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월 5일 금요일[(백)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로우시다.
본기도
주님을 믿는 저희를 인자로이 비추시고
주님 영광의 찬란한 빛으로 저희 마음을 밝히시어
저희가 구세주를 올바로 알아보고 충실히 섬기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3,11-21
사랑하는 여러분, 11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 악마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자기 동생을 죽인 카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무슨 까닭으로 동생을 죽였습니까?
자기가 한 일은 악하고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13 그리고 형제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여도 놀라지 마십시오.
14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15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7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18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20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 ◎
○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
○ 감사하며 그분 문으로 들어가라. 찬양하며 그분 앞뜰로 들어가라. 그분을 찬송하며 그 이름 찬미하여라. ◎
○ 주님은 참으로 좋으시고, 그분 자애는 영원하시며, 그분 진실은 대대에 이르신다. ◎
복음 환호송
○ 거룩한 날이 우리에게 밝았네. 민족들아, 어서 와 주님을 경배하여라. 오늘 큰 빛이 땅 위에 내린다.
◎ 알렐루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3-51
그 무렵 43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기로 작정하셨다.
그때에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44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45 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예물을 인자로이 받으시고
저희가 경건한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을 천상 성사로 깨닫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
저희 마음의 눈을 새롭게 밝혀 주시어
하느님을 눈으로 뵙고 알아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네. 하느님이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오셨으니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마음을 움직이시어
저희가 모신 성체에 더욱 맞갖은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10년 전입니다. 성소국장으로 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주교님이 되셨지만 그때는 사목국장 신부님께서 제게 ‘그리스도론’강의를 맡아 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당시 레지오 단원들을 위한 교육이 있었습니다. 강의 내용 중에는 ‘성사론, 마리아론, 그리스도론, 교회사’가 있었습니다. 친절하신 신부님은 제게 그동안 하였던 ‘강의록’을 보내 주었습니다. 신부님의 강의록을 참조해서 강의를 준비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배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고, 저 나름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지 공부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론 강의를 준비하였습니다. 어제는 안드레아가 형인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타나엘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필립보는 그리스도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이 기록한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타나엘은 성서에 기록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은 예전에 강의했던 그리스도론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스도론은 2천 년 전의 인물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분이 인류의 구세주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구세주라고 번역되는 서양말은 그리스도(그리스어), 메시아(히브리어)입니다. 메시아란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글자 그대로 하면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말이 구세주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요? 그렇데 된 데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 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남북 왕조(이스라엘, 유다)로 갈려서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에는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고 왕족, 사제,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약 50년 후에 유배가 끝나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나라를 세웠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면서 겨우겨우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야훼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민인 자신들을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왕으로, 또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왕과 사제, 예언자은 모두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아서 그 직무에 임명을 받았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 부음 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신약의 백성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자기 조상들이 기다려왔던 그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란 말은 성과 이름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란 인물이 그리스도, 우리 구세주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분명하고 정확하게 전해주는 문헌은 신약성경입니다. 신약성서 외에 예수님은 대해 언급한 세속 문헌이 소수 있기는 하지만, 신빙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현대에 나온 이런저런 소설(‘다빈치 코드’, ‘최후의 유혹’)은 그야말로 소설일 뿐입니다. 신약성서는 4복음서와 서간문들로 엮어져 있습니다. 복음사가들과 서간문의 저자들은 철저히 객관적인 역사서를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각자의 신학적 관점을 갖고서 각자의 사목적 상황에 맞추어 각자의 방식대로 나자렛 사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 기록을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이며 하느님의 아들로 믿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외모나 성장 배경 등과 같은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핵심적인 내용, 즉 그분의 말씀과 행적, 운명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론의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그분이 전적으로 옳았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래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위해서 유다인들에게 익숙한 다양한 존칭들을 받아들여서 예수님에게 적용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존칭들은 부분적으로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지고 서로 합성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존칭의 적용 기준은 존칭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의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독특한 역할과 신원을 표현하기 위해서 가장 처음으로 도입된 개념은 ‘메시아’입니다. 메시아 개념은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위기를 겪으면서 과거의 다윗 왕조를 이상적인 시대로 상상하고 다윗 왕조의 복구를 갈망하면서 등장하였습니다. 이런 갈망과 함께 다윗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나오리라는 희망이 형성되었는데, 그 구원자는 왕이나 대사제 혹은 예언자일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왕, 대사제 그리고 예언자는 자신의 직무를 맡기 위해서 머리에 기름을 부어진다는 공통점을 지녔고, 그래서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Messiah)’, 희랍어로는 ‘그리스토스(Christos)’라고 지칭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메시아를 정치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지도자이며 구원자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승리의 메시아 개념을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은 예수에게 적용하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부적합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어려움은 (지혜서 2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고통을 받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되고 고양된 의인의 모습을 메시아 개념과 합성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예수님께 대한 또 다른 지존칭호로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아들 칭호가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에게 적용되었지만, 실상 이 칭호는 부활 이전 예수의 선포와 행동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부활 이전의 예수는 ‘아빠’라는 신칭(神稱)에서 드러나듯이 유일무이하게 독특한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하느님을 새로운 방식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렇게 부활 이전에 드러났던 예수와 하느님과의 독특한 관계가 부활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되었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부활 이후에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아들 칭호가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한 간택과 전권 위임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의 위치에서 하느님 대신 하느님 백성을 다스리십니다. 하느님 아들 칭호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어느 칭호보다 나자렛 예수가 얼마나 밀접하게 하느님께 속하고 하느님 편이며, 공동체와 세계 앞에서 아버지 외에는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분임을 뚜렷이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된 하느님의 아들 칭호에서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표현합니다. 즉 아버지 하느님과의 구분(복종, 종속),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와의 동일성(그분과의 일치, 神性)을 포함합니다.” 내일은 교회의 역사에서 교부들과 공의회가 선포하고 고백했던 그리스도론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론을 이해하고, 배우는 것의 진정한 목적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주님 공현 전 금요일
요한 1,43-51
나를 따르시오! 와서 보시오!
심각한 사제 수도 성소 급감 현상이 한국 교회 전체에 큰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한때 젊은 사람들로 가득 찼던 전국 신학교와 수도자 양성소는 스산한 분위기로 바뀌었고,
어떤 용도로 대체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절, 어떻게 해서든 성소자 확보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젊은 사람들을 만나면 용기를 내서,
“나를 따르시오!” “와서 보시오!” 라고 크게 외쳐야 하는데, 도무지 나서지를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돌아봅니다.
이 길이 분명 가치 있고 아름다운 길임을 잘 알고 있지만, 공동생활의 어려움, 봉헌 생활의 복잡다단함을
잘 알고 있기에 선뜻 제안하지 못하는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나 자신이 충만한 봉헌 생활을
잘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내가 지금 몸 담고 있는 이곳에서 충만하고 기쁘게 살고 있으며 공동체 안에서 생생한 천국 체험을 하고 있다면,
어찌 “나를 따르시오!” “와서 보시오!” 라고 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봉헌생활자들의 삶이 보다 충만해져야 하겠습니다.
보다 복음적 가치와 의미를 잘 드러내는 향기로운 삶이어야겠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보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정겨운 공동체, 서로가 서로를 향한 섬김과 나눔과 봉사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상 천국 공동체를 건설해야겠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4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오늘 <복음> 말씀은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예수님에 대한 두 개의 증언입니다. 이는 마치 소개장처럼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하나는 세례자 요한이 두 명의 자기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라고 증언하는 소개장이요, 또 하나는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아가 형 베드로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증언하는 소개장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은 곧 우리에게 ‘제자 됨의 길’을 깨우쳐줍니다.
그것은 ‘행위’를 나타내는 ‘일곱 개의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전의 두 가지 행위요, 만나서 함께 있는 중의 세 가지 행위요, 그리고 만난 후 그 결과로 발생하는 두 가지 행위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전에는 증언을 “듣는” 행위와 들은 그분을 “뒤따르는” 행위요, 예수님과의 만남에서는 말씀을 주고받으며 “함께 가는” 행위와 그분이 묵으시는 곳을 “보는” 행위와 본 그곳에서 “함께 머무는(묵는)” 행위요, 그리고 만남 이후에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하는(말하는)” 행위와 그들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행위로 표현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증언을 “듣는다.”는 것은 단지 그 것에 동의하고 받아들인다는 수동적인 측면을 너머서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순명의 자세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뒤따라간다.”는 것, 역시 단지 추종한다는 것을 너머서 운명을 같이한다는 것,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당신을 찾아 나서면,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시어”,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무엇을 원하느냐?”하시며, 진정 찾아야 할 것을 찾게 해주고,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도록 일깨워주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아니,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있는지’, ‘참된 것’, 곧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를 원하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당신께서는 묵는 곳을 “와서 보라”는 초대는 원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과 보장입니다. 또한 “함께 가” 주시며, 동행하여 당신께서 묵는 곳으로 인도하고 이끌어주십니다. 손수 동반자가 되어 주시고, 반려자가 되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묵으시는 곳을 “보여주십니다.”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며, “함께 묵으십니다.” 사랑을 속삭여 주시며 흠뻑 적셔주십니다. 이렇게 사랑을 먹은 이들은 이제 다른 이들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하고 “증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예수님께로 “데려갑니다.”
이처럼, 이 ‘일곱 가지의 행위’가 바로 오늘 우리가 제자로서 걷는 길이요 사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나에게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데려가는 일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아버지께 가는 구원의 동반자요, 반려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음은 주님께서 우리의 동반자요 반려자이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향하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서로에게 구원의 동반자요 반려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함께 아버지께 가는, 이토록 아름다운 구원의 동반자들이요, 반려자들인 것입니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것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요한 1,39)
주님!
말씀을 듣고 단지 동의하지만 말고, 받아들여 따르게 하소서.
따르지만 말고, 전적인 헌신으로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오늘도 무엇을 찾고, 무엇을 원해야 할지를 일깨워주시고
저를 향해 계시는 당신을 향해 달려가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흠뻑 젖게 하시어,
당신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4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참 스승이신 주 예수님께 인도(引導)하는 자들-
아마도 우리 요셉수도원에서 가장 특징적인 상징물은 수도원의 십자로 중앙의 예수성심상일 것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에서 가슴 활짝 열고 주님을 찾아오는 모든 이를 환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 좋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위로와 격려와 더불어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는 주님을 상징합니다. 주님 평화의 빛이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주님의 빛입니다. 더불어 연상되는 복음 말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새삼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는, 영원한 참 스승이신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예전 예수성심상을 배경한 단풍나무가 사라지니 친히 하늘과 불암산이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얼마전 써놓은 ‘참된 겸손’이란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성심상
배경의 단풍나무 사라지니
친히 하늘과 불암산이 배경이 되어 주신다
단풍나무 배경이
전부인줄 알았다
아, 하늘과 불암산을 가린
단풍나무였구나!
소스라친 깨달음
배경이신 주님을 가리지 말자
끝없이 낮아지고 작아져, 한없이 비워지고 겸손해져
주님만이 환히 드러나는 공(空)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2023.12.30
참으로 끝없이 낮아지고 작아져, 한없이 비워지고 겸손해져 우리의 영원함 참 스승이자 배경이신 주님을 가리지 말고 환히 드러나게 하는 공(空)의 사랑의 사람이 멋지고 아름다운 스승입니다. 이런 이들이 참된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영적지도의 두 목표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안내해 주는 일, 또 하나는 자기를 알도록 안내해 주는 일이라 합니다. 둘인 듯 하나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더불어 자기를 잘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스승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정말 형제들을 사랑한다면 최고의 사랑은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1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기에 죄를 짓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것은 바로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 결론을 내립니다.
정말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를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참 멋지고 아름다운 스승의 모범입니다. 한 눈에 참스승이신 예수님을 알아챈 세례자 요한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외치자, 그의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결국은 자기 제자를 예수님께 인도하는 요한입니다.
자기를 두고 떠나는 제자들이 서운하고 예수님께 질투심이 일어날 듯 한데 요한의 마음은 지극히 순수하고 고요합니다. 정말 비워지고 겸손해져 자기가 없이 주님만 환히 드러내는, 흡사 주님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은 존재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참스승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대세의 순리이자 자연스런일입니다. 정말 이웃에 대한 참 사랑은 이웃을 참 스승인 주 예수님께 인도하는 일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제 주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고 세례자 요한도 참으로 기뻣을 것입니다. 이들 제자들의 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의 물음은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무엇을 찾느냐?”
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찾는 이들이 참된 구도자들입니다. 누구나의 근원적 갈망이 주님을 찾는 갈망입니다. 주님의 첫 제자들이 된 이들의 물음은 정확했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주님을 모시고 함께 살며 배우고 싶은 갈망의 표현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대답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와서 보아라.”
와서 보고 듣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분이야말로 영원한 참스승이신 주 예수님뿐입니다. 여기서 ‘어디에 머물고 계시냐?’는 단어인 그리스어는 ‘메네인(menein)’은 ‘살다(abide)’ 또는 '계속 남다(remain)’라는 뜻으로 복음에서는 항구한 관계를 뜻합니다. 주님곁에 머물면서 주님과 항구한 우정관계를 맺음을 뜻합니다.
그대로 우리의 평생 정주 삶과 일치합니다. “와서 보아라” 주님의 초대에 응해 자랑스럽고 영예롭게도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인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평생 주님 안에서 보고 듣고 배우며 정주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의 수도형제들입니다.
무엇을 배웁니까?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기도를, 섬김을, 순종을, 겸손을, 침묵을, 경청을, 가난을, 정결을 배우며 이외에도 참 배울 것이 많으며 배움에 있어서는 영원한 초보자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말그대로 배움의 여정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주님을 섬기는 것을 배우는 배움터라 우리 수도공동체를 정의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루밤을 묵은 제자들은 깊은 감화를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예수님과 함께 묵었던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며 주님께 형을 인도하니, 바로 이것이 진짜 형제 사랑이요, 시몬 베드로에게는 운명적 사건이 되었으니 늘 갈망하던 참스승이신 주 예수님을 만난 것이지요.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번역하면 베드로입니다. 비로소 영혼의 참 스승이자 말씀이신 주님을 만남으로 영적갈망은 해소되어 내적안정과 평화를 누렸을 시몬 베드로입니다.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인 주님안에 정주의 머무름은 평생과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날로 새로워지고 깊어지는 주님과 사랑의 우정 관계인지 살펴보게 됩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끝으로 26년 전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우정관계를 염원(念願)하며 써놨던 ‘사랑’이란 시를 나눕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향한 내 사랑 날로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한결같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놀랍고
좋아지고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아멘.
1/5(금)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독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론을 이해하고, 배우는 것의 진정한 목적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내가 지금 몸 담고 있는 이곳에서 충만하고 기쁘게 살고 있으며 공동체 안에서 생생한 천국 체험을 하고 있다면,
어찌 “나를 따르시오!” “와서 보시오!” 라고 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봉헌생활자들의 삶이 보다 충만해져야 하겠습니다.
보다 복음적 가치와 의미를 잘 드러내는 향기로운 삶이어야겠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보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정겨운 공동체, 서로가 서로를 향한 섬김과 나눔과 봉사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상 천국 공동체를 건설해야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것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요한 1,39)
주님!
말씀을 듣고 단지 동의하지만 말고, 받아들여 따르게 하소서.
따르지만 말고, 전적인 헌신으로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오늘도 무엇을 찾고, 무엇을 원해야 할지를 일깨워주시고
저를 향해 계시는 당신을 향해 달려가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흠뻑 젖게 하시어,
당신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와서 보아라” 주님의 초대에 응해 자랑스럽고 영예롭게도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인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평생 주님 안에서 보고 듣고 배우며 정주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의 수도형제들입니다.
무엇을 배웁니까?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기도를, 섬김을, 순종을, 겸손을, 침묵을, 경청을, 가난을, 정결을 배우며 이외에도 참 배울 것이 많으며 배움에 있어서는 영원한 초보자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말그대로 배움의 여정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주님을 섬기는 것을 배우는 배움터라 우리 수도공동체를 정의합니다.(이수철 신부)
1/5(금)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제377(제7)일 기도
복음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공동체 안에서 생생한 천국 체험을 하고 있다면,
어찌 “나를 따르시오!” “와서 보시오!” 라고 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봉헌생활자들의 삶이 보다 충만해져야 하겠습니다.
보다 복음적 가치와 의미를 잘 드러내는 향기로운 삶이어야겠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보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정겨운 공동체,
서로가 서로를 향한 섬김과 나눔과 봉사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상 천국 공동체를 건설해야겠습니다.
- 2024년 1월5일(금) 7시2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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