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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1월 6일 월요일[(녹) 연중 제31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5개

[매묵]2023년 11월 6일 월요일[(녹) 연중 제31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5개

 

입당송

시편 38(37),22-23 참조
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11,29-36
형제 여러분,
29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습니다.
30 여러분도 전에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31 마찬가지로 그들도 지금은 여러분에게 자비가 베풀어지도록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지만,
이제 그들도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32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33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34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
35 아니면 누가 그분께 무엇을 드린 적이 있어
그분의 보답을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36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69(68),30-31.33-34.36-37(◎ 14ㄷ 참조)
◎ 주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 가련한 저는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 하느님, 저를 도우시어 보호하소서. 하느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감사 노래로 그분을 기리리라. ◎
○ 가난한 이들아, 보고 즐거워하여라. 하느님 찾는 이들아,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주님은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 주시고, 사로잡힌 당신 백성을 멸시하지 않으신다. ◎
○ 하느님은 시온을 구하시고, 유다의 성읍들을 세우신다. 그들이 거기에 머물며 그곳을 차지하고, 그분 종들의 후손이 그 땅을 물려받아, 그분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곳에 살리라. ◎

복음 환호송

요한 8,31-32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12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바치는 이 제물을 거룩한 제사로 받아들이시어
저희에게 주님의 자비를 가득히 베풀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6(15),11 참조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
<또는>
요한 6,57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살아 계신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천상의 성사로 저희를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에게 주님의 힘찬 능력을 드러내시어
주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오늘의 묵상

1. 김상우 바오로 사제 강론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셨습니다(창세 1,26-27 참조). 

그리고 자유 의지를 주시어 모든 피조물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권한과 그들을 다스릴 권한까지 허락하셨습니다(창세 2,19-20 참조). 

그런데 이러한 자유에는 반드시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불순종할 자유까지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발견합니다. 

인간의 불 순종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유 의지가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그분께서는 인간의 불 순종마저 당신 자비를 베푸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고백합니다. 

한편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누군가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 자신이 베푼 자선이나 선행에 보답할 수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은 인정받고 싶어 하고, 보상 받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인내심은 부족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현세적 보상을 바라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서 오는 보상은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책임 있게 사용하는 그리스도인, 사람에게서 오는 위로와 인정으로 자신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을 먼저 추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 고통 받는 ‘변두리 이웃’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때에, 당신께서 바라시는 방법으로 모두 갚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2. 전삼용 요셉신부님 강론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나에게 보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지 말고 보답할 수 없는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보답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내가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는 일은 그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보상을 바라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보상을 요구한다면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을 위해 사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닙니다. 제일 나쁜 일은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뱀을 위해 살면 나는 뱀의 소굴에 갇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내 안의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방법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만을 사랑한다면 그건 사랑일 수 없습니다. 반드시 보답을 바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호텔과 부동산 재벌 레오나 헬름슬리는 2007년 사망하면서 자신의 말티즈 강아지 ‘트러블’에게 1,200만 달러를 상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두 조카에게는 한 푼도 상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트러블에 대한 사랑은 진짜였을까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며 개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개가 자신에게 무언가 주었기에 자신도 사랑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랑이 많은 사람임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면 그것은 형제만을 바라봐서일까요? 부모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마음이 아플까 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형제를 사랑하면 그건 분명 형제를 이용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도 있고 박수를 쳐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두고는 사랑이 증명되지 않습니다. 내가 부모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기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개는 주인이 위험에 처하면 어떻게 할까요? 자기부터 살고 봅니다. 아무리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어도 이길 자신이 없다면 도망칩니다. 이것이 그것들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가 누구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화 아바타의 줄거리입니다. 22세기, 인류는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판도라라는 위성에서 희귀한 광물 ‘언옵테이니엄’을 채굴하고자 합니다. 판도라에는 나비족(Na'vi)이라는 키가 크고 푸른 피부를 가진 원주민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자연과 깊은 연결을 하고 살아갑니다. 인간들은 판도라의 대기가 자신들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에, 아바타 프로그램을 통해 나비족의 모습을 한 유전적으로 조작된 아바타 몸을 원격으로 조종합니다. 전직 해병대원인 주인공 제이크 설리는 하반신 마비 상태로, 죽은 쌍둥이 형의 대체 인원으로 아바타 운용자로 판도라에 도착합니다. 

 

    제이크는 아바타를 통해 나비족 사이에 잠입하여 그들의 신뢰를 얻고, 광산 개발을 위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이크는 나비족 사이에서 살면서 그들의 문화와 생활 방식, 그리고 자연에 대한 신성한 존중을 배워 갑니다. 특히, 나비족 여성 네티리와의 관계를 통해 그는 나비족의 삶과 가치에 깊이 매료됩니다. 나비족은 제이크가 자신들을 이용하기 위해 자신들 속으로 잠입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믿어줍니다. 결국, 그는 나비족을 돕기로 결심하고 인간과의 전투에 나서게 됩니다. 

 

    제이크의 이러한 행동은 인간의 육체를 넘어 나비족의 아바타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이크는 신적 존재인 나무 에이와와 나비족의 도움으로 불구의 인간 몸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진정한 나비족이 됩니다. 제이크는 왜 인간을 배신하고 나비족이 되었을까요? 인간 사회에서는 사랑 받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도 있었고 자기에게 보상을 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믿는 어떤 신을 사랑해서 나비족만큼 자기를 위해주는 이들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이것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만이 진짜 사랑입니다. 나에게 칭찬하거나 감탄만 하는 존재는 위험합니다. 창조자를 먼저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저 나만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다가오는 이는 가짜입니다. 우리에겐 우리 발을 씻어주신 하느님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이 우리 존재 상승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 세상은 나를 칭찬하고 감탄할 수는 있어도 나에게 영광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 영광을 주는 이는 아버지의 뜻 때문에 나의 발을 씻어주는 이고 그런 존재를 선택해서 사랑해야 이용 당하다 버려지는 삶이 아닌 참 존재의 완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존재를 잘 분별해서 그를 위해 살며 그의 이름에 영광을 돌려 우리 존재를 완성해갑시다.


 

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영화 대사 중에 무엇이 중헌디!’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한국에서 휴가 중에 우선순위로 정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3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의 묘소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연도를 바쳤습니다.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만나서 식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모두 모여 함께 미사를 하면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가족들 모두 기쁜 마음으로 절두산 성지에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동창신부님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바쁜 중에도 신부님들은 시간을 내 주었고,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82년에 만났으니 40년이 넘었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추억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미국에서 함께 지내다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신부님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대구에서, 울산에서 반가운 얼굴을 보았습니다. 팬데믹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매일 새벽 기도하고, 복음묵상을 나누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꼭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새벽에 주님을 만나는 것이 소중한 시간이고, 기쁨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념일 수 있습니다. 가치와 이념이 확고하지 않으면 쉽게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공산 전체주의와의 대결과 싸움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분단된 나라에서 정전(停戰)’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인에 대한 압수수색과 수사일 수 있습니다. 부패한 정치인, 부정한 정치인, 불법한 정치인은 우리 정치의 격과 수준을 떨어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민생입니다. 민생을 외면한 이념, 민생을 외면한 대결과 투쟁, 민생을 외면한 압수수색과 수사는 빛 좋은 개살구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강력한 군사력과 월등한 경제력으로 팔레스타인들이 사는 가자지구에 분리장벽을 쌓았습니다. 삶을 위해 가장 필요한 물과 전기를 통제하였습니다. 정당한 절차와 조사를 거치지 않고 팔레스타인들을 체포하고, 구금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압도적인 힘에 의한 평화와 질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리장벽과 물과 전기의 통제 그리고 체포와 구금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난 80년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정말 더 중요한 것은 자비와 사랑입니다. 자비와 사랑이 없는 통제와 억압 그리고 분리장벽은 빛 좋은 개살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무엇이 중헌디!’에 대한 방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갑니다.” 권불십년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민족을 차별하고, 억압하고, 쫓아내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길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천년을 나라 없는 서러움 속에 살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스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음을 알아야 합니다. 야곱과 에사오가 화해하고, 평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처럼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도 화해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콩과 콩깍지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듯이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도 같은 하느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생각하며 그것을 이루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4.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105. 연중 제31주일.

 

“너희는 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마태 23,9)
 
가을은 신비의 계절입니다. 가을은 우리를 깊은 곳으로 끌고 갑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낙엽은 우리의 고개를 숙이게 하는 스승이 됩니다. 이해인 수녀님은 “낙옆”이란 스승에게서 이렇게 배움을 시로 노래합니다.
 
“낙엽은 나에게 살아 있는 고마움을 새롭게 해주고, 주어진 시간들을 얼마나 알뜰하게 써야 할지 깨우쳐준다. 낙엽은 나에게 날마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이승의 큰 가지 끝에서 내가 한 장 낙엽으로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일까 헤아려 보게 한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내 사랑의 나무에서 날마다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좀 더 많이 의식하고 살아야겠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가?
 
사실, 우리가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으면서도 스승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스승이 없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삶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알아 모시지 못하고, 그들의 제자가 되어 그들에게 머리를 굽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P.이제민)
 
그렇습니다. 만약 지금 내게 스승이 없다면, 내가 머리를 굽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길 ‘셋이 함께 길을 걸으면 그 중에 한 명의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여기 모인 우리 중에 어찌 스승이 없겠습니까?
 
그러니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승을 곁에 두고도 눈이 먼 까닭이요, 제자가 되어 머리를 숙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서이지 않을까요. 겉으로는,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으면서도 막상은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자신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까닭은 아닐까요. 그래서 무식이 드러나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받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우리의 마음의 눈이 멀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가 참된 스승인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이고자 하는가?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스승” 혹은 “참된 제자”에 대해 묻게 합니다.
 
<제1독서>에서 말라키 예언자는 사제들이 길에서 벗어나 오히려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한 것에 대해 질책합니다.
 
반대로, <제2독서>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바오로 사도의 모습과 그 가르침을 받고 받아들이는 제자로서의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스승으로 불리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죄상을 고발하십니다.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 23,3-4)

이처럼, 그들의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에게 짐만 지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마태 23,5 참조). 곧 표리부동할뿐 아니라 위선으로 속였습니다. 그들은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였습니다.’(마태 23,5 참조). <민수기>(15,38-39)와 <신명기>(22,12)에 따르면, 그것을 착용하는 이들이 하느님께 속했다는 표시로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를 상기시키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의미를 왜곡하고 자신들의 거룩함을 보여주려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했습니다.”(마태 23,6 참조). 곧 자만과 허영에 차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마태 23,2). 마치, 스승의 자리에 앉은 양 처신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마태 23,9)
 
그렇습니다. 섬김이야말로 참된 스승이 되는 길이요, 동시에 참된 스승이신 당신의 참 제자가 되는 길일 것입니다.
 
한편, 제자인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
 
이는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수도에서 물을 마시면서 수도관이 대나무로 만든 관인지 금으로 만든 관인지가 아니라, 그 물이 얼마나 깨끗하고 좋은 물인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고개 숙여 배우기보다, 목을 뻣뻣이 세우고 가르치기를 일삼는 ‘나는 참 제자인가?’ 하고 스스로 물어 봅니다. 또 복음을 듣는 이로서만이 아니라 선포하는 이인지를, 그리고 실천하는 이인지를 들여다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마태 23,11)

그러니 그저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려가 상대를 높여 드려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떨어져 땅에 뒹구는 이 가을의 낙엽처럼 돌아가 썩어 거름이 될 자리로 가 머물러야 할 일입니다. 안도현 시인의 “가을 엽서”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 낮은 곳으로 / 자꾸 내려앉습니다.
/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 나는 그대에게 / 무엇을 좀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할지라도 / 그대여 / 가을 저녁 한 때 /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 사랑이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5.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31주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독서와 회개, 사랑과 진실, 섬김과 겸손-

 

“주님, 제 영혼을 당신의 평화로 지켜 주소서”

 

화답송 후렴이 잔잔한 위로를 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가을은 기도의 계절이자 수확의 계절이자 독서의 계절입니다. 11월 위령성월은 더욱 기도에 박차를 가하는 달입니다. 참으로 기도해야 할 때이고 공부할 때입니다. 구체적으로 독서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도입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밤 12시30분 일어나 수도원 숙소 입구문을 열고 나오며 맨먼저 바라보며 확인하는 불암산 정상이요 하늘의 별들입니다. 이어 집무실에 들어와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바치는 만세육창의 기도입니다. 나라와 세계가 어지러워 8월15일 광복절부터 시작하여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는, 앞으로도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계속될 “만세육창”기도입니다. 나뭇가지처럼 양손을 번쩍 들면 “기도하는 나무”가 되고 운동도 되어 참 기분이 상쾌합니다.

 

저에겐 요즘 계속되는 맨발걷기 운동도 기도입니다. 천국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천국으로의 기도입니다. 제15처 십자가의 길을 아십니까? 수도원 십자가의 길 14처가 끝나는 자리 계단을 올라가면 성전옆에 제 집무실, 암자가 있고 저는 일컬어 15처 “예수님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라는 기도처이자 부활의 집, 천장암, 지족암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아침식사후 맨발로 부활의 집, 천장암 집무실에서 십자가의 길 역순으로 걷다가 주차장부터 수도원 정문까지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 하늘길을 걸어갔다가 다시 하늘길을 걸어 십자가의 길을 걸어 부활의 집, 집무실에 걸어오면 약20분 소요의 맨발걷기와 침묵의 기도시간을 갖게 됩니다. 

 

제 집무실로 면담성사차 오시는 분은 하늘길과 십자가의 길을 통과하여 부활의 집 집무실에 오는 것이니 지상에서 천국으로의 여정인 것입니다. 이런 묵상이 참 행복하게 하며 걷는 운동은 그대로 깨어 기도하는 시간으로 만듭니다. 이처럼 살아가는 것도 참 멋지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저는 서울주보를 1면 “생명의 말씀”란 구요비 주교님 글의 시작을 읽으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꼭 오늘 강론에 인용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대로 인용합니다.

 

“일본에서 선교중인 신부님 한분이 휴가차 오셔서 들려준 이야기기가 심금을 울립니다. 일본에서는 어디를 가나 심지어 시골의 아주 작은 마을에도 ‘서점’들이 있을 정도로 책을 많이 읽습니다! 청소년들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주말에도 등교하여 자유롭게 다양한 운동과 예능활동을 하며 자기계발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순간 일본의 건강한 사회 분위기가 부러워 질투심까지 들었고 우리의 병든 사회 분위기가 부끄러웠습니다. 나라 곳곳 어디가나 먹자판 음식점이요 이렇게 음식점 많은 나라도 세계에 없을 것입니다. 아, 먹는 돈을 일부 책을 사서 읽는다면, 곳곳에 많은 음식점과 더불어 서점의 책방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먹는데는 돈을 아끼지 않으면서 책을 사보거나 책을 읽는 데 시간 투자에는 얼마나 인색한 사람들인지요! 육신의 욕망을 채우는데는 돈을 아끼지 않으면서 영혼을 돌보는 독서와 공부에는 인색한 것, 이것은 분명 건강한 분위기가 아니요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독서와 관계되는 문화강국에 국력이란 생각도 떨처버릴수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 말씀은 주로 종교지도자나 사회지도자를 대상으로 하지만 일반인들로 소급해도 좋다 생각되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전반적으로 다룹니다. 

 

첫째, 독서하라!

일본의 경우를 보면서 맨먼저 강조해야할 것이 독서요 공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서와 공부의 선택과 훈련 그리고 습관화입니다. 평생 독서요 공부요 영혼을, 정신을, 마음을 돌보며 내적시야를 넓히는 것입니다. 정말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생각없는, 영혼없는 괴물같은 삶들이 너무 많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이라면 매일미사전례문도 평생독서와 평생교육에 좋으니 매일 평생 읽으며 묵상하기를 권합니다. 가능하면 스마트 폰이나 인터넷이 아닌 책을 보기를 권합니다. 미사시간 책대신 휴대폰을 보는 모습은 참으로 인간품위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위로 대통령부터 시작하여,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위로 보고 배울, 희망의 표지가 될 어른이나 지도자가 많아야 젊은이들이 희망을 지니고 의욕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보고 배울 독서하는 공부하는 희망을 주는 정신 건강한 어른들이나 지도자들이 절실한 시절입니다. 믿는 이들은 평생 학인입니다. 죽어야 졸업인 평생학인으로 독서와 공부의 훈련과 습관에 초점을 두시기 바랍니다. 이런 독서와 공부가 회개를 촉발시키기도 하며 정신을, 삶을 일신시킬 것입니다.

 

둘째, 회개하라!

자기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의 삶의 전환입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에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것이 회개입니다. 삶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회개의 삶, 영혼 건강의 삶입니다. 병든 사회, 병든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희망을, 길을, 빛을 잃으면 병들기 마련이요 회개를 통해 희망을, 길을, 빛을 찾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바로 궁극의 희망이요 길이요 빛입니다.

 

제1독서 말라키는 탈선한 사제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일반인들보다 지도자들의 회개가 절실, 절박하지만 모두가 회개의 삶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계속해서 엄중한 경고를 발하십니다.

 

“자, 이제 사제들아, 너희가 말을 듣지 않고, 명심하여 내 이름에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길에서 벗어나 너희의 법으로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하였다. 너희는 레위의 계약을 깨뜨렸다. 나도 너희가 온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리라. 너희는  나의 길을 걷지 않고 법을 공평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우리는 서로 배신하며 조상들의 계약을 더럽히는가?”

 

참으로 지도자들의 타락과 범죄, 나태가 망국의 원인입니다. 누구보다도 각계각층 지도자들의 각성이, 회개가 절박한 우리나라의 현실이요 일반신자들 역시 회개에는 예외가 아닙니다.

 

셋째, 사랑하라!

회개의 열매는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일행이 지도자들의 모범입니다. 지도자들뿐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에서 이런 사랑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모범적인 사랑의 모습이 참 아름답고 고귀하여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였습니다. 애정을 가지고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과 나눴을 뿐 아니라,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 자신까지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토록 우리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사랑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사제들의 이런 사랑이라면 그대로 신자들도 보고 배웁니다. 지도자들의 모범적 사랑은 신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지도자들이 부실하다해도 믿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이런 사랑의 실천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진실하라!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언행불일치의, 표리부동의 위선적 지도자들을, 허영의 지도자들을 질책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뿐만 아니라 위선적이고 허영 가득한 우리 인간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안팎이, 겉과 속이 같은 진실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도, 두려워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참으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운점 없는 진실한 삶 자체가 힘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허영의 외적인간입니다. 속이 텅 빈 정말 생각이 없는 피상적 천박한 사람들입니다.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사람들, 알맹이의 삶이 아니라 껍데기의 삶, 본질적이 아닌 부수적인 것에 노예된 삶, 진아眞我가 아닌 가아假我의 참 공허한 삶입니다.

 

다섯째, 겸손하라!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할 것이니 우리의 스승은 한 분, 주님이시고 우리는 모두가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 것이니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입니다. 또 선생이라고 불리지 말아야 하나니 우리의 선생님을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우상을 삶의 중심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아버지를, 그리스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평등하고 자유로운 형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각이 저절로 겸손에로 이끌어 줍니다. 주님의 다음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섬기는 삶, 겸손한 삶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을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진 것이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과 섬김의 영성이요,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일 것입니다. 사랑의 섬김, 사랑의 겸손입니다. 참으로 섬김의 사람은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사람이요 주님께서 그를 높여주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독서와 회개, 사랑과 진실, 섬김과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의 중심에 이런 삶의 모범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자리하고 계십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주님을 닮아가면서 이런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이제부터 영원까지.”(시편131,3). 아멘.


 

11/6(월)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제317일 기도 

 

 1. 사람에게서 오는 위로와 인정으로 자신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을 먼저 추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 고통 받는 ‘변두리 이웃’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때에, 당신께서 바라시는 방법으로 모두 갚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김상우 신부)

 

2. 이 세상은 나를 칭찬하고 감탄할 수는 있어도 나에게 영광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 영광을 주는 이는 아버지의 뜻 때문에 나의 발을 씻어주는 이고 그런 존재를 선택해서 사랑해야 이용 당하다 버려지는 삶이 아닌 참 존재의 완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존재를 잘 분별해서 그를 위해 살며 그의 이름에 영광을 돌려 우리 존재를 완성해갑시다.(전삼용 신부)

 

3.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천년을 나라 없는 서러움 속에 살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스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음을 알아야 합니다. 야곱과 에사오가 화해하고, 평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처럼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도 화해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콩과 콩깍지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듯이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도 같은 하느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생각하며 그것을 이루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조재형 신부)

 

4.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5.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독서와 회개, 사랑과 진실, 섬김과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의 중심에 이런 삶의 모범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자리하고 계십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주님을 닮아가면서 이런 삶을 살게 하십니다.(이수철 신부)

 

 

11/6(월)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제317일 기도 

 

복음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사람에게서 오는 위로와 인정으로 자신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을 먼저 추구하지 않게 하소서.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 고통 받는 ‘변두리 이웃’에게 먼저 손을 내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모두 갚아 주심을 알고 기뻐하게 하소서.

 

콩과 콩깍지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듯이...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도 같은 하느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야곱과 에사오가 화해하고, 평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처럼...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도 화해하고 평화를 이루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11월6일(월) 8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