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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1월 17일 금요일[(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1월 17일 금요일[(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안토니오 성인은 3세기 중엽 이집트 중부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느 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자신의 많은 상속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였고,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다. 그는 세상의 그릇된 가치를 거슬러 극기와 희생의 삶을 이어 갔으며,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릴 만큼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356년 사막에서 세상을 떠났다.

입당송

시편 92(91),13-14
의인은 야자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자라나리라. 주님의 집에 심겨 우리 하느님의 앞뜰에서 우거지리라.

본기도

하느님,
복된 안토니오 아빠스가 광야의 은수 생활로
하느님을 섬기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의 모범과 전구로 저희 자신을 버리고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4,1-5.11
형제 여러분, 1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2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4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5 또 여기에서는,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11 그러니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78(77),3과 4ㄱㄹ.6ㄴ-7.8(◎ 7ㄴ)
◎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 우리가 이미 들어 아는 것을, 조상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것을 전하리라. 주님의 영광스러운 행적과 권능을, 다가올 세대에게 들려주려 하노라. ◎
○ 그들이 일어나서, 제 자손들에게 들려주라 하심이네.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않으며, 당신 계명을 지키라 하심이네. ◎
○ 고집부리고 반항하던 세대, 그 조상들처럼 되지 말라 하심이네. 마음이 흔들렸던 그 세대, 그들의 정신은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았네. ◎

복음 환호송

루카 7,16
◎ 알렐루야.
○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 알렐루야.

복음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에페 6,10-13.18)와 복음(마태 19,16-26)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복된 안토니오를 기리며 주님의 제대에 드리는 이 예물을 받으시어
저희가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내고
오직 주님만을 찾아 풍요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마태 19,2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라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복된 안토니오가 어둠의 세력을 누르고 승리하게 하셨으니
저희도 구원의 성사로 힘을 얻어
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성 안토니오 아빠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한국에서 신부님 두 분이 왔습니다. 두 분 모두 교구청에서 함께 근무했었습니다. 한 분은 선교와 전례 담당 사목을 하였고, 다른 한 분은 직장인 사목을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교육 담당 사목을 했습니다. 2002년의 일이니, 어느덧 23년이 지났습니다. 40대 초반의 우리는 열정과 힘이 넘쳤습니다. 교회의 현실과 미래에 관해서 밤을 새워 토론했습니다. 우리의 힘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서 성격 유형 검사를 받기도 했고, 강화도로 연수를 가기도 했습니다. 한 분은 그 뒤 2013년에 교구청에서 저와 함께 일했습니다. 저는 성소 국장으로 일했고, 신부님은 해외 선교 사목 국장으로 일했습니다. 공자께서는 멀리 벗이 찾아와서 함께 하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죽마고우가 이 먼 곳까지 찾아주었으니 얼마나 기쁜가, 같이 밤새도록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눠야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중시하는 가치를 똑같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만난 기쁨에 관한 것입니다. 살아가는 방식이 같은 동행자, 같은 길을 걷는 도반, 또는 같은 뜻을 가진 동지를 뜻합니다. 예전처럼 열정과 힘이 넘치지는 않지만, 예전에는 미처 갖추지 못했던 덕과 온화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지구장으로 사목하면서 교구장님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작년 12 3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전시와 내란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국가적인 재난이 발생하지도 않았습니다. 대통령은 국회가 말을 듣지 않아서 조금 겁을 주려고 계엄을 선포했다고 했습니다. 상식적이지 않은 비상계엄, 국민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는 비상계엄을 쉽게 선포되어서도 안 되고, 그런 비상계엄은 또 다는 헌법기관인 국회만이 해제를 결의할 수 있습니다. 비상계엄은 선포한 지 3시간이 안 되어서 해제되었습니다. 헬기가 국회의 마당에 내렸고, 무장한 군인이 국회에 난입했습니다. 그럼에도 비상계엄이 해제될 수 있었던 것은 잘못된 비상계엄을 해제하려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국회로 돌아온 국회의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당한 진압 명령을 거부한 양심적인 군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탱크와 총구를 맨몸으로 막아선 깨어있는 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상계엄의 부당함을 당당하게 알린 언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대통령은 이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법은 만민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사회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그런 조직은 책임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은 신앙인이라면 갖추어야 할 삶의 모습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는 원칙입니다.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기에 방향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상식과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는 희망의 불이 켜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원칙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소중한 것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소중한 것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소중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소중한 것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도 중요합니다. 그것들이 채워줄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중풍 병자를 들것에 옮겨서 예수님께 데리고 간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4명의 이웃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실어서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따뜻한 마음, 이웃에 대한 배려를 보시고 비상계엄처럼 사람의 존엄을 침해했던 중풍을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중풍이라는 비상계엄을 해제해 주셨습니다. 그 이웃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알았고, 실천하였습니다. 그 이웃들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중풍 병자는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이웃들은 중요한 일들이 있었지만 소중한 일을 먼저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025 1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올해는 결심한 것을 끝까지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구급차를 타고, 신앙에 목마른 사람들, 영적인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을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안내하는 따뜻한 이웃이 되면 좋겠습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

 

2025년 가해 연중 제1주간 금요일

마르코 2,1-12  

 

용서하려는 노력이 은총을 받는 지름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며 사람의 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보여주십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권한을 통해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를 치유한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나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구든 자신이 하는 일에 더 큰 이익이 오지 않으면

항상 그렇게 한 일을 후회하게 되어 있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큰 이익이 주어지지 않으면 용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일가족을 다 죽인 유영철을 용서한 고정원 씨는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는 자신이 용서하지 않으면 천국에 있는 자신의 아내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용서하기 위해 매일 밤새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용서의 힘을 주심을 넘어서서 마음의 평화와 기쁨도 주십니다.

용서는 마치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주고 일만 탈렌트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일만 탈렌트가 생기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불과 수백만 원을 탕감해주고 수조 원을 버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는 오랜 자신과의 싸움을 전제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성령의 도우심을 체험하게

되고 그 성령의 힘으로 용서를 넘어서는 큰일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큰일을 한 사람치고 이 용서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성령의 힘으로

병을 치유해주시는 것이 이러한 의미입니다. 

 

존 프랜시스(John Francis)는 1971년 샌프란시스코만에서 발생한 기름 유출 사고를 목격한 후,

환경 파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인간의 무분별한 행동에 대한 분노와 실망을 느꼈습니다. 

 

그는 모터가 달린 교통수단 사용을 중단하고, 걷기를 통해 환경 보호를 실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갈등과 오해를 샀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싸우다가 결국 침묵하기로 합니다.

침묵은 용서를 위한 기초작업입니다. 그 침묵을 그는 무려 17년간을 했습니다. 

 

이러한 침묵의 기간 동안 그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계를 깊이 숙고했습니다.

인간관계도 환경의 일종인데,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 또한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이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17년 동안 침묵하면서 전 미국을 횡단하며 환경학 박사학위까지

땄습니다. 그리고 UN에서 일하며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이제 모두를 용서하고 말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존 프랜시스의 이러한 경험은 용서가 단순히 타인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치유하고

성장시키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책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에서

이러한 내면의 여정과 용서의 중요성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타인을 용서함으로써 환경 운동가로서의 길을 걸었으며,

전 세계에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대목이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중요하고 짧은 기도에 용서라는 작은 주제가

들어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우리가 평생 해나가야 할 것이고 그 용서를 통해

우리의 양식인 성령께서 활동하게 하심을 알고는 얼마나 중요한 주제인지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행동을 주저하는 이유는 용서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해야 먼저 성령께서 들어오시고 행동할 힘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맙시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하지 못 할 일이 없는데, 성령을 얻는 방법에서 용서만큼

완전한 방법은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3. 이영근 신부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 2,5)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말합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마르 2,7)

유다인은 예로부터 죄의 용서를 하느님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습니다(탈출 37,4; 이사 43,25;44,22).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마르 2,10)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마르 2,11-12)

이는 ‘죄를 용서 받은’ 우리들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죄를 용서 받고 치유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제거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인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우리는 당신의 자녀라는 표시로 영광의 그 상처로 지니고 다닙니다.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우리도 그 상처를 축복의 표시로 지니고 다닙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요, 구원의 표지요, 당신 자녀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치유 받았다고 해서, ‘들것’을 버리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들것’에 매여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상처’도 그렇습니다.

치유 받았다고 해서, ‘상처’를 굳이 없앨 필요도, 매여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것’을 들고 다니듯, ‘상처’도 기꺼이 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하느님의 집으로 데려가고 가야 할 일입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 인류를 태워 아버지께로 들고 가셨듯이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서 ‘상처’를 받으시고 바로 그 ‘상처’의 보혈로 우리를 화해시키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들것’입니다. 

그 ‘들것’ 위에는 ‘상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랑의 표지, 용서의 표지’입니다. 

 

그러니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마르 2,11)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당신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듯,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1.16.연중 제1주간 목요일                                                               히브3,7-14 마르1,40-45

                                                         그리스도의 동료로 삽시다

                                                                  “우정의 일치”

 

작금의 시대에 온전한 정신, 온전한 상식으로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똑같은 사실에 대해서도 도저히 화합이나, 융합이 불가능한 양극단의 견해들입니다.

올바른 역사의식, 올바른 시대정신의 결여에서 기인한다 봅니다.

다시 치열한 공부가, 올바른 공부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뜨거운 가슴과 더불어 냉철한 머리도 필수입니다.

요즘 계속 떠나지 않는 말마디는 “애덕의 최고 형태는 정치이다”라는 교황님 말씀입니다.

정말 정치가들이 마음 깊이 담아둬야할 말마디입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우리보다 제3자의 객관적 견해를 들어봄이 유익하겠습니다.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어제 1월14일 윤석열 대통령이 공수처가 법원으로부터 받은

적법한 체포영장에 의해 체포된 것이 대해, “우리는 법치주의에 대한 공동의 약속을 재확인하며,

대한민국과 국민이 헌법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기울인 모든 노력에 감사드린다.”고 밝혔다고

<미국의 소리> 방송은 전합니다. 

 

몸과 맘은 함께 갑니다.

몸을 잘 보살피는 것이, 몸과 맘을 따뜻이, 부드러이 함이 영적삶의 기초에 속합니다.

요즘 독감 감기가 심각합니다.

“과로하지 마라, 체온조절을 잘하라, 찬음식이나 음료를 먹지마라, 코가 아닌 입으로 숨쉬라”는

한의사가 권하는 구체적 처방도 마음에 담습니다.

오늘도 옛 현자의 지혜도 나눕니다. 

 

“나만의 질문을 찾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세상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어른이 된다.”<다산>

“하루하루의 깨달음을 꾸준하게 지속해 나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면 세상 또한 인(仁)을 회복한다.”<논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말이 연상됩니다.

나로부터 시작함이 기본이며 미사와 더불어 시작되는 참회의 “제탓이요, 제탓이요, 저의 큰 탓이 옵니다.”라는

자책(自責)이, 상식의 회복이 절실한 시대(時代)요 시점(時點)입니다.

 

중요한 말마디에는 한자나 영어를 병기합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 말씀을 묵상하던중 제1독서 히브리서중 다음 말마디가 마음에 와 닿았고

강론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영예로운 칭호가 그리스도의 동료입니다.

동료란 말마디를 바꾸어 그리스도의 연인, 그리스도의 협조자, 그리스도의 도반, 그리스도의 벗,

그리스도의 길동무 등 다양한 말마디로 바꿔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러니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온전한 삶의 예수님파로 살기 위해, 평생동료이자 평생 도반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우정이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날로 평생 주님이자 도반이신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바로 히브리서 저자는 고맙게도 그리스도의 동료로 살아가는데 적절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가지지 마라.

그러나 언제나 마음이 빗나간 자들, 그들은 내 길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했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형제 여러분,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처음의 결심을 끝까지 굳건히 지니는 한 그렇습니다.”

 

날마다 영원한 현재의 오늘을 사는, 때로 양극단의 완고한 굳은 마음으로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처방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우리의 처음 결심을 끝까지 한결같이 굳건히 지키는 일이 필수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세 특징을 이어받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친화력, 연민, 부드러움”이라는

덕목을 배우는 일이 절실합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의 겸손하고 간절한 기도요 믿음입니다.

여기서 나병은 온갖 불치의 피부병은 물론 온갖 병을 통칭합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가면서 병마와의 싸움은 필수요 대부분 사람들은 종합병원이 되어 갑니다.

삶의 신비는 죄악의 신비요, 질병들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에 좌절이나 절망할 것이 아니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자는 것입니다. 

 

바로 질병들과 죄악의 신비에 대한 유일한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비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만남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치유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변한 나병환자의 기도와 겸손한 믿음의 결정체같은 고백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삼박자 치유의 구원이, 측은히 여기는 마음, 따뜻한 스킵쉽,

권능의 말씀이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은 가시고 온전히 치유회복되니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완고한 마음의 치유도 뒤따랐음이 분명합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완고함이란 무지의 병입니다.

완고한 마음에 뒤따르는 육신의 병들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야 영육의 온전한 치유임을 깨닫게 되며 이래서 매일미사 은총이 그리도 고마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법치주의자입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초법적인 분이 아닙니다.

사제를 만나 율법에 따른 회복의 절차를 밟은 후, 공동체로의 복귀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치유받은 나병환자는 감격하여 주님을 자랑하는 복음 선포자로 돌변하니 이는 치유받은 자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반응이자 응답입니다. 

 

겸손하고 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즉시 자신의 안식처이자 피신처인

외딴곳에 머물러 자신을 추스립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드니 그리스도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생명이자 빛이심을 입증합니다.

사람이 문제라면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자 도반이자 동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만남이 치유의 구원이요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우정이 우리 삶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우정의 일치를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아멘.


1/17(금) [(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우리는 중풍 병자를 들것에 옮겨서 예수님께 데리고 간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4명의 이웃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실어서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따뜻한 마음, 이웃에 대한 배려를 보시고 비상계엄처럼 사람의 존엄을 침해했던 중풍을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중풍이라는 비상계엄을 해제해 주셨습니다. 그 이웃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알았고, 실천하였습니다. 그 이웃들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중풍 병자는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이웃들은 중요한 일들이 있었지만 소중한 일을 먼저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조재형 신부)

 

2. 용서는 우리가 평생 해나가야 할 것이고 그 용서를 통해

우리의 양식인 성령께서 활동하게 하심을 알고는 얼마나 중요한 주제인지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마르 2,11)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당신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듯,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은 가시고 온전히 치유회복되니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완고한 마음의 치유도 뒤따랐음이 분명합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완고함이란 무지의 병입니다.

완고한 마음에 뒤따르는 육신의 병들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야 영육의 온전한 치유임을 깨닫게 되며 이래서 매일미사 은총이 그리도 고마운 것입니다.

(이수철 신부)

 

1/17(금) [(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17일차 기도

 

복음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마르 2,11)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당신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듯,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1월17일(금) 7시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