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7월 3일 월요일[(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한 토마스는 불신하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하고 고백하였다.
토마스 사도는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입당송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구원이 되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대영광송>
본기도
복된 토마스 사도의 축일을 영광스럽게 지내는 저희가
그의 전구로 굳은 믿음을 지니고
그가 주님으로 고백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2,19-22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겨레들아. ◎
○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알렐루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24-29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복된 토마스 사도의 신앙 고백을 기리는 저희가
주님께 마땅한 찬미의 제사를 바치며 간절히 비오니
이 예물을 받아들이시어 저희를 지켜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 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네 손을 넣어 못 자국을 확인해 보아라.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복된 토마스 사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주님이며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저희가
그 믿음을 삶으로 증언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지순례를 가면서 매일 반복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침이면 짐을 다 정리해서 버스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버스에 탑승하면 꼭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권, 스마트폰, 지갑’입니다. 다른 것들은 혹시 깜빡하고 놓고 나와도 되지만 ‘여권, 스마트폰, 지갑’은 반드시 챙겨야 하는 목록입니다. 저녁에 다음 숙소에 도착하면 호텔로비에서 ‘열쇠’를 받게 됩니다. 이때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WiFi’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이 순례자들은 호텔에서 제공하는 무료 인터넷에 접속하려고 합니다. 가이드는 호텔에서 제공하는 무선인터넷 비밀번호를 알려줍니다. 순례자들은 무선인터넷에 접속한 후에 방으로 들어갑니다. 가족들에게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중요한 메일을 확인하기도 하고, 낮에 들었던 성지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기도 하고, 순례 중에 찍었던 사진을 단체 카톡 방에 올리기도 합니다. 문제는 ‘속도’입니다. 무선인터넷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접속이 되더라도 속도가 느리면 사진을 나누기도 어렵고, 메일을 확인하기도 어렵습니다. 느린 속도에 대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제 천천히 하루를 돌아보고 다음 순례를 준비합니다. 느린 속도에 대해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직원에게 확인하기도 하고, 애꿎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탓하기도 합니다.
저도 순례 중에 가능하면 ‘WiFi’에 접속을 합니다. 신문사의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기사를 점검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이 그다지 필요 없는 메일이지만 습관적으로 메일을 확인합니다. 순례 중에도 매일 묵상 강론을 나누려고 합니다. 순조롭게 무선인터넷에 접속이 되고 강론을 나누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하지만 어떤 호텔은 ‘WiFi’의 속도가 느리거나 아예 연결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하루를 정리하고, 다음 순례를 준비하면 좋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뛸 때가 있습니다. 컴퓨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애꿎은 컴퓨터를 탓하기도 합니다. 컴퓨터가 오래 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참에 컴퓨터를 바꾸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컴퓨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큰 도시에서 ‘WiFi’에 접속하면 컴퓨터는 그동안 자신이 억울했음을 드러내듯이 빠른 속도로 인터넷에 접속합니다. 저도 아직은 빠르게 작동하는 컴퓨터를 보면서 입가에는 웃음이 퍼집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10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빠른 속도로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가 정보를 찾아내고, 메일을 검색하듯이 예수님과 접속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평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제자들의 얼굴에는 희망과 용기의 꽃이 활짝 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과 접속하지 못했던 토마사도는 여전히 두려움과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동료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도 예수님과 접속하고 싶습니다. 나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분처럼 만나고 싶습니다. 나는 그분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만져보고 싶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만져보고 싶습니다.” 예수님과 접속한 동료들이 부럽기도 했고, 예수님과 만나보고 싶은 그리움도 있었습니다. 토마사도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치 컴퓨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WiFi’에 연결되지 못해서 정보를 검색할 수 없었던 것처럼 토마사도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예수님과 접속하지 못해서 여전히 근심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토마야! 내 옆구리를 만져보아라! 내 손의 못 자국을 만져보아라!” 예수님과 접속한 토마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를 통해서 우리가 언제든지 예수님과 접속할 수 있는 ‘비밀번호’를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능력, 재능, 업적이라는 비밀번호로는 예수님과 접속할 수 없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비밀번호로는 예수님과 접속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라는 비밀번호가 있으면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의 골짜기에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과 접속할 수 있습니다. 그런 나의 믿음은 또 다른 ‘WiFi’가 되어서 다른 이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토마사도는 그 믿음으로 멀리 인도에까지 가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근심, 걱정, 불평, 불만이 있는 하루였다면 ‘믿음’의 ‘WiFi’를 다시 켜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어 희망과 기쁨의 하루가 될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2023년 7월 3일 월요일,
요한 20,24-29
하느님 체험을 위한 속성과정이나 암표는 이 세상 어딜 가도 없습니다!
피정 센터를 찾는 분들 가운데, 수도자인 제가 부러울 정도로 진한 하느님 현존 체험 속에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철저한 하느님 부재 체험으로 답답해 하고 힘겨워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평생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염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찐한 하느님 체험일 것입니다.
저 역시 수도자로 살면서 늘 부끄럽게 생각하는 일 한가지는, 제 신분상 언제나 하느님을 눈앞에 뵙는 듯이 살아야 할텐데, 하느님 두려워하며 살아야 할텐데, 그래서 하루하루를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서 이렇다 할 체험이 없이, 그 어떤 확신도 없이 살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물에 물 탄 듯한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가끔 신자들께서 자신들이 경험했던 하느님 체험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할 때면 더욱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게 됩니다.
이럴 때마다 한가지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수도자에 대한 특별우대가 없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합니다. 성직자라고 해서 얻게 되는 프리미엄이란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는다면, 기도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성직자 역시 하느님의 현존을 의심하는 비신자나 냉담자처럼 지낼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최근 제가 느끼는 갈증 가운데 가장 큰 갈증은 하느님께 대한 갈증입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예전처럼 그분 얼굴을 뚜렷하게 뵈올 수만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텐데...단 한 번만이라도 예전처럼 강렬하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정말 잘살수 있을텐데..."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은 우리의 영적 생활의 무미건조함 여부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인생 여정에 동반하시고 우리 인간 역사에 활기차게 역사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 개인의 행복과 불행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삶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스 사도는 눈으로 반드시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불신에 가득 찬 우리 인간의 삶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죽어도 못 믿겠다.’는 외침은 바로 오늘 우리의 외침입니다.
하느님은 고통과 눈물 그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는데,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거냐?’고 외칠 때 우리는 또 다른 토마스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보다 각별한 하느님 체험을 위해 노력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하느님 체험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선물입니다. 하느님 체험을 위한 속성과정이나 암표는 이 세상 어딜 가도 없습니다.
하느님 체험을 위한 족집게 과외는 따로 없습니다. 오직 끊임없는 간절한 기도,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 하느님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순간을 기다리는 인내심만이 우리를 보다 강렬한 하느님 체험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702. 연중 제13주일.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오늘은 연중 제13 주일입니다. 7월의 첫 주일, 우리는 한 해의 중간에 이르러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마음을 새겨야 할 때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파견한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축복과 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언자 엘리사를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숙소를 제공하고 대접한 수넴 여인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축복과 자비를 들려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이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혔으니, 그분과 함께 살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서는 특히, 예수님께서 파견한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들에게는 상이 베풀어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0,40)
이 말씀은 당신께서 제자들을 단순히 당신의 대리인을 파견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한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당신의 이름으로’ 파견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 안에는 아버지께서 계셔서 당신께서 하시는 일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과 같이, 당신이 파견한 제자들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당신의 제자를 제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제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핍박을 당하면서도 섬기는 “작은이들”인 파견 받은 이들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에게는 “상”이 베풀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저희 삶을 돌아보게 하며, 새롭게 살기를 요청합니다. 곧 나는 파견 받은 제자로서 작은이로 살아가고 있는지, 곧 섬기는 이가 아니라 섬김 받기를 좋아하지는 않는지, 또 핍박당하고 거부되는 것을 못 견뎌하고, 오히려 상대를 윽박지르고 짓누르지는 않는지, 또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받아들여 대접해주는 신자들의 선의를 마치 정당한 권리인 양 당연히 여기거나 또는 기대하고 즐기고 있지는 않는지, 진정 나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인지를 드려다 보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또 하나의 주제는 당신의 제자 혹은 파견 받은 이가 지녀야 할 태도와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로서 합당하지 못한 태도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부모나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부모나 자녀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라”는 말씀은 가족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혈연의 자연적 인간적인 사랑(φιλεω)보다 신적인 사랑(αγαπαω)을 앞세우라는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의 제자는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앞세워 ‘먼저’ 사랑하는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으로 그들이 겪게 될 시련과 치욕을 지는 일입니다. 곧 당시의 십자가는 죄수 중에도 노예죄수나 반란죄를 지은 이의 처형도구였듯이, 대단히 불명예스럽고 치욕적인 죽음까지도 지고 따르는 일입니다. 자신을 훼손하고 손해 보면서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로서 합당한 태도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이 땅에서의 삶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 안에서의 생명의 상실은 오히려 더 귀한 생명의 얻음이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가치를 위해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잃는다면, 결국 자기의 영혼을 잃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동시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제시해줍니다. 곧 나는 대체, 무엇을 앞세워 살아가고 있는지, 대체 무엇을 더 사랑하는지, 하느님인지 나 자신인지, 또 제 십자가는 기꺼이 지는지 아니면 피하고 있는지, 누구를 따르는지 내 자신인지 주님인지, 또 누구의 뜻을 따르고 실현하고자 하는지, 나의 뜻인지 주님의 뜻인지, 또 내 목숨을 내어놓는지 아니면 나 자신의 목숨에 연연하고 상처받지 않고 손해 보지 않으려 온갖 안전과 보호 장치를 꾸미고 있는지, 진정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고,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참 삶의 길
-주님 사랑,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 형제 사랑-
어제의 세 가지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마지막 수련자 수업시간에 수련수사는 마침 저에게 한가지 말씀을 드리겠다며 많이 눈치를 보며 주저하길래 걱정하지 말고 이야기해달라 했고 내심 긴장했습니다. 무슨 스캔들이나 악습같은 것은 아닌지, 그러나 내가 모르는 것은 알아 개선해야하기에 꼭 듣고 싶었습니다.
“수사님에게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은 가끔 어쩌다가 체취, 땀냄새, 노인냄새가 난다합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이야기 해줬고 저도 올해 들어와 가끔 느낍니다. 집무실에 방향제를 비치해야겠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약간 충격이었습니다. 매일 속옷을 갈아입고 기상하면 샤워에 하루를 끝내면서 샤워를 하는데 무슨 냄새가 날까, 사실 속옷도 삶지 않고 오래 입다보면 아무리 빨아도 냄새가 나긴하는데 알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안도했습니다. 악습이나 악행의 죄가 아녔기 때문입니다.
이건 생리적 문제라 죄가 되는 것은 아니기에 각별히 삼가면 될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맙다고 격려하는 말을 했고 사람의 향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평생 하느님을 사랑하며 매일 미사에 강론, 끊임없는 기도로 내 마음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날 것이라 자부하며 새삼 인품의 향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어제 15년만에 갑작스럽게 찾은 수녀님의 면담고백성사시 수녀님의 수도원 방문소감입니다. “수도원 입구에 들어와 수도원길을 걷는 동안 예전과는 달리 답답한 느낌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활짝 펼쳐진 불암산과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이젠 나무에 가려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15년전이면 그때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가 없을 때입니다. 가로수길이 하늘길이라 하며 걸을 때 마다 감동했지 산과 하늘을 가리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듣고 나서 후에 걸어보니 하늘도 산도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 답답한 느낌이었습니다. 새삼 모든 것에는 일장일단이 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주님을 가리는 삶은 아닌지 참으로 작고 투명하고 겸손하여 배경인 주님을 잘 드러내는 삶인지 반성했습니다.
하나는 ‘탈성장’에 관한 논의입니다. 이번 1년만에 복간되어 도착한 녹색평론을 읽고 많이 불편하고 부끄러웠고 지구와 인류에 대해 비관적 생각도 들었습니다. 더 이상 지속성장은 환상이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추세라며 절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탈성장이 유일한 해법이며 자본주의를 끝내야 한다는데 이를 어쩐단 말인가! 문제는 나왔습니다만 어떻게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답은 참 힘듭니다만 더 늦지 않게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참 삶의 길을 찾아 사는 것입니다. 이젠 혁명적 사고의 전환, 생활방식의 전환이 있어야 할 것이고 과감한 정책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 근원적 문제에 대한 해결없이 모든 일들이, 심지어는 강론을 쓰는 일도 부질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대만 생각하고 미래에 대한 생각없이 살아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무수한 쓰레기를 양산하며 먹고 사는 자체가 죄송스럽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참된 삶의 길이 절실합니다. 정말 치열한 가열찬 분투의 노력과 훈련이 절박한 시점입니다.
진정한 향기는 인품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이고, 진정한 삶은 무지의 교만으로 배경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겸손한 삶이요, 진정한 성장은 탈성장에서 부단한 회개를 통한 내적, 영적성장임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닮은 참된 삶의 길이겠습니다.
첫째,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남는 것은, 살아서 할일은 주님 사랑하는 일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닮아가면서 끊임없는 자아초월로 이기적 탐욕의 무지한 나로부터 부단한 탈출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말합니다. 참으로 우선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눈밝은 이타적 가족 사랑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웃에 대한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무사한 아가페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세례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한 삶이니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이 우리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주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더불어 기억해야할 말이 “아모로 파티(Amor Fati)” 운명애입니다. 참으로 내 운명의 십자가, 책임의 십자가를 뜨겁게 사랑하며 항구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교의 삶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책임을 다하는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니다. 주님 사랑의 결정적 표지가 내 십자가입니다. 비교불가한 내 고유의 십자가요, 이 운명의 십자가, 책임의 십자가를 뜨겁게 사랑하면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도 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짐도 사랑의 선물로 바뀔수 있을 것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역설의 진리입니다. 날마다 부단히 주님 때문에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 자기를 잃을 때, 비울 때, 버릴 때 비로소 목숨을 얻어 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가난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여기를 사는 것이요, 지금 여기서 구체적 이웃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형제 사랑없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이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도 받고, 의인을 의인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도 받습니다.
제1독서에서 엘리사 예언자를 정성껏 한결같이 환대한 수넴의 부유한 여자는 득남할 것일라는 축복을 받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형제를 환대하는 이들의 환대의 사랑은 그 자체가 축복이 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제자는 사도들일 수 있고, 하느님 나라의 증인이 되는 모든 제자들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또 공동체 안에서 박해 때문에 기장 불우하게 된 이들, 그리고 가장 빈곤하게 된 이들이 될 것입니다. 넓고 깊이 보면 가난한 모든 이들이 주님의 제자이자 형제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제자답게 형제답게 살며 작고 가난한 형제들을 보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며, 주님의 가난하고 작은 제자나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두의 중심임을 봅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니다. 혼자의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제 십자가를 지고 가난한 형제들과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 오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더불어의 십자가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희의 전부입니다.
저희 사랑, 저희 생명, 저희 희망, 저희 기쁨, 저희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7/3(월) 성 토마스 사도 축일, 되새김 구절]
1.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를 통해서 우리가 언제든지 예수님과 접속할 수 있는 ‘비밀번호’를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조재형 신부)
2. 하느님은 고통과 눈물 그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는데,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거냐?’고 외칠 때 우리는 또 다른 토마스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이영근 신부)
4. 예수님을 사랑하여 제 십자가를 지고 가난한 형제들과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 오르는 것입니다. (이수철 신부)
[7/3(월)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제 191일 기도]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순명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7월3일(월) 6시1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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