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3월 1일 토요일[(녹) 연중 제7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본기도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17,1-15
1 주님께서 사람을 흙에서 창조하시고 그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2 그분께서는 정해진 날수와 시간을 그들에게 주시고
땅 위에 있는 것들을 다스릴 권한을 그들에게 주셨다.
3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처럼 그들에게 힘을 입히시고
당신 모습으로 그들을 만드셨다.
4 그분께서는 모든 생물 안에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놓으시고
그들을 들짐승과 날짐승의 주인이 되게 하셨다.
5 그들은 주님의 다섯 가지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덧붙여 그분께서는 여섯 번째로 그들에게 지성을 나누어 주시고
일곱 번째로 그분의 능력들을 해석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다.
6 그분께서는 분별력과 혀와 눈을 주시고 귀와 마음을 주시어 깨닫게 하셨다.
7 그분께서는 지식과 이해력으로 그들을 충만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선과 악을 보여 주셨다.
8 그분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당신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 주시어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보게 하시고
그들이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영원히 찬양하게 하셨다.
9 그분의 위대한 업적을 선포하기 위하여
10 그들은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리라.
11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지식을 주시고
생명의 율법을 그들에게 상속 재산으로 나누어 주시어
지금 살아 있는 존재들이 죽을 몸임을 깨우쳐 주셨다.
12 그분께서는 그들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시고
당신의 판결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13 그들의 눈은 그분의 위대하신 영광을 보고
그들의 귀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14 그분께서는 “온갖 불의를 조심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며
그들 각자에게 제 이웃에 대한 계명을 주셨다.
15 그들의 길은 언제나 그분 앞에 드러나고
그분의 눈앞에서 감추어지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의 자애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머무르리라.
○ 아버지가 자식을 가여워하듯,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 가여워하시네. 우리의 됨됨이를 익히 아시고, 우리가 한낱 티끌임을 기억하시네. ◎
○ 인생이란 그 세월 풀과 같아서, 들꽃처럼 그렇게 피어나지만, 바람 한 번 스쳐도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 길이 없네. ◎
○ 주님의 자애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머무르고, 그분의 의로움은 대대손손, 그분 계약을 지키는 이들에게 이르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3-16
그때에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신비로운 제사를 정성껏 거행하며 간절히 청하오니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는 이 제물이
저희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의 기적들을 낱낱이 전하오리다. 지극히 높으신 분,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 찬미하나이다.
<또는>
요한 11,27 참조
주님, 저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나이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거룩한 제사에서 구원의 보증을 받았으니
저희가 실제로 그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순발력, 임기응변이 좋은 분들이 있습니다.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빠른 분들입니다. 흔히 그런 분들을 ‘내공’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드라마나 영화의 대사 중에 깊이 각인 되었던 대사가 있습니다. “잘 났어! 정말, 너나 잘하세요,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육이오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추우냐, 나도 춥다.” 이런 대사를 들으면 의미가 선명하게 살아납니다. 강론할 때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날 전례와 맞지 않는 복음으로 준비한 때도 있습니다. 화창한 날을 예상하고 강론을 준비했는데 갑자기 비가 오는 때도 있습니다. 강론 중에 아이가 울거나, 스마트 폰이 울리는 때도 있습니다. 내공이 깊은 신부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별 무리 없이, 어떨 때는 더 깊은 감동을 주면서 선포합니다. 오랜 경험을 지닌 요리사는 신선한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만, 철 지난 재료로도 깊은 풍미를 주는 음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순발력과 임기응변의 원조는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은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입니다. 유대의 율법에 따르면 그런 여인은 돌로 쳐서 죽여도 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면 예수님은 새로운 메시아가 아니라 구약의 율법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 이방인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진퇴양난의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손에 든 돌을 놓고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아픈 사람,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제자들도 안식일에 밀 이삭을 먹었습니다.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과 제자들은 왜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그 밖에도 예수님의 순발력이 돋보이는 곳이 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면 됩니다.’ 우리가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언제나 기도할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순발력과 임기응변의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를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가장 빠른 비행기와 우주선으로는 태양계를 벗어나기도 힘이 들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과 업적으로는 피라미드 이상 높은 건축물도 세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꿈과 희망이 있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유년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올 수 있도록 어머니가 10개월 동안 나를 품고 있었음을 감사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일어날 수 있도록, 걸을 수 있도록 나를 먹여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과 가족들이 있었음을 감사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무상으로 모든 것을 받았으니, 나도 무상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의 영혼에 하느님의 숨결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능력을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있으며, 예술을 창조할 수 있는 감성이 있습니다. 우주와 세상의 시작을 사유할 수 있는 오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보석을 담으면 보석상자가 됩니다. ‘우리들 마음에 시기, 질투, 탐욕, 분노, 미움, 원한’의 쓰레기를 담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용서, 희생, 나눔, 배려, 인내, 사랑’의 보석을 담으면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
연중 제7주간 토요일
마르코 10,13-16
어린이의 하느님 나라는 부모다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는 제자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
어쩌면 이 말씀이 마르코 복음의 핵심일 수도 있겠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해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곧 하느님 나라임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주제가 핵심입니다.
먼저 마르코가 설명하려는 하느님 나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지금 마르코는 예수님의 두 번째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유에 대해 풀어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사람을 악에서 구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니면 사람은 사람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가 아니면 사람은 사람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창조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웃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을까요?
역사적으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나라들은 생계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이킹’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8세기 당시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살던 북게르만족은 인구가 큰 폭으로 상승하자 그 척박한
땅에서는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 육로로 동쪽에 있는 나라들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박기술이 발달하자 바이킹은 잉글랜드 서쪽 지역을 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럽인들은 커다란 덩치에 무식한 도끼를 들고 싸우는 바이킹을 당해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바이킹은 오딘이란 신을 섬겼는데 싸우다 목숨을 잃으면 오딘의 나라인 발할라로
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전투 민족답게 방패 처녀라고 불리는 여성 전사가 전쟁에 다수
참여했고 고위직에 올라간 여전사가 존재했을 정도로 여성의 인권이 강한 편이었습니다.
여전사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약탈하기 위해 오랫동안 집을 떠난 남성들을 대신해
자신의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먹을 걱정이 없다면 목숨을 건 약탈은 왜 하겠습니까?
모든 약탈이 일어나는 이유는 생존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약탈하지 않습니다. 만약 어린이들이 부모의 돈을 훔친다거나
다른 아이들의 것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아이들이 생존에 대해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EBS 부모 – 저, 혼나러 나왔어요’에서는 4학년 남자아이를 호랑이보다 무섭게 체벌하는
어머니가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도 2021년부터 법적으로 아이에게 체벌하는 것은
불법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맞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자신은 매 맞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물론 어머니에게도 이유가 있습니다.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지갑에 손을 대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친구를 사귀기 위함이었습니다. 먼저 아이가 왜 약탈자가 되어가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부모가 먼저 아이에게 충분히 좋은 환경이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환경입니다. 바이킹이 살던 땅처럼 척박한 부모는 바이킹처럼 약탈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환경에서 자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체벌은 약탈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약탈자로 만듭니다.
아이에게 부모는 환경입니다. 부모가 생계 걱정을 하고 있다면 자녀는 어떨까요?
당연히 약탈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좋은 환경이 되어주기 위해 제가 항상 추천하는 것이 ‘십일조’를 온전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에덴동산의 환경 안에 있다면 자녀도 에덴동산의 환경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 아이가 약탈자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디팩 초프라의 훈육법을 배우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가 먹고사는 건 다 책임질 테니까, 너희는 너희가 왜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찾고
이웃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만 생각하며 살아라.”
아들 둘은 에덴동산에서 산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 것입니다.
아들 둘이 있었는데, 형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잘 도와주었고 동생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쳐 주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형은 인도에서 커다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동생은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디팩 초프라는 자신이 언제까지 좋은 환경이 되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신을 찾고 그 신이 창조한 이유를 찾으라고 합니다. 모든 창조된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사업가로 혹은 교수로 하느님이 부르셨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삶이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삶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춘기가 되어 부모가 더는 아이의 환경이 되어주지 못해도
아이들은 신의 섭리 안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삶은 ‘경쟁’을 시키는 것입니다. 경쟁이란 환경은 지옥입니다.
지옥에서는 약탈자들이 생겨납니다. 약탈자들이 사는 세상은 또 지옥이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녀를 낳을 부모는 없습니다. 약탈자를 낳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아는 자신이 자기 주인의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만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뱀은 진정한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땅에 살고 싶으면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을 스스로 채워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자아를 환경으로 사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약탈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모기나 기생충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떤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자아가 만들어낸 척박한 이집트와 같은 환경에서
종살이하고 있나요, 아니면 에덴동산에서 살고 있나요?
어린이처럼 부모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린이는 자신에게 양식을 주는 이를 부모로 믿습니다. 이는 증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양식을 주는 부모를 찾지 않으면 지옥의 삶을 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며 자아가 강해지면 자아는 그런 환경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며 창조자가 있다면 증거를 찾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기가 부모를 찾는 것은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믿는 것은 선택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창조자로 믿으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그분이 창조자이심을 믿기 위해
십일조도 내야 하지만 내가 에덴동산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자녀들도 또 다른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천국의 백성이 됩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어린이처럼 그리스도를 하느님 나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두 선택밖에 없습니다.
뱀의 나라를 선택하든,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든.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 이영근 신부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어린이와 어른은 받아들이는 방식이 어떻게 다를까?>
오늘 복음은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 장(9장)에서 제자들에게 ‘가장 큰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르 10,14-15)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들이 들어가는 곳’이라 함은 ‘하느님 나라’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들어가려는 이에게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획득하는 나라’가 아니라 은총으로 ‘주어지는 나라’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와 어른이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어 어떻게 다를까?
그것은 어린이는 ‘모르는 것’을 받아들이고, 어른들은 ‘아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점일 것입니다.
어린이는 어떤 사실들을 마주쳤을 때, 모르기에 놀라워하고 경이롭게 여기고 경외감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는 채로 받아들입니다.
곧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한 까닭입니다.
아인쉬타인은 말합니다.
“경외심을 느끼고 감탄하는 능력을 잃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어떤 사실들을 마주쳤을 때, 그것이 이해가 되면 받아들이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곧 지성적 동의를 통해 아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모른 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선사된 것, 베풀어진 것, 선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요, 주어진 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것은 의탁과 신뢰로 받아들이는 일이요, 결국은 사랑을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일이 그렇습니다.
곧 ‘베풀어진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선사되고 주어져 이미 ‘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오히려 막고 있는 이들을 깨우치십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르 10,15)
주님!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놀라워하고 경배하게 하소서.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어린이같이 아래에 있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래에 있기에, 떠받들고 존경하게 하소서.
약하기에,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속해 있고, 당신 생명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2.28.연중 제7주간 금요일 집회6,5-17 마르10,1-12
우정의 여정
“주님과의 우정, 이웃과의 우정, 부부간의 우정”
“주님, 당신의 계명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실로 내 낙이 이것이오이다.”(시편119,35)
우정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친구가 있습니까?
한결같이 평생 함께 하는 도반인 친구입니다.
한둘만 있어도 그 인생 성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우정관계에서 사람의 됨됨이가 잘 드러나니 참사람임이 저절로 검증되는 우정관계입니다.
공자의 논어 서두에 나오는 인생 삼락중의 하나 역시 우정입니다.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사랑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이 우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이, 시대, 남녀, 국적을 초월하는 우정관계입니다.
주변에서 탁월한 우정관계의 사람들을 보면 참 존경스럽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에서도 우정의 탁월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더 가고 싶을 때 절제하고, 두려울 때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탁월함이란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다산>
“고요할 때 텅비면 밝고, 밝으면 통한다. 움직일 때 곧으면 공정해지고, 공정하면 넓다.
이러한 상태는 탁월함에 가깝다.”<통서; 주돈이의 책>
참된 우정의 여정에도 고스란히 해당되는 탁월함입니다.
정말 우정의 여정에서 드러나는 이런 탁월한 우정일 때 순수하고 아름답고 참 행복할 것입니다.
이런 우정의 본보기로 생각나는 구약의 다윗과 요나단, 조선시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그리고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 손암 정약전과의 우정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우정의 여정입니다.
단순히 이웃 형제와의 우정만 있는 게 아니라, 주님과의 우정도 있고 이웃형제와의 우정도 있고,
부부간의 우정도 있습니다.
하루 이틀만에 완성되는 우정이 아니라 우정 또한 평생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의 주제는 우정입니다.
너무 적절하고 공감이 가서 전문을 인용하고 싶습니다만, 아쉽게도 집회서 후반부만을 인용합니다.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는 셈이다.
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저울로도 그의 가치를 달 수 없다.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이니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런 친구를 얻으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자신의 우정을 바르게 키워나가니
이웃도 그의 본을 따라 그대로 하리라.”
정말 우정에 관한 금과옥조의 교훈입니다.
이런 우정도 보고 배웁니다.
보고 배울 이런 우정의 사람들은 그 존재자체 만으로 이웃에 큰 공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참된 우정의 기초에는 주님을 경외함이 전제조건으로 제시된다는 것입니다.
그 삶의 중심에 주님과의 우정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님과의 우정과 함께 가는 형제들, 심지어는 부부관계의 우정임도
깨닫습니다.
이것은 제가 수도공동생활을 통해서도 깨닫는 체험적 진리입니다.
서로 다른 이들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는 것은 정말 하느님 은총의 기적입니다.
주님과의 우정관계의 여정을 노래한 ‘하늘과 산’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하늘이 주님을 상징한다면 산은 우리 각자를 상징합니다.
지금도 자주 하늘과 불암산을 바라볼 때 마다 되뇌는 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
무려 28년전 시이지만 늘 읽어도 늘 새롭습니다.
바로 일치의 공동체 중심인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공동체 형제들 상호간의 우정입니다.
형제들간의 우정의 기초에 자리하고 있는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그러니 일치의 중심인 주님과의 평생 우정을 돈독히 함이 얼마나 본질적 중요성을 지니는지 깨닫습니다.
형제들간의 우정이 변질되거나 부패됨이 없이 평생 온전함 속에서 원숙하게 익어갈 수 있음의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이래서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바치는 미사와 시편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 수행이요
이보다 주님과는 물론 형제들간의 우정을 북돋우는데 중요한 수행은 없습니다.
부부간의 우정도 예외가 아닙니다.
참으로 성숙해가는 부부는 연정이나 애정으로 시작되어도 결국은 우정으로 변모되어
아름다운 친구관계의 우정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날로 깊어지는 신뢰관계와 더불어 말이 없어도 마냥 편안한 노년 부부의 모습은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지요.
흡사 일몰시의 평화를, 또 가을 단풍 짙어져가는 초연한 아름다움을 연상케 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혼인과 이혼입니다.
예나 이제나 혼인과 이혼은 영원히 화제의 중심이 되는 주제입니다.
혼인은 이제 공통적인 의무가 아니라 선택처럼 생각되는 현실이요 혼인하지 않은, 못하는 형제자매들이
너무 많습니다.
혼인해도 이혼하여 홀로 살아가는 이들 또한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결혼관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마음이 완고하여 모세가 부득이 이혼을 허락했지만 창조주 하느님의 뜻은
한몸의 일치관계를 이루며 사는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혼인관의 대원칙입니다.
그러니 부부간 신뢰의 일치를 깨는 간음이 얼마나 치명적 위중한 대죄인지 깨닫게 됩니다.
간음으로 무너진 부부간 신뢰관계의 회복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간음에 대한 말씀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그러니 부부간 평생 함께 신의를 지키며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힘들겠는지요!
답이 없습니다. 늘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삶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단호히 ‘잘살고 못살고 할 것 없이 부부가 함께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요 성인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미운정 고운정 들면서 연정도 애정도 우정으로 승화되어 잘 익어가는 우정의 여정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이런 우정 역시 필히 주님과의 우정과 함께 감을 봅니다.
부부간 우정의 여정이 이상이라면 이혼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도저히 살 수 없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애는 황홀한 착각이요 결혼은 참혹한 이해’라는 좀 심한 말도 있습니다.
또 ‘가난이 앞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옆문으로 달아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이요 여정인지요!
그러나 함께 살든 혼자살든 교회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가면서 영원한 평생도반이자 친구인
주님과의 우정의 여정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웃형제들과의 우정, 부부간의 우정의 기초가, 기반이 되는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날마다 거행되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서로간의 우정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이게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바램입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요한17,17). 아멘.
3/1(토) [(녹) 연중 제7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보석을 담으면 보석상자가 됩니다. ‘우리들 마음에 시기, 질투, 탐욕, 분노, 미움, 원한’의 쓰레기를 담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용서, 희생, 나눔, 배려, 인내, 사랑’의 보석을 담으면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조재형 신부)
2.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전 삼용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르 10,15)
주님!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놀라워하고 경배하게 하소서.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어린이같이 아래에 있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래에 있기에, 떠받들고 존경하게 하소서.
약하기에,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속해 있고, 당신 생명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결혼관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마음이 완고하여 모세가 부득이 이혼을 허락했지만 창조주 하느님의 뜻은
한몸의 일치관계를 이루며 사는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이수철 신부)
3/1(토) [(녹)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르 10,15)
주님!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놀라워하고 경배하게 하소서.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어린이같이 아래에 있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래에 있기에, 떠받들고 존경하게 하소서.
약하기에,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속해 있고, 당신 생명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3월1일(토) 4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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