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12월 1일 금요일[(녹) 연중 제34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 당신께 돌아오는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본기도
믿는 이들의 마음을 일깨우시어
저희가 거룩한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며
주님의 자비로 더욱 큰 은총을 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7,2ㄴ-14
나 다니엘이 2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불어오는 네 바람이 큰 바다를 휘저었다.
3 그러자 서로 모양이 다른 거대한 짐승 네 마리가 바다에서 올라왔다.
4 첫 번째 것은 사자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를 달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그것은 날개가 뽑히더니
땅에서 들어 올려져 사람처럼 두 발로 일으켜 세워진 다음,
그것에게 사람의 마음이 주어졌다.
5 그리고 다른 두 번째 짐승은 곰처럼 생겼다.
한쪽으로만 일으켜져 있던 이 짐승은
입속 이빨 사이에 갈비 세 개를 물고 있었는데,
그것에게 누군가 이렇게 말하였다. “일어나 고기를 많이 먹어라.”
6 그 뒤에 내가 다시 보니 표범처럼 생긴 또 다른 짐승이 나왔다.
그 짐승은 등에 새의 날개가 네 개 달려 있고 머리도 네 개였는데,
그것에게 통치권이 주어졌다.
7 그 뒤에 내가 계속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었는데,
끔찍하고 무시무시하고 아주 튼튼한 네 번째 짐승이 나왔다.
커다란 쇠 이빨을 가진 그 짐승은
먹이를 먹고 으스러뜨리며 남은 것은 발로 짓밟았다.
그것은 또 앞의 모든 짐승과 다르게 생겼으며 뿔을 열 개나 달고 있었다.
8 내가 그 뿔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그것들 사이에서 또 다른 자그마한 뿔이 올라왔다.
그리고 먼저 나온 뿔 가운데에서 세 개가 그것 앞에서 뽑혀 나갔다.
그 자그마한 뿔은 사람의 눈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입도 있어서 거만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1 그 뒤에 그 뿔이 떠들어 대는 거만한 말소리 때문에 나는 그쪽을 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그 짐승이 살해되고 몸은 부서져 타는 불에 던져졌다.
12 그리고 나머지 짐승들은 통치권을 빼앗겼으나 생명은 얼마 동안 연장되었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 산과 언덕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 땅에서 싹트는 풀과 나무들아, 모두 주님을 찬미하여라. ◎
○ 샘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 바다와 강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 용들과 물에 사는 모든 것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 하늘의 모든 새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 온갖 짐승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29-3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29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30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31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3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의 명에 따라 바치는 이 거룩한 예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계명을 지켜
주님의 사랑에 합당한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또는>
마태 28,20
주님이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거룩한 제사에서 성체를 모시고 기뻐하오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 곁에 머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가해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루카 21,29-33
우리 모두는 주님 정원 속 한 그루 푸르른 올리브 나무입니다!
수녀원에 도착했을 무렵, 무성했던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져 바닥에 쌓이고, 나무들은 그야말로
나목(裸木)으로 변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목, 다시 말해서 잎이 다 떨어져서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나무를 바라보며
서글퍼하거나 우울해합니다.
아, 이렇게 또 다시 계절이 가는구나. 이렇게 내 인생도 저물어가고 소멸되어 가는구나.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그런 마음을 먹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주님 정원 안에 머무는 한, 나는 영원한 청춘이라는 진리, 주님께서 내 안에 굳건히 자리하시는 한,
나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시들지 않는 한 그루 푸르른 올리브 나무 같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특징은 다른 스승들과는 차별화가 되었는데, 다른 무엇에 앞서 쉬웠습니다.
다양한 비유나 예화를 들어 말씀하셨는가 하면, 백성들이 살아가는 환경이나 그들이 매일 목격하는
자연 현상들을 자주 활용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더불어 근동 지방의 주요 나무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잎이 돋고 지는 것을 통해 종말, 주님의 날을 잘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역시 시골에 살면서 주변 자연 현상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실생활에 적극 활용하는 편입니다.
개구리가 합창하면 곧 비가 오겠구나, 하며 이런저런 대비를 합니다.
아침 해무가 자욱하면 날이 낮에는 햇빛이 창창하고 덥겠구나, 생각합니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은 물고기들도 불안해져 입질을 제대로 하지 않으니, 애써 출조를 하지 않습니다.
폭우가 내려 흙탕물이 바다로 유입되면 아무리 물때가 좋더라도 돌게나 골뱅이들이
모래 깊이깊이 숨어버리니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자연의 징조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치밀하게 관찰하고 대비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주님의 날에 대한 준비는 소홀한 저를 향한 예수님 말씀이 날카롭습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복음 21장 29~31절)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는 표징들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 삶을 다시 한번 정리정돈해야 하겠습니다.
결코 원치 않았던 고통이나 시련이 다가올 때, 병고나 사건 앞에, 왜 이런 일이 내게 다가오는가?
하느님이 어떻게 내게 이러실 수 있나, 따지고 원망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시는 또 다른 하나의 부르심이라 여기고,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주님의 날을 보다 잘 준비하라는 신호로 여겨야겠습니다.
지상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천상의 일도 생각해야겠습니다.
세속적인 것은 조금씩 줄이고, 천상의 것들, 정신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을 늘려가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활양식을 갖추도록 준비해야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은 유한하고 제한적인 것이지만, 주님과 주님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가해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루카 21,29-33
하느님 나라가 찾아오는 공식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멸망하게 될 무서운 징조들을 다 말씀하신 다음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는 자연에서 계절이 변화되는 법칙이 있는 것처럼 마지막 때도 마치 수학 공식처럼
그대로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뒤이어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반드시 공식처럼 내 주위에 믿고 희망할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각자에게도 오시기 때문에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왕으로 지배하시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행복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우리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그분께 완전히 순종할 때만 이뤄집니다.
하지만 이 세상엔 우리가 기대할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 것을 통해 자기 힘으로 행복을 추구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조리 사라져 내 힘으로는 단 1%도
행복을 증진시킬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그리고 나의 믿음과 희망이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만
의존하게 될 때 하느님 나라가 임하십니다.
저도 신학교 입학했을 때 행복할 줄 알았지만, 행복함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단식하며 저를 극한으로 몰아붙였습니다. 배고프니까 비로소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 달라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성체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행복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아직 그분을 그때처럼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저는 압니다.
저 자신과 세상을 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못하고 내가 믿는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을 그만큼 완전히 죽일 자신이 없어서 나를 종말로 몰아붙이지
못하기에 하늘 나라를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나의 완전한 종말 뒤에 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공식입니다.
작년 『역행자』란 책을 쓴 ‘자청’이란 청년이 있습니다. 이미 130명의 직원을 두고 한 달에 몇억씩 벌며
작년 책 판매 수입을 전액 기부하였습니다. 아마 50억 가까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못생겼고, 공부도 못했고, 돈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그에게
자신은 한 달에 150만 원도 벌지 못하며 결혼도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여자는 쫓아다니면 도망쳤고 돈을 벌기 위해 영화관에서 일하기도 하였지만, 실수 연발이었습니다.
자살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그에겐 그래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영화관에서 함께 일하던 어떤 누나가 그를 불쌍히 여겨
책을 좀 읽어보라고 권했던 것입니다. 책을 읽어본 적이 없고 게임에만 빠져있던 그였지만,
인간관계를 위해 대화법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단순했습니다.
말하기보단 들어주고 상대의 말에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그 책대로 했더니 서서히 한 명씩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깨닫습니다.
‘아, 모든 것에는 공식이 있구나!’
그래서 학교도 집어치우고 도서관에서 책만 읽습니다. 거기서 얻은 지식으로
무일푼으로 사업도 시작하고 지금의 자청이 된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저는 저 자신을 절대 믿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이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에겐 하느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이미 자신이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공식처럼 우리 자신을 종말로
밀어붙여야 합니다. 그래야 참 자유와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김희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망의 시간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절망의 나락에 있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희망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때 자신보다 그녀의 얼굴을 보시며 더 슬퍼하시는
그분을 만나고는 다시는 얼굴에 점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청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는 ‘감사’만 있습니다. 내 힘으로 얻는 게 하나도 없음을
알 만큼 겸손해진 사람만이 누리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왜 우리 스스로라도 우리 자신을 종말로 밀어붙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늘 나라는 항상 희망을 품고 종말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만큼 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안드레아는 공관복음에 따르면,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마태 4,19)가 되리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형인 베드로와 함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특히 마르코복음에서는 열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는 장면에서 등장하며(마르 1,29-30), 예수님께서 성전 파괴를 예언하셨을 때에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느냐며 궁금해 하기도 합니다(마르 13,3-4).
요한복음에서는 그가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께서 부르신 첫 번째의 제자가 되었으며(요한 1,35-40), 형인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소개하면서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요한 1,40-42).
또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에는 한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드렸고(요한 6,8-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는 예수님을 만나 뵈러 온 그리스인들을 예수님께 소개하기도 합니다(요한 12,20-22).
한편 초기의 동방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 사도는 “맨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프로포클레토스)으로 불립니다.
그는 흑해 주변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리스의 아카이아 지역인 ‘파트라이’에서 순교하였고,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그의 성화나 성상에는 X자 형의 십자가와 함께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 스코틀랜드의 국기에 새겨진 X자는 그 나라의 수호성인인 안드레아를 상징합니다.
그의 유해는 베드로 대성전에 모셔져 오다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서 그리스 정교와의 화해의 표시로 그의 순교지인 ‘파트라이’에 모셔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라고 말씀하시고, 안드레아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마태 4,20).
그런데 ‘고기를 낚는 어부’와 ‘사람을 낚는 어부’는 어떻게 다를까요?
그것은 ‘고기를 낚는 어부’는 살아있는 고기를 죽이기 위해 잡아들인다면,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죄로 죽은 영혼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잡아들인다는 점입니다.
또 ‘고기를 낚는 어부’는 고기를 골라서 낚아 올리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고기가 좋든 나쁘든, 곧 전교 대상이 선하든 악하든 간에 낚아 올린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고기를 낚는 어부’는 자신의 그물을 치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성령의 그물을 칩니다.
곧 자신의 방식으로 그물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가라는 데로 가며, 그물을 던지라는 쪽으로 던지고, 그분이 명령하는 방식으로 그물을 치는 데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해타산의 머뭇거림이 전혀 없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온전한 응답이 요구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안드레아 사도가 예수님께서 머무르는 곳에서 밤을 묵어가며 양성을 받았듯이, 먼저 그분과 함께 머물며 ‘그분 안에서 양성을 받는 제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마태 4,18)
주님!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소서
내가 만든 그물이 아니라 성령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위험하더라도 깊은 곳, 당신이 원하신 곳에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먹이로가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한 사랑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모두를 거두어들이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3.11.30.목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1세기 초반-1세기 중반) 축일
로마10,9-18 마태4,18-22
버림과 따름, 믿음의 여정
-제자이자 사도의 삶-
주님을 믿고 따르는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른 밤 눈뜨자 저절로 나온 말마디는 “주님, 감사합니다!”였습니다.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도 “주님, 감사합니다!”고백합니다.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끝나는 인생이기를 소망합니다.
사실 단 하나의 소원은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죽는 그날까지 한결같이 주님을 믿는 제자로
주님을 따르는 삶, 하나뿐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바치는 기상시, 취침시 바치는 만세육창의 평화의 기도와 제 신원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평화(平和)의 전사(戰士)’다!”
주님을 따르는 모범이 바로 그 믿음의 제자인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안드레아 사도입니다.
베드로의 형제로 요한 복음에 보면 형을 주님께 인도했으며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 뜻은
‘사내다움’ 또는 ‘용기’를 뜻합니다.
형과 달리 성실하고 온건하며 신중한 성격의 인물로 최초로 러시아에 복음을 전했으며
초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지냈습니다.
상징물로 X자형 십자가이며, 어부, 생성장수, 스코틀랜드, 러시아, 우크라이나 수호성인입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국기는 푸른색 바탕에 X자형 흰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참 이해하기 힘든 사실은 같은 수호성인을 모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가간의 전쟁인데
말그대로 형제국끼리의 전쟁입니다.
위경 “사도 안드레아의 행전”은 비신화화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며 안드레아는 로마제국의 속주인 마케도니아 이남 지역인 아카이아(오늘날 그리스 전역)
남부지방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목박혀 순교했다 합니다.
까닭인즉 X자는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글자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형장에 끌려갔을 당시 안드레아는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기쁨에 넘쳐 다음 기도를 바쳤다 합니다.
“오,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나를 부르시는가!
속히 나를 이 세상에서 끌어올려 주님곁으로 가게 해다오.”
전설같은 일화지만 시종여일 한결같이 순교하기까지 주님을 충실히 따른 사도 안드레아의 생애가 감동적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그림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시자 그들을 부르십니다.
말그대로 운명적인, 은총의 만남이요 첫눈에 반했음이 분명합니다.
“나를 따라라. 내가 너희를 사람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전광석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어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시자 이들 역시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인지 깨닫습니다.
갈망하던 주님을 만남으로 참나를 만났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첫눈에 이들의 갈망을 알아챘음이 분명합니다.
서로 첫눈에 반한 운명적인 만남입니다. ‘구원의 출구’를 발견한 것이지요!
이들 어부들은 갈릴레어 호수에서 고기잡이 생업에 종사했던 젊은이들이지만 끊임없이 주님을 찾는
갈망의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이들의 참 진리를 찾는 갈망을 첫눈에 알아챘고 부르시자 즉각 응답한 두쌍의 어부 형제들입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이들 어부형제들이 주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어떻게 지냈을까요?
우리에게 주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요?
평생 단조로운 반복의 일상을 살다가 무지와 허무속에 인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우연이 아닌 필연같은 주님 은총의 부르심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어부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여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제자들처럼 우리의 부르심과 버림, 따름은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끊임없이 버리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 삶의 여정은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여정, 버림의 여정,
따름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참으로 끝까지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부르심-버림-따름의 여정에 항구할 때
비로소 성소의 완성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그날까지 방심은 금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여정은 나 홀로의 여정이 아니라 더불어의 여정이요, 이웃에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복음 선포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네 어부를 부른 목적도 사람 낚는 어부로, 즉 복음선포의 일꾼으로 뽑은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선포는 제자는 물론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자 존재이유입니다.
그러니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요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로서의 우리의 신원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우리가 복음 선포 사명에 분발의 노력을 다할 것을 호소합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저절로 나오는 고백입니다.
‘기쁜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참 아름다운 모습이, 참 멋지고 매력적인 모습이 기쁜소식을, 복음을 살며 전하는 이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며 선포하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이야말로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삶 자체가 주님과 하나되어 복음이, 하늘나라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러면 복음선포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부단히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버림과 따름의 여정에,
복음선포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날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주님의 성체를 모실 때 마다 바치는 주님 사랑의 고백기도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평화,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답고 거룩한 하루이옵니다.” 아멘.
2013년 12월1일(금)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복음 21장 29~31절)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는 표징들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 삶을 다시 한번 정리정돈해야 하겠습니다.
결코 원치 않았던 고통이나 시련이 다가올 때, 병고나 사건 앞에, 왜 이런 일이 내게 다가오는가?
하느님이 어떻게 내게 이러실 수 있나, 따지고 원망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시는 또 다른 하나의 부르심이라 여기고,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주님의 날을 보다 잘 준비하라는 신호로 여겨야겠습니다.
지상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천상의 일도 생각해야겠습니다.
세속적인 것은 조금씩 줄이고, 천상의 것들, 정신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을 늘려가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활양식을 갖추도록 준비해야겠습니다.(양승국 신부)
2. 내 힘으로는 단 1%도 행복을 증진시킬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그리고 나의 믿음과 희망이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만 의존하게 될 때 하느님 나라가 임하십니다.
작년 『역행자』란 책을 쓴 ‘자청’이란 청년이 있습니다. 이미 130명의 직원을 두고 한 달에 몇억씩 벌며
작년 책 판매 수입을 전액 기부하였습니다. 아마 50억 가까이 될 것 같습니다.
자청, 그는 말합니다.
“저는 저 자신을 절대 믿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이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에겐 하느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이미 자신이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공식처럼 우리 자신을 종말로
밀어붙여야 합니다. 그래야 참 자유와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감사’만 있습니다. 내 힘으로 얻는 게 하나도 없음을
알 만큼 겸손해진 사람만이 누리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왜 우리 스스로라도 우리 자신을 종말로 밀어붙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늘 나라는 항상 희망을 품고 종말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만큼 옵니다.(전삼용 신부)
3.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마태 4,18)
주님!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소서
내가 만든 그물이 아니라 성령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위험하더라도 깊은 곳, 당신이 원하신 곳에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먹이로가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한 사랑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모두를 거두어들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참으로 끝까지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부르심-버림-따름의 여정에 항구할 때
비로소 성소의 완성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그날까지 방심은 금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여정은 나 홀로의 여정이 아니라 더불어의 여정이요, 이웃에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복음 선포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네 어부를 부른 목적도 사람 낚는 어부로, 즉 복음선포의 일꾼으로 뽑은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2013년 12월1일(금)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제342일 기도
복음
<너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루카 복음 21장 29~31절)
내 힘으로는 단 1%도 행복을 증진시킬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그리고 나의 믿음과 희망이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만 의존하게 될 때 하느님 나라가 임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에겐 하느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이미 자신이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공식처럼 우리 자신을 종말로 밀어붙여야 합니다.
그래야 참 자유와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감사’만 있습니다. 내 힘으로 얻는 게 하나도 없음을
알 만큼 겸손해진 사람만이 누리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절대 믿지 않게 하소서.
"오직 하느님만을 믿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12월1일(금) 8시30분...수산나 -
'매일미사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묵]2023년 12월 3일 주일[(자) 대림 제1주일]/신부님 강론 4개 (2) | 2023.12.03 |
---|---|
[매묵]2023년 12월 2일 토요일[(녹) 연중 제34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1) | 2023.12.02 |
[매묵]2023년 11월 30일 목요일[(홍)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신부님 강론 4개 (0) | 2023.11.30 |
[매묵]2023년 11월 29일 수요일[(녹) 연중 제34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1) | 2023.11.29 |
[매묵]2023년 11월 28일 화요일[(녹) 연중 제34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2) | 2023.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