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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8월 16일 수요일[(녹) 연중 제19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8월 16일 수요일[(녹) 연중 제19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입당송

시편 74(73),20.19.22.23 참조
주님, 당신의 계약을 돌아보소서! 가련한 이들의 생명을 저버리지 마소서. 일어나소서, 주님, 당신의 소송을 친히 이끄소서. 당신을 찾는 이들이 외치는 소리를 잊지 마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오니
저희 마음에 자녀다운 효성을 심어 주시어
약속하신 유산을 이어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었다. 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34,1-12
그 무렵 1 모세가 모압 평야에서 예리코 맞은쪽에 있는
느보 산 피스가 꼭대기에 올라가자, 주님께서 그에게 온 땅을 보여 주셨다.
단까지 이르는 길앗, 2 온 납탈리, 에프라임과 므나쎄의 땅,
서쪽 바다까지 이르는 유다의 온 땅, 3 네겝, 그리고 초아르까지 이르는 평야 지역,
곧 야자나무 성읍 예리코 골짜기를 보여 주셨다.
4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 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
5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죽었다.
6 그분께서 그를 모압 땅 벳 프오르 맞은쪽 골짜기에 묻히게 하셨는데,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한다.
7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
8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 평야에서 삼십 일 동안 모세를 생각하며 애곡하였다.
그런 뒤에 모세를 애도하는 애곡 기간이 끝났다.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 찼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의 말을 들으며,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실천하였다.
10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11 주님께서 그를 보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와 그의 모든 신하와 온 나라에 일으키게 하신
그 모든 표징과 기적을 보아서도 그러하고,
1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이룬 그 모든 위업과
그 모든 놀라운 대업을 보아서도 그러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66(65),1-3ㄱㄴ.5와 8.16-17(◎ 9ㄱ과 20ㄷ 참조)
◎ 제 영혼에 생명을 주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그 이름, 그 영광을 노래하여라. 영광과 찬양을 드려라. 하느님께 아뢰어라. “당신이 하신 일들 놀랍기도 하옵니다!” ◎
○ 너희는 와서 보아라, 하느님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이루신 놀라운 그 위업을.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찬양 노래 울려 퍼지게 하여라. ◎
○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모두 와서 들어라. 그분이 나에게 하신 일을 들려주리라. 내 입으로 그분께 부르짖었으나, 내 혀 밑에는 찬미 노래 있었네. ◎

복음 환호송

2코린 5,19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 알렐루야.

복음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자비로 이 예물을 바치오니
주님의 교회가 드리는 이 예물을 받아들이시어
저희에게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47(146─147),12.14 참조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기름진 밀로 너를 배불리신다.

<또는>

요한 6,5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받아 모신 이 성체로 저희를 구원하시고
진리의 빛으로 저희를 굳세게 하소서.
우리 주 …….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산보 중에 강의를 듣는 것은 기쁨입니다. 얼마 전에 트리구조와 네트워크구조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인류는 문명과 문화가 발전하면서 지식을 트리구조로 발전시켰습니다. 인류의 발달은 수렵, 유목, 농경, 도시의 순서로 발전하였습니다. 진화의 사슬도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의 순서로 이해하였습니다. 생명은 바이러스, 세포, 단세포, 다세포, 초식동물, 육식동물의 순서로 이해하였습니다. 최근까지는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천민, 양민, 중인, 양반, 왕족의 순서로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성서도 믿음의 조상을 족보를 통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아담에서 예수님까지, 아브라함에서 예수님까지의 족보를 소개하였습니다. 대학도 단과대학, 종합대학의 순서로 이해합니다. 대학 안에는 전공과목이 있고, 전공과목도 세분화 시킵니다. 신학교에서도 철학, 신학, 성서학, 교회법, 교리교수법과 같은 순서로 나누어서 공부하였습니다. ‘트리구조는 인류의 발전상황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트리구조는 인류가 지식을 쌓으면서 만들어온 훌륭한 도구입니다.

 

현대에 이르면서 트리구조의 대안으로 네트워크구조가 떠오른다고 합니다. 전기와 컴퓨터 그리고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네트워크 구조에 대한 인식이 생겼다고 합니다. 트리구조는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이 힘들고 긴 단점이 있습니다. 조직이 커지면서 명령을 내리고, 수행하는 단계가 복잡하고 길어질 수 있습니다. 새로운 변화와 상황에 대처하는 순발력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네트워크구조는 빛의 속도로 연결되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습니다. 인공지능,  GPT, 메타버스, 가상현실, 자율운전과 같은 개념은 네트워크구조의 발달에 따라서 이루진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학습하고 연구해서 얻어지는 지식과 논문이 불과 10분도 안 되어서 눈앞의 현실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인류의 소중한 유산인 트리구조도 앞으로 더 발전하겠지만 새로이 등장한 네트워크구조에 대한 이해를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컴퓨터의 등장과 비데를 사용하면서 종이의 수요는 줄어들지만 종이는 더 고급한 방향으로 만들어 질 것입니다. 저도 아직은 트리구조에 익숙해있습니다. 교구, 본당, 본당 신부, 보좌신부, 수도자, 평신도라는 구조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구조에 익숙했을까요? 예수님은 어떤 구조의 삶을 선호하셨을까요? 예수님은 트리구조보다는 네트워크구조의 삶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율법과 계명이라는 트리구조를 초월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신분과 계급이라는 트리구조를 초월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가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선생과 제자라는 트리구조를 초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벗이라고 하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세상의 셈법은 법과 원칙에 따라서 이루어지지만 하느님의 셈법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해서 정해진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던 죄인은 모든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과 우리를 하나로 연결하는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의 기쁜소식은 트리구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의 기쁜소식은 네트워크구조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런 나라를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그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네트워크구조에 접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와 회개입니다. 용서와 회개의 삶을 사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의 네트워크구조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2023년 가해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마태오 18,15-20

 

교회 공동체 개인 간의 연결이 은총의 흐름에 끼치는 영향

: 커뮤니티(교회) = 카리스마(성령) + 커넥팅(연결 시스템) 

 

오늘 복음 말씀은 교회의 공동체성과 교회에 맡겨진 권한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먼저 단둘이 만나서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냥 무시해버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곧 당신 자신으로 파견하십니다. 교회를 받아들이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아니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파견하시며 당신의 모든 권한, 곧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결코 한 사람의 힘만으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도 성부와 성자, 그리고 두 분이

당신을 내어주실 때 선물 전달자의 역할을 해주시는 성령, 이렇게 세 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많은 본당이 성사 생활을 하는 신자수가 상당히 줄어들었습니다.

다시 나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의 커넥팅이 잘 된 이들입니다.

어떤 단체에 속해서 활동하던 분들은 대부분 다시 나오지만, 혼자 미사만 다니던 분들은

상당수가 계속 냉담해하고 있습니다. 성사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공동체에 속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한 자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새언니가 마귀에 들렸다는 것입니다.

코로나가 풀리면서 성당에 나가려고 해도 성당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프고 성당 가까이 가면

몸이 굳어 식은땀이 난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성당에 데리고 나왔지만,

새언니는 전혀 더운 날씨가 아니었는데도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고 합니다.

 

어찌어찌 고해성사를 보게 하고 성체를 영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앞으로 나아갈 때도 성당 모든 신자가 알아볼 정도로

몸이 마구 흔들렸습니다. 성체 한 번 영하게 하는데 그런 고생을 하면서

시누이도 진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이때 성모님께서 깨달음을 주셨다고 합니다. 자기 혼자 새언니를 도우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혼자 안되면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레지오 하시는 분들에게 말해서

언니를 레지오에 입단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몇 주 사이에 악령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혼자 안 되면 공동체의 도움을 청하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의 출신 본당의 본당신부님께서도 이와 같은 일을 겪으셨었습니다.

미국에서 교포 사목하실 때인데 어떤 분이 악령에 시달린다고 신자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신부님은 겁이 났습니다. 자신은 마귀를 쫓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끌려가다시피 해서 도착해보니 마귀는 당당히 신부님을 노려보며 신부님의 죄를 상세하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창피해서 더 듣고 있을 수 없었지만, 또 오기가 생겨서 싸워보기로 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힘이 아닌 공동체의 힘을 빌려보기로 한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빙 둘러앉게 만들어 묵주기도를 함께 바쳤습니다. 처음엔 비웃었지만, 한 단씩 늘어나며

악령도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였습니다. 식은땀을 흘리고 소리를 지르다가 5단에 다다르자

마귀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그 사람을 놓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을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 능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힘이 필요합니다. 공동체는 마치 그물과 같습니다. 공동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만큼 많은 물고기를 놓칩니다. 지금 소공동체 시스템 안에서는 소외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포처럼 어디엔가 다 속해 있게 만들어야 교회의 힘이 강해집니다.

 

우리 각자는 세포와 같고 그 세포들이 다 몸에 연결되어 있을 때 그 몸이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소공동체 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연결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역량으로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예수님이 새로운 모세라면, 새로운 ‘계약 궤’는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은 “성모승천” 교리를 예형론을 통해 이해 해 보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단지 새 아담만이 아니라 새로운 출애굽을 이끌 새로운 모세이기도 합니다. 모세가 40일 밤낮으로 시나이 산에서 단식했듯이(탈출 34,28) 예수님께서도 40일 밤낮을 광야에서 단식하시고(루카 4,1-2), 모세가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신비로운 빵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였듯이(탈출 16,1-31), 예수님께서도 외딴 곳에서 신비로운 빵을 많은 군중에게 먹이시고(루카 9,10-17), 모세가 이스라엘 여두 지파와 계약을 맺듯이(탈출 24,1-8), 예수님께서는 최후만찬 때 열두 제자와 “새 계약”(루카 22,20)을 맺으십니다. 그렇지만, 모세의 ‘출애굽’이 이집트 땅에서 시작해서 약속의 땅에서 끝나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출애굽’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하늘나라에서 끝납니다(루카 9,30-31;24,50-51). 곧 지상의 약속된 땅은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라 단지 출발지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새로운 모세라면, 새로운 ‘계약 궤’는 어디에 있을까요?
 
‘계약 궤’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에 도착해서 십계명을 받았을 때(탈출 19-20장),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지상 거처로서 당신 백성들 가운데 머무실 장소로 ‘성막’을 짓고(탈출 25,8-9), 그 안에 당신께서 백성을 만나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장소로 ‘계약 궤’를 만들라고 합니다(탈출 25,8-22).
 
이 ‘계약 궤’에는 십계명이 기록된 ‘두 개의 증언판’(탈출 31.18)과 ‘만나’가 담긴 항아리, 그리고 싹이 돋은 대사제 아론의 신비로운 ‘지팡이’가 모셔졌는데(탈출 16,34;민수 17,25), 그 위에 하늘에서 주님의 ‘영광인 구름’이 내려와 머물렀습니다(탈출 40,21.34-38). 이 ‘영광의 구름’은 당신 백성과 함께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지상에 내려오셨다는 가시적인 표지였으며, 당신 백성을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에제키엘 예언자는 예루살렘 성전이 바빌론 제국에 파괴되기(기원전 587년) 전에 하느님 ‘영광의 구름’이 예루살렘에서 떠났다고 전합니다(에제 10장). 그리고 예레미야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다시 ‘자비를 보이실 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어야 하며, ‘주님 영광의 구름’이 나타난 것을 보면, 거기 ‘계약 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2마카 2,8)고 말합니다.
 
사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는 ‘하느님 영광의 구름’과 ‘잃어버린 계약 궤’가 없이 텅 비어 있었고, 그래서 당시 유다인들은 잃어버린 ‘계약 궤’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하느님 현존을 나타내는 ‘영광의 구름’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신약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께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이렇게 해서, 성막 위에 내려온 ‘영광의 구름’과 ‘마리아에게 내려온 성령’이 연결됩니다. 곧 “주님 영광의 구름이 성막을 덮고 있었다(επισκιαξω).”(탈출 40,34-35)는 말과 “성령이 동정 마리아를 덮을 것이다(επισκιαξω).”(루카 1,35)라는 말이 연결됩니다. 곧 성막 안에 자리한 ‘계약 궤’가 출애굽 여정에서 하느님 현존의 특별한 자리였듯이, 이제 주님 탄생 예고를 통해 마리아는 새 출애굽 여정에서 하느님 영광이 머무시는 특별한 장소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루카복음사가는 주님 탄생 예고에서 마리아를 ‘새 계약 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주님 현존이 머무는 곳인 ‘계약 궤’가 나타날 때처럼 환희에 차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루카복음사가는 예수님을 새로운 출애굽을 이끌 ‘새 모세’로, 그리고 마리아를 하느님 현존의 새로운 지상 거처인 ‘새 계약 궤’로 묘사해 줍니다.
 
또한, 오늘 <제1독서>에서는 ‘태양을 입은 여인’에 대한 요한의 환시(묵시 11,19-12,2)를 통해, ‘여인과 계약 궤’와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하늘에 있는 하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나면서, ~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의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날 것입니다.”(묵시 11,19-12,2)

이렇게 ‘계약 궤’와 ‘여인’은 하늘의 성전에서 나타납니다. 이는 ‘참된 계약 궤’가 더 이상 지상에 있지 않고 천상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여기에서, ‘계약 궤’와 ‘여인’은 한 사람에 대한 이중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새 계약 궤’라면, 그녀의 몸은 ‘하느님의 지상 거처’라는 말이 되고, 예수님은 ‘지상의 하느님’이 말이 됩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줍니다. 결국, ‘새 계약 궤’로서의 마리아의 정체성의 신비는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아주 깊은 신비를 밝혀줍니다.
 
이를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 교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 하느님 말씀의 거처이신 분, 오 새로운 계약의 궤여, 순금대신 순결을 입으신 분, 당신은 계약의 궤, 참된 만나를 담은 황금 그릇, 신성이 머무르는 육신이로다. ... 당신 안에 온전한 발, 머리, 완전한 하느님의 온몸을 지니고 계시니, 당신이야말로 하느님께 쉬시는 거처로다.”
 
또한,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리아 안에 주님께서 친히 와 계시니, 마리아께서는 ... 계약 궤이며, 주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다.”([교리서] 2676항)
 
그래서 교종 비오 12세께서는 1950년 마리아의의 육신이 천상으로 들어 올림 받으심을 믿을 교리로 선포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이들은) 썩지 않는 나무로 지어져 주님의 성전에 안치된 계약 궤를 동정녀 마리아의 지극히 순결한 육신의 예형으로 여겼습니다. 마리아의 육신은 무덤의 부패로부터 더럽혀지지 않은 채 보존되었으며 천상의 지고한 영향으로 들어올림을 받으셨습니다.”(교종 비오 12세,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느님] 26항)

이제 우리는 답을 찾았습니다. 잃어버린 ‘계약 궤’는 어디에 있을까요? 신약성경은 ‘참된 계약 궤’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말해줍니다. 바로 “하늘에”(묵시 11,19) 있습니다. ‘옛 계약의 궤’는 참된 하느님의 거처,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요한 1,14)의 어머니 마리아의 예형인 것입니다. 곧 마리아는 ‘새 계약의 궤’로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룩하게 되시고, 육신의 부패로부터 보존되시고, 하늘로 들어 올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들어올림 받으신 마리아는 육신의 부활과 승천이 예수님께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부활하고 승천하리라는 희망을 보여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가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 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성모승천대축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우리 모두 승천하신 마리아 성모님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참으로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에 적절한 권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5주년인 2018년 3월19일 자신의 세 번째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 서명했고,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이라는 부제를 단 이 교황 권고는 4월9일 전 세계에 공개됐습니다. 말 그대로 ‘현대 그리스도인을 위한 지침서’입니다.

 

“모든 거룩하고 충실한 하느님 백성의 전구와 더불어, 여러분에게 저의 새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를 보내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저는 모든 이가 각자 일상생활에서 성덕의 소명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하고자 이 권고를 작성했습니다.”

 

교황님의 서두 말씀이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과 더불어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지 78주년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얼마나 성모 마리아님과 축복된 인연의 한반도 나라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 날마다 승천 대축일이요 성모님과 함께 승천 여정의 삶입니다. 

 

희망과 꿈이 사라진, 길을 잃고 방황하는 혼돈과 어둠의 시절에 주님은 승천하신 성모님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하늘길을, 하늘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바로 성모님 승천의 희망의 빛이 우리의 어둠을 환히 밝힙니다. 문득 성모님께 무엇인가 선물로 드리고 싶은데, 하루하루 날마다 나를 통째로 다 드리기에 드릴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주님 앞에 갔을 때 저는 매일 평생 써놨던 연서(戀書)와 같은 강론집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성모님을 뵈올 때는 지금까지 써놨던 연시(戀詩)와 같은 사랑의 시집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지금 바치고 싶은 두 편의 시가 생각나 그대로 나눕니다. 앞 시는 주님께, 뒤 시는 성모님께 드리는 선물 시입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사랑하올 주님께 바칠 연시로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에 이어 오늘 승천하시어 우리를 위해 늘 전구하고 계신 성모님께 드리는 다음 “임오시면”이란 연시입니다. 

 

“임오시면

달맞이꽃 

연노랑 저고리에

메꽃

연분홍 치마

달개비꽃

영롱한 고무신

해드리고 싶네

임오시면”-2000.7.16.

 

모두가 여름철에 들판에 피어나는 영롱하고 청초한 야생화 들꽃들입니다. 이 시와 더불어 오늘 일어나자마자 수도형제들과 함께 주님과 성모님께 선물로 바쳤던 아름다운 성무일도 초대송에 이어 찬미가와 후렴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1.“오늘 그리스도의 모친 마리아 하늘에 오르셨으니, 어서와 우리 주님께 조배드리세”(초대송 후렴)

2.“태양의 빛입으신 동정녀시여 열두별 머리위에 꾸미신이여

저달을 발판삼아 우뚝서시니 환하게 빛나도다 당신의 광휘”(찬미가1절)

 

이어 5절까지 계속되는 찬미가 내용들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 우리 영혼을 고무하고 위로하며 환희에 넘치게 합니다. 이어지는 후렴 둘도 아름답습니다.

 

3.“기뻐하라. 오늘 동정녀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도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시는도다. 동정녀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도다. 그곳에 왕중의 왕께서, 별빛 찬란한 옥좌에 앉아 계시는도다”

 

온통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승리와 영광의 성모님을 기리는 내용들입니다. 참 고마우신 주님에 이어 참 아름다운 성모님입니다. 성모님이 좋아 말이 많다보니 서론이 길었습니다. 성모님 사랑과 자랑에 서론만 쓰다 강론이 끝날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과 함께, 성모님과 함께 승천 여정을 살고 있는, 이미 지상에서 천국의 하늘 나라를 살고 있는 복된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믿음(信)의 참된(眞) 삶입니다.

겸손과 섬김, 순종의 믿음입니다. 바로 성모님의 삶이 그러하셨습니다. 혈연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마리아 성모 어머니는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제 강론을 쓰는 책상 위 사제서품식때 가족사진의 신마리아 어머니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저를 보는 듯 합니다.

 

겸손과 섬김, 순종과 믿음의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은 친히 영적도반 엘리사벳을 찾아 나섭니다. 감격에 벅찬 엘리사벳의 환대와 더불어 크나큰 위로와 격려를 받는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귀에 들리자 저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지요! 바로 이런 성모님을 닮아 참된 믿음의 삶, 겸손과 섬김,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요, 바로 이것이 승천의 삶입니다.

 

둘째, 희망(望)의 참 좋은(善) 삶입니다.

희망과 기쁨의 삶입니다. 성모님의 삶이 그러하셨습니다. 희망에서 샘솟는 기쁨이요, 무한한 인내의 기다림입니다. 성모님을 통해 은은히 빛나는 그리스도요, 바로 성모님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과 기쁨이 됩니다. 성모님을 통해 궁극의 승리와 영광으로 빛나시는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의 샘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실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아 이런 궁극의 희망이자 기쁨이신 그리스도가, 하느님이, 성모님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화답송 시편과 묵시록에 소개되는 성모님의 모습은 얼마나 우리의 희망과 기쁨을 붇돋우는지요!

 

“오피르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바로 승리와 영광의 성모님이,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과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희망과 기쁨의 참 좋은 승천의 삶을 살게 합니다.

 

셋째, 찬미와 감사의 삶입니다.

성모님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찬미와 감사의 사랑(愛)에 기쁨이요, 찬미와 감사의 아름다움(美)입니다. 묵시록의 마지막 말씀도 우리의 찬미와 감사를 북돋웁니다. 성모 마리아 어머니를 통해 환히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권세입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찬미의 기쁨, 찬미의 사랑, 찬미의 행복입니다. 감사의 기쁨, 감사의 사랑, 감사의 행복입니다. 하느님 찬미와 감사가 우리의 운명을 바꿉니다.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을 지니게 합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영혼 건강, 정신 건강에 하느님 찬미와 감사보다 더 좋은 영약(靈藥)은 없습니다. 

 

그러니 찬미와 감사의 삶을 선택하여 부단한 훈련을 통해 찬미와 감사를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에, 은혜에 감격하여 바치는 오늘 복음의 마니피캇 찬미감사가는 얼마나 우리 전존재를 찬미와 감사의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는 지요! 

 

참으로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의 후예들인 우리가 바칠 참 자랑스런 특권이 이런 찬미와 감사의 기도입니다. 2천년 동안 가톨릭교회가 저녁기도때 마다 성모님과 함께 바치는 참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마니피캇 찬미감사가입니다. 늘 바쳐도 늘 샘솟는 찬미의 기쁨, 감사의 기쁨을 선물하는 마니피캇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습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칠 것입니다.”

 

참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 자랑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성모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영광이요,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 지상에서 성모님처럼 영적 승리와 영광의 삶을 살게 합니다.

 

1.섬김과 순종의 참된 믿음의 삶을, 

2.희망과 기쁨의 참 좋은 삶을, 

3.찬미와 감사의 아름답고 사랑 충만한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승리와 영광의 승천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이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모님을 닮아 진선미(眞善美)의, 신망애(信望愛)의 영원한 삶, 승천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오늘 승천하시어 승링의 영광을 누리시며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전구하고 계시는 성모 마리아는 참으로 우리의 영원한 미래요 희망입니다.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으니 천사들이 기뻐하며, 주를 찬미하는도다.” 아멘.


[8/16(수)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조재형 신부)

 

2. 오늘 복음 말씀은 교회의 공동체성과 교회에 맡겨진 권한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먼저 단둘이 만나서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냥 무시해버리라고 하십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가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 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이미 지상에서 천국의 하늘 나라를 살고 있는 복된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을 나눕니다.

 

1.섬김과 순종의 참된 믿음의 삶을, 

2.희망과 기쁨의 참 좋은 삶을, 

3.찬미와 감사의 아름답고 사랑 충만한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승리와 영광의 승천의 삶을 살게 합니다.

(이수철 신부)

 

[8/16(수)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제235일 기도]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가 1,45)
 
하느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 질 수도, 멈춤도 없는 하느님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 2023년 8월16일(수) 5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