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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5월 24일 금요일[(녹) 연중 제7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5월 24일 금요일[(녹) 연중 제7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3(12),6 참조
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보십시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5,9-12
9 형제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10 형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11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12 나의 형제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그 밖의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3(102),1-2.3-4.8-9.11-12(◎ 8ㄱ)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
○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

복음 환호송

요한 17,17 참조
◎ 알렐루야.
○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1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2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신비로운 제사를 정성껏 거행하며 간절히 청하오니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는 이 제물이
저희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9,2-3
주님의 기적들을 낱낱이 전하오리다. 지극히 높으신 분,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 찬미하나이다.
<또는>
요한 11,27 참조
주님, 저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나이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이 거룩한 제사에서 구원의 보증을 받았으니
저희가 실제로 그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계속 물음표를 던지세요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지난 부활 성야에 세례식이 있었습니다세례 대상자 중에 사회에서 혼인한 형제가 있었습니다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관면혼배가 필요하여서먼저 관면혼배를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한국에서는 본당 신부가 관면혼배를 할 수 있도록 권한이 주어졌습니다미국에서도 당연히 그런 줄 알았습니다혼인성사를 담당하는 부제님이 절차상 문제가 있다고 의견을 주었습니다한국은 선교지역이기에 관면혼배의 권한이 본당 신부에게 주어졌지만미국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습니다한국에서 오는 신부님이 미국의 사정을 잘 모르고 관면혼배를 줄 때가 있는데 그렇게 하면 절차상의 문제가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모두 세례를 받은 신자이고댈러스 교구 소속인 경우에만본당 신부가 혼배성사를 집전할 수 있다고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먼저 교구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혼인무효도 절차가 까다롭고시간이 많이 소요된다고 합니다교포 사목 본당에서 혼인무효 절차를 하려면 한국의 교회법원에 문의하는 것이 더 빠르고쉽게 해결된다고 합니다.

 

교우들과 면담하면서 혼인장애로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어쩔 수 없이 부부의 인연이 끊어진 분들이 있습니다마음이 괴롭고부끄럽기도 합니다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싶지만주변의 시선이 부담되기도 합니다인연을 만나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지만교회의 법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교황님께서도 그런 분들이 공동체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사목적인 관심과 돌봄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국가에는 사면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운전면허가 취소된 사람들이 있습니다그러나 생계를 위해서는 꼭 운전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남용되면 안 되겠지만 국가에서 사면을 통해서 다시 운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피선거권이 박탈된 사람에게도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성서에도 희년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희년에는 빚을 탕감해 주기도 합니다. “약자는 속박으로부터강자는 탐욕으로부터 해방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성경 속 희년의 의미입니다. 2023년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혼인은 19만 4천 건이고이혼은 9만 2천 건이라고 합니다결혼 대비 이혼율이 47.4%로 세계 3위에 해당한다고 보도했습니다신자들의 이혼 비율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저의 권한과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지만교회에서도 이런 상황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은 생일이 2월 29일이라고 합니다그 많은 날 중에 2월 그것도 29일입니다그래서 생일을 찾기가 어렵다고 합니다본인이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생일을 몇 년에 한 번씩밖에는 기억할 수 없다고 합니다저도 제 몸에 대해서 아쉬운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키가 조금 작은 것입니다다른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면 제 몸에 맞는 제의가 거의 없는 편입니다영화를 볼 때앞자리에 앉은 사람의 키가 크면 화면이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 제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생일이 4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것도키가 작은 것도 어찌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이라도 편한 것 같습니다교우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사랑하며 지내야 하는데 때로 불신과 반목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그것의 시작도 사소한 말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 할 것은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십시오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7주간 금요일

복음: 마르 10,1-12

 

사랑없는 결혼생활을 배척하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에 대해서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 시대 당시 ‘이혼장’이 악용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습관은 신명기 24장 1-4절에 근거한 것이지요.

거기 제시된 율법에 따르면 아내에게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한 남편은 그 여인을 쫒아내기 전에

이혼장을 써야만 했습니다.

 

이 이혼장을 손에 쥔 여인은 전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혼장은 또한 재혼을 위해 필요한 서류였습니다.

 

모세는 너무도 문란한 결혼생활, 또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을 최소화하기 위해

예외적으로 이혼장을 사용할 것을 당부했지만, 유대인들은 이 관습을 남용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는 자신들의 이 관습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혼장은 점점 더 남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에게 수치스런 일’이란 원래 아내의 불륜만을 지칭했지만,

후에는 그에 대한 적용이 더 확대되었습니다.

 

결혼 후 10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는 아내, 남편과 말다툼 하는 아내, 친척 앞에서 불손한 태도를 취하는 아내,

베일을 쓰지 않고 외출한 아내, 다른 남자와 말을 하는 아내, 고기를 지나치게 바싹 구운 아내,

국을 끓였는데, 간을 제대로 못 맞춘 아내, 가정사를 남에게 퍼트린 아내 등, 별의 별 이유를 들어

아내를 내쫒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혼장의 악용이 만연하는 가운데, 바리사이파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어떻게 하라고 일렀느냐고 반문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합니다.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우리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이 법을 제정해 준 것이다.”

 

이혼장은 유다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고집 센 기질, 굳어진 마음, 문란한 생활, 끝도 없는 타락 때문에 겨우 예외를 허락해 준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입법자로서의 모세는 당연히 이혼을 금하는 법령을 제정하고

일관되게 밀고 나갔어야 했는데, 히브리 민족의 윤리적 타락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어찌보면 우리 사제, 수도자들은 하느님과 혼인한 사람들입니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계약도 맺고 정배가 된 사람들입니다.

한눈팔지 말고 오로지 그분만을 바라보며 직진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때로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해야 할 신랑이신 예수님은 어디 계시는지 행방을 알 길이 없습니다.

자연스레 눈길을 세상의 좋은 것들로 향합니다.

 

저희 총장 앙헬 페르난데스 추기경님께서 부에노스 아이레스 관구 관구장직을 수행할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그곳 교구장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저런 일들에 대한 협업을 같이 하셔서 지금도 아주 절친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말씀하시는 바나 추구하는 노선이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총장님이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주시는 메시지도 거의 교황님 스타일과 비슷합니다.

종종 뼈때리는 말씀도 스스럼없이 하십니다.

최근 보내주신 편지 내용입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탁월한 행정가, 관리자에 앞서 사람들을 동반하고 돌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일 중독에 빠져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이나 권력, 편리하고 안락한 삶에 푹 빠져 살아가는 형제들도 있습니다.

이보다 끔찍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사랑 없는 결혼생활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강론

 

연중 제7주간 금요일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파르나움을 떠나 유다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군중들이 다시 모여들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결혼에 대한 진정한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10,3)고 되물으시고, 그들이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마르 10,5)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혼을 허락해준 이유가 이혼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모세가 그렇게 한 것은 여성이 이혼장이라는 서류도 없이 버림을 받게 될 경우, 여성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생활하다 붙잡히게 되면 간통죄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아내의 사소한 일을 꼬투리로 잡아 이혼하는 일이 많아 사회적 문제꺼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혼이 안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10,9)는 창조 때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이라고 번역한 “짝 지우다”라는 단어의 원래 뜻이 “함께 멍에를 매다”라는 뜻이기에, 결혼은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일치를 향한 공동의 운명을 지니고 함께 협력하는 동반자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결혼이란 ‘한 몸’, 곧 일치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일치를 이루기 위한 조건적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의 멍에를 매고’ ‘하나 됨’에로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르 10,7)는 말씀을 교부들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관계로,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로 해석해 왔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이사야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하여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하여 기뻐하시리라.”

(이사 62,5) 

이처럼 ‘하느님’은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과 인간은 한 몸을 이루어나가야 하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사실 교회의 일원이 되는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맞이하는 혼인성사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과의 이 깊은 관계가 우리를 가장 품위 있는 존재로 부각시켜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마르 10,8)

주님!

받아들여야 살 수 있음은 제가 부족해서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 까닭입니다.

함께 있어야 살 수 있음은 당신이 필요해서만 아니라 당신이 소중한 까닭입니다.

더불어 한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이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5.23.연중 제7주간 목요일                                                               야고5,1-6 마르9,41-50

                                                       추억의 힘, 추억의 기쁨, 

                                                             추억의 향기

                                          “죄를 짓지 마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주여,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편90,14)

 

요즘 새삼 추억의 힘을 실감합니다.

현재 모든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지녔어도 과거 어렸을 때 상처와 어둡고 아팠던 추억으로,

특히 어머니로 인한 아픈 추억으로 힘들고 불행하게 지내는 이들을 의외로 많이 만납니다.

반면 어렵고 가난했어도 반듯하고 모성애 풍부했던 어머니를 지녔던 이들은 그 추억의 힘으로

평생을 행복하게 삽니다. 

 

어렸을 때 특히 어머니의 사랑을, 사랑의 추억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본의 아닌 사랑 결핍의 원인을 제공한 어머니들이 후에 자녀로 인해 겪는 고통은

끝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 특히 어머니의 사랑에 이어 평생 친구와의 우정 또한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성서에서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의 본보기를 아실 것입니다.

저는 조선시대 학자들중 감동적인 평생 우정의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우정이요, 다산 정약용과 자산어보의 정약전 형제간의 우정이

정말 감동적이자 대표적입니다.

이 네분 천재학자들의 평전을 보면 평생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친 우정인지 깨닫게 됩니다.

 

좋은 추억에도 결정적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우정입니다.

여기서 참으로 추천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영원한 스승, 예수님과의 평생 사랑의 우정입니다.

오늘 옛 어른 다산의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외로운 천지 가운데 나의 형 정약전을 잃고 말았다.

이제부터는 얻는 바가 있어도 장차 어디에 말하겠는가?”

 

자산어보의 저자이자 평생 학문을 나눴던 정약전 형님이 흑산도 유배중 죽었을 때 다산의 탄식입니다.

과거는, 과거의 추억은 죽지 않습니다.

좋은 추억이든 나쁜 추억이든 죽기는커녕 살아서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추억의 힘, 추억의 기쁨, 추억의 향기라 칭하고 싶고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부제로 둘을 더했습니다.

 

“죄를 짓지 마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이래야 나쁜 추억은 치유되고 오늘부터 나쁜 추억을 만들지 않을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참 특이한 것이 나이 먹을수록 추억의 힘, 추억의 기쁨, 추억의 향기가 강렬해짐을 느낍니다.

좋은 추억이 현재와 미래의 행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을 봅니다.

 

며칠전의 강렬한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과거를 살며시 열어봤을 때 은은하고 그윽한 추억의 향기를 강하게 느낀 체험입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 사랑과 마을 친구들과의 우정, 학교 다닐 때, 군대 시절, 교편시절, 수도생활,

산티아고 순례 여정, 그리고 거기서 만났던 정답고 그리웠던 이들등 모두가 살아 있는

고유의 추억의 향기를 발하는 듯 했고 순간 기뻤고 행복했습니다.

 

추억의 향기요 추억의 힘이요 추억의 기쁨이요 추억의 행복입니다.

추억을 사랑으로 바꿔도 무방하겠으니 사랑의 향기, 사랑의 힘, 사랑의 기쁨, 사랑의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며칠전 교황님의 미국 시카고 로욜라 예수회 대학 교수진을 만났을 때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부지런한 꿈꾸는 자들이 되십시오(Be ‘diligent dreamers’).

꿈꾸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은 창조력이, 시심이 결핍되고, 시가 없는 삶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삶의 순례여정중 여러분 안에 이런 갈망으로, 꿈으로 언제나 깨어 살도록 하십시오. 

 

앞으로 계속 나가기 위해서, 여러분은 언제나 여러분의 뿌리들로 돌아가야 합니다.

역동적인 뿌리들(dynamic roots)입니다.

여러분은 뿌리들 없이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거가 뿌리들로부터 힘을 끌어내기 때문입니다. 추억의 힘!

 

여러분은 영롱한 정신만 연마할뿐 아니라, 관대한 마음과 모든 사람의 위엄을 존중하는 양심을 연마하십시오.

교육은 세 차원에서 일어납니다. 머리, 마음, 손입니다.

느끼고 행하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행하는 것을 느끼며, 생각하고 느낀 것을 행하십시오.

 

정신(mind), 마음(heart), 손(hands)은 분리됨이 없이 함께 성장합니다.

오직 셋이 함께 시대의 현실과 요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희망없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희망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닻과 같은 희망이요 희망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희망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습니다(Hope never disappoints)’.”

 

뿌리의 추억이 희망의 꿈과 하나될 때 부단한, 한결같은 진전이요 도대체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사랑의 좋은 추억 쌓기에도 턱없이 짧은 세상, 죄로 인해 자기를, 삶을 파괴하면 복구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죄도 젊고 힘있을 때 짓고 용서받을 일이지 늙고 약할 때 죄를 지으면 손실이 너무 크고 후유증도 오래 갑니다.

 

약먹으며 은총으로 살아가는 인생들인 데, 사랑하며 좋은 추억 만들어가기에도

너무나 짧은 황금인생들인데 죄짓느라 아까운 인생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라는 참으로 절박한 경고이자 명령입니다.

손이 죄짓게 하면 잘라버리고, 발이 죄짓게 하면 잘라 버리고, 눈이 죄짓게 하면 빼 던져버리라 하십니다.

이런 충격요법의 표현은 죄의 결과가 초래하는 불행이 너무 크기에 결코 죄를 짓지 말라는

깨우침을 주기 위함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소금과도 같은 사랑을, 추억의 힘, 추억의 기쁨, 추억의 향기, 희망과 꿈을 고이 지니고

서로 평화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제1독서의 야고보 사도의 부자에 대한 경고도 바로 탐욕에 눈멀어 죄짓지 말라는,

탐욕에서 당장 손을 떼라는, 재물을 쌓지 말고 나누라는 절박한 경고이자 명령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를 연상케 하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이 강렬합니다.

 

“여러분의 재물은 썩었고 옷은 좀 먹었습니다.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녹이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살라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재물을 쌓기만 했습니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고,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이 또한 회개의 촉구입니다. 정의롭게 재물을 나눔으로 죄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과거 추억의 빈약함에 과거의 잘못에 아파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사랑의 추억을

축적해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입니다.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 우보천리의 자세로 하루하루 사랑의 추억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행여나 어렸을 때 어머니 사랑 부족했다 원망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평생 어머니인 성모님이, 교회가 우리를 평생 사랑하고 위로하고 치유하고 격려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뿐이 답이 없습니다.

하루하루 한결같은 사랑의 맹훈련으로 사랑을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 사랑의 훈련입니다. 

죄의 힘은 날로 약화되고 과거의 상처는 치유되며 추억의 힘, 추억의 기쁨, 추억의 향기가

풍요로운 인생으로 변모시켜 줄 것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여, 당신은  대대로

 우리의 안식처가 되시었나이다."(시편90,1). 아멘.

 


 

5/24(금) [(녹) 연중 제7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교우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사랑하며 지내야 하는데 때로 불신과 반목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그것의 시작도 사소한 말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 할 것은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십시오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조명연 신부)

 

2. “우리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탁월한 행정가, 관리자에 앞서 사람들을 동반하고 돌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일 중독에 빠져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이나 권력, 편리하고 안락한 삶에 푹 빠져 살아가는 형제들도 있습니다.

이보다 끔찍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사랑 없는 결혼생활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마르 10,8)

주님!

받아들여야 살 수 있음은 제가 부족해서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 까닭입니다.

함께 있어야 살 수 있음은 당신이 필요해서만 아니라 당신이 소중한 까닭입니다.

더불어 한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이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 신부)

 

4. “외로운 천지 가운데 나의 형 정약전을 잃고 말았다.

이제부터는 얻는 바가 있어도 장차 어디에 말하겠는가?”

 

자산어보의 저자이자 평생 학문을 나눴던 정약전 형님이 흑산도 유배중 죽었을 때 다산의 탄식입니다.

과거는, 과거의 추억은 죽지 않습니다.

좋은 추억이든 나쁜 추억이든 죽기는커녕 살아서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추억의 힘, 추억의 기쁨, 추억의 향기라 칭하고 싶고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이수철 신부)

 

 

5/24(금) [(녹) 연중 제7주간 금요일] , 517(147)일 기도

 

복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오늘의 말·샘 기도>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마르 10,8)

주님!

받아들여야 살 수 있음은 제가 부족해서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 까닭입니다.

함께 있어야 살 수 있음은 당신이 필요해서만 아니라 당신이 소중한 까닭입니다.

더불어 한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이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 2024년 5월24일(금) 7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