 맞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눈물을 외면한채 사목자들이
교회 울타리 안에만 갇혀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오늘 엘리야 예언자는 온몸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이 그릇된 길로 향해 갈때, 죽음과 공멸로 나아갈때 교회는 침묵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엘리야 예언자처럼 하느님의 입이요 오른팔로서 거룩한 분노를 분출해야 마땅합니다.(양승국 신부)
3.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마태 6,8)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참된 관상가, 참된 신비가, 참된 영성가로 살아야 하는 우리 수행자들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듯 자선을, 기도를, 단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순결을, 공부를, 침묵을, 노동을, 겸손을, 모든 수행을, 자연을, 일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수행이 우리를 순수하게 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유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섬김의 활동을 목적으로 합니다.
섬김의 사랑,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 섬김의 리더십이 진짜입니다.
영성이 있다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뿐입니다.
이제 복음의 섬김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보편적 덕목이 되었습니다. (이수철 신부)
6/19(목) [(녹)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마태 6,8)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6월19일(목) 7시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