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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6월 10일 화요일[(녹) 연중 제10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6월 10일 화요일[(녹) 연중 제10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27(26),1-2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적 나의 원수, 그들은 비틀거리리라.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예!”도 되시면서 “아니요!”도 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는 늘“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1,18-22
형제 여러분, 18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걸고 말하는데,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 하면서 “아니요!” 하는 것이 아닙니다.
19 우리 곧 나와 실바누스와 티모테오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도 되시면서 “아니요!”도 되시는 분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20 하느님의 그 많은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아멘!”합니다.
21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세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22 하느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9(118),129.130.131.132.133.135(◎ 135ㄱ 참조)
◎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소서.
○ 당신의 법 하도 놀라워, 제 영혼 그 법을 따르나이다. ◎
○ 당신 말씀 밝히시면 그 빛으로, 미련한 이들이 깨치나이다. ◎
○ 당신 계명을 열망하기에, 저는 입을 벌리고 헐떡이나이다. ◎
○ 당신 이름을 사랑하는 이에게 약속하신 대로, 저를 돌아보시고 자비를 베푸소서. ◎
○ 당신 말씀대로 제 발걸음을 굳건히 하시고, 어떠한 불의도 저를 짓누르지 못하게 하소서. ◎
○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시고,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쳐 주소서. ◎

복음 환호송

마태 5,16 참조
◎ 알렐루야.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제사를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바치는 예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저희가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8(17),3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 저의 하느님, 이 몸 숨는 저의 바위시옵니다.
<또는>
1요한 4,16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 병을 고쳐 주시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를 온갖 죄악에서 자비로이 지켜 주시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북미주 사제 모임에서 ‘1.5 세대 신부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1세대는 어른이 돼서 이민 온 사람을 말합니다. 1.5 세대는 학생 때 이민 온 사람을 말합니다. 2세대는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을 말합니다. 1.5 세대는 1세대가 볼 때는 한국말이 조금 서투르고, 2세대의 눈에는 영어도 서투르게 보인다고 합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1.5 세대는 한국말 하는 세대와도 소통이 가능하고, 영어를 하는 세대와도 소통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부님은 미국 공동체에서도 사목했고, 한국 공동체에서도 사목하였다고 합니다. 미국 공동체는 사제가 강론을 잘 준비하고, 교우들에게 친절하면 좋아한다고 합니다. 사제에 대한 존중이 있다고 합니다. 사제가 떠날 때는 기립박수도 한다고 합니다. 사제의 영어가 조금 서툴러도 문제 삼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국 공동체는 사제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고 합니다. 강론 준비를 잘하고, 친절할 뿐 아니라, 더 많은 걸 함께 하길 바란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온 사제는 5년 정도 있다가 돌아가기에 미처 알 수 없는 부분을 1.5세 사제는 현지에서 계속 사목하기에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사목에서 중요한 것은 정체성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문화의 차이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언어의 소통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1세대도, 1.5세대도, 2세대도 모두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의 목소리를 잘 알고, 양들은 예수님을 따랐듯이 사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길을 충실히 따를 때 교우들은 사제를 존중하고, 문제가 있어도 함께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60여 명 나오는 공동체에서도 3 6개월 있었습니다. 지금은 800명 넘게 나오는 공동체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사제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하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합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셨듯이, 사제가 교우들과 동행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먼저 말하기 전에 듣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잘 듣고, 동행하면 엉켜 있던 문제가 해결되는 걸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할 때면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도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을 기억합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렸던 베로니카를 기억합니다.

 

본당에서 그런 분을 보았습니다. 작년 이맘때입니다. 형제님들이 구슬땀을 흘리면서 창고 공사를 했습니다. 땅을 파고,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만들었습니다. 청년들은 창고 벽에 아름다운 벽화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창고 공사를 통해서 많은 봉사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형제님들은 창고 공사를 마친 후에 목수회를 만들었습니다. 목수회는 본당 에어컨 필터 교체 작업도 했고, 세례대의 누수도 고쳤습니다. 제의실의 옷장도 만들었습니다. 회의실의 탁자도 만들었습니다. 성전의 고장난 전구 교체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인류를 구원할 큰 업적을 남기는 것일 수도 있고, 사업에 성공해서 큰 재물을 얻는 것일 수도 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남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다면 그것도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살고, 주어진 일에 감사드리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면 그 또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최 민순 신부님의 아름다운 시 두메 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해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오늘 내가 걸어온 길이 신앙인으로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가 걸어온 그 길로 다른 사람들도 기쁜 마음으로 따라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그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을 수 있도록 하십시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복음마태 5,13-16

 

세파에 지친 나그네를 따뜻이 환대하는 우리 교회!

 

각종 진귀한 예술품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고색창연한 유럽의 대성당들을 방문하며 감탄이 저절로 흘러나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많은 성당들은 그저 수많은 관광객들이 스쳐 지나가는 관광지이지, 주님의 은혜로운 복음이 우렁차게 선포되는 장소가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주일 대미사가 거행되는데, 미사 참례자 수는 손을 꼽을 정도였습니다.

 

이제 조만간 우리 한국 교회에 닥쳐올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나마 유럽 교회는 성당 여기 저기 설치된 성화며 값진 예술품으로 관광객들을 끌어모을 수 있지만,

우리 성당들은 그럴 상황도 아니니, 참으로 암담할 뿐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던지시는 말씀 한 마디가 더욱 가슴을 찌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오늘 우리 교회를 바라보면 제맛을 잃어버린 소금 같은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됫박으로 덮어버린 등경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저만 그런 건가요?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지나친 폐쇄성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녀야 할 가장 근본적인 속성은 순례성, 개방성, 유연성, 연대성...이런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어떤 성당은 세상과의 경계가 되는 담을 너무 높게 쌓아 올렸습니다.

어떤 성당은 마치 대단한 성채, 단단한 철옹성 같아서 감히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어떤 성당은 그 구성원들이 다들 뭐가 그리도 바쁜지 찾아온 나그네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교회의 문턱이 너무 높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지상의 나그네를 환대하는 집이 교회가 아닐까요?

목말라하는 나그네에게 시원한 물 한잔과 쉼터를 제공하는 곳이 교회가 아닐까요?

세상과의 전투에서 상처 입은 부상병들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야전병원이나 응급실이 교회가 아닐까요?

사회적 약자들과 날개가 부러진 사람들과 기가 꺾인 사람들이 원 없이 에너지를 충전시킬 수 있는 기쁨과

희망의 에너지 충전소가 교회가 아닐까요?

 

우리 모두 고립되고 폐쇄된 교회에서 빨리 걸어 나와야겠습니다.

더 이상 우리만의 교회, 끼리끼리 교회를 고집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세상의 현실에 무관심했던 지난날을 가슴 쳐야겠습니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교회, 그 누구든 스스럼없이 찾아올 수 있는 열린 교회,

산 위의 등불 같은 우리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좀 더 매력적인 교회로 탈바꿈하기 위한 고민과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젊은이들의 발걸음을 교회로 돌아오게 할 수 있겠는지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출처 - 살레시오회 내리피정 센터이야기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복음마태 5,13-16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비추는 ‘빛의 자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의 신원과 사명을 밝히십니다.
곧 우리의 신원과 사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이 말씀은 쌍날칼이 되어 우리의 가슴을 찌릅니다. 

내가 하는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할까?

혹 욕하지는 않을까?


내 행동이 진정 하느님을 향하여 있는가?
아니면, 내 자신을 향하여 있는가?


내 행실은 사람들 앞을 비추고 있는 빛인가?
아니면, 뒤에서 궁시렁대며 불평하는 어둠인가?


그런데 대체 왜 우리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는 말씀이 밝혀주듯이,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인 까닭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하신 그 사랑 때문이요, 이미 우리가 그 사랑을 먹은 아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행하느냐?’보다 ‘어디를 향하여, 그리고 어떻게 행하느냐? 에 대한 문제입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자신을 ‘소금처럼 녹아들고’ ‘불처럼 태우되’, 그것을 ‘세상이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신원을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마태 5,13-14)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는 우리의 신원이 ‘세상을 향하여’ 있는 존재임과 동시에 우리의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세상’이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비추는 빛이요, ‘세상 안에서’ 녹는 소금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세상 안에서 자신을 ‘녹여’ ‘세상’의 부패와 불의를 막고 하늘의 맛을 내는 ‘소금’이요, 자신을 ‘태워’ ‘세상’을 비추어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문헌인 <디오그네투스에게>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세상 안에 살되 세상과는 다른 삶’, 세상에 살되 세속 정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 세상과 결별하고서 피안(彼岸)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에 살되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비추는 이들이요, 단지 어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막아내고, 빛을 비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이끌어 가는 이들임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의 사명이 ‘세상’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이 세상을 비출 수 있는 '빛'인 것은 아닙니다.

단지 '빛의 자녀'(요한 12,36; 에페 5,8)로서 빛이신 분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 사명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헌장>(Lumen Gentium)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인류의 빛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비추는 ‘빛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여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마태 5,16)


주님!
제게서 착한 행실의 빛이 타오르고, 세상이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소서
제가 타오를 수 있음은 제 안에 당신의 심지를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불을 붙이시어 제 심지를 태우소서.
영의 바람을 일으키시어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제 몸뚱아리를 녹이고서야 빛이 되어 밝힐 수 있기에, 부서지고 사라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6.9.월요일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창세3,9-15.20 요한19,25-34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마리아

“자모(慈母)이신 성 교회”

 

"주님, 당신의 종 위에,

 당신의 얼굴을 빛내어 주소서."(시편31,17ㄱ)

 

어제 뽑은 성령 칠은 중, “공경(恭敬;받듦, 하느님을 참 아버지로 알아 사랑받게 하는 은혜)”이란 덕목이 생각납니다.

‘참 아버지’ 대신 ‘참 어머니’로 대체해도 별 문제가 없다 싶습니다.

출신 학교를 모교(母校)라 하고 출신 나라를 모국(母國)이라 부르니

‘어머니 하느님’이라 불러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교회 역시 자모(慈母)이신 교회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때쯤이면 20년전 2005년 6월14일 돌아가신 모친 신 마리아도 생각납니다.

요즘 애기똥풀꽃들에 이어 개망초가 한창입니다.

아주 예전 28년전 자작시 개망초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6월 때되면 피어나는 개망초들입니다.

 

“어느새

 훌쩍 큰 개망초

 

 사무친

 그리움은

 

 하얀 꽃으로

 피어나고

 

 키를 훌쩍 

 자라게 했나 보다”<1997.6.5.>

 

어머니에 대한, 고향에 대한, 교회에 대한, 나라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은,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인간 존재의 하느님을 향한

원초적 그리움을 반영한다 싶습니다.

바로 개망초 시를 통해 이런 정서를 표현한 것입니다.

오죽하면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시가 나왔겠는지요.

 

요즘 주변분들과 자주 나누는 이야기 소재는 대한민국 자연환경의 아름다움입니다.

말그대로 보석같은 진주같은 하느님이 보우하사 삼천리 금수강산 대한민국입니다.

특히 올해 5월, 6월은 신록에 꽃도 새도 많은 계절이라 참 아름다운 ‘어머니 나라’ 같다는 생각을 나누기도 합니다.

오늘 옛 현자 <다산>의 말씀도 인격화된 자모이신 교회의 지혜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수천 년을 견뎌온 고전은 평생을 두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육경이나 여러 성현의 글을 모두 읽어야 하겠지만 <논어>만은 평생 읽기를 바란다.”

 

물론 신자들이 평생 읽어야 할 으뜸은 책은 성서입니다.

새벽 인터넷 교황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마음에 와닿은 제목의 레오 교황님 말씀 역시

자모이신 교회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보는 순간 마음에 와닿은 제목의 말마디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내적 쇠사슬을 부숴버리고 우리를 변형시킵니다.”

(The Spirit shatters our inner chains and transforms us)

“하느님은 모두가 하나로 살기를 바라십니다.”

(God intends all to live as one)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이 기념일은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의 뜻에 따라 2018년 3월13일 교황청 경신성사성의

“교회의 어머니” 교령이 발표된 후 교회의 모성애와 진정한 마리아 신심의 성장을 증진하기 위하여

성령강림대축일 다음 월요일에 지내도록 했습니다.

참 의미심장하고 시의적절한 기념일입니다.

 

오늘 말씀인 창세기와 요한복음도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를 잘 이해하는데 좋은 도움이 됩니다.

창세기의 악마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었던 하와와 그 남편인 아담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복음의 마리아와

그 아들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오늘 아침기도 즈가리야의 노래 후렴이 이를 잘 요약합니다.

 

"하와로 말미암아 닫혀진 낙원문이,

 동정 마리아를 통해 열렸도다."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불순종의 하와와 아담과는 반대로, 순종과 섬김, 겸손과 온유의 새하와라 칭하는 성모님,

새아담이라 칭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는 예수 아드님처럼 비움의 절정인 마리아 성모님이 계시고

그 옆에는 모든 신자들을 대변하는 신자의 모범인 애제자 요한이 있습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우리 믿는 이들 하나하나가 애제자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 성모님을 믿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로, 바로 교회의 어머니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예수님과 그 아래 우리 곁에 있는 마리아 성모님은 우리의 영원한 사랑이자 운명이 됩니다.

요한처럼 애제자의 신분인 우리들이라면 십자가 예수님의 마지막 화두와 같은 임종어도

늘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목마르다.”

“다 이루어졌다.”

 

참으로 마리아 성모님의 모성애를 닮은 교회요 우리 신자들이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2018년 5월21일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기념미사를 봉헌할 때 교황님 강론이 공감이 가고 저절로 웃음짓게 합니다.

중요한 내용을 인용하여 나눕니다.

 

“‘교회는 여성적이다,’ ‘교회는 어머니다.’ 교회의 이런 정체성이 상실되면,

교회는 ‘하나의 자선단체나 축구팀’이 되고 맙니다.

남성적인 교회가 될 때, 슬프게도 사랑할 수도 없고 출산할 수도 없는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노총각들의 교회가 되고 맙니다. 

 

교회가 여성이고, 신부요 어머니인 이러한 태도를 지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성없이 교회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여성적인 태도는, 교회의 모성애는 마리아 성모님에게서 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원하셨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어머니입니다.

침묵할 줄 알고, 연민 가득한 눈길로, 조용하게 어루만져주는, 수많은 지혜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어머니입니다.

또한 사랑이 넘치며 웃음을 머금고, 따뜻한 애정과 부드러운 온유의 사랑으로서,

어머니의 길을 똑같이 걸어가야 하는 교회임을 자각하면서, 자모이신 교회에 속한 자녀들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지의 감동적인 내용들입니다.

그러니 자모이신 교회요 우리가 온유하고 겸손하신 자모이신 마리아 성모님을 닮아갈 때 저절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교회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사랑하여 닮아가게 합니다.

 

"주님께 바라는 너희가 모두,

 굳세게 굳세게 마음들을 가져라."(시편31,25).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요셉수도원


6/10(화) [(녹)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사제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하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합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셨듯이, 사제가 교우들과 동행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먼저 말하기 전에 듣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잘 듣고, 동행하면 엉켜 있던 문제가 해결되는 걸 보았습니다.

 

오늘, 최 민순 신부님의 아름다운 시 두메 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해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오늘 내가 걸어온 길이 신앙인으로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가 걸어온 그 길로 다른 사람들도 기쁜 마음으로 따라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그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을 수 있도록 하십시오.”(조재형 신부)

 

2.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지나친 폐쇄성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녀야 할 가장 근본적인 속성은 순례성, 개방성, 유연성, 연대성...이런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어떤 성당은 세상과의 경계가 되는 담을 너무 높게 쌓아 올렸습니다.

어떤 성당은 마치 대단한 성채, 단단한 철옹성 같아서 감히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어떤 성당은 그 구성원들이 다들 뭐가 그리도 바쁜지 찾아온 나그네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교회의 문턱이 너무 높습니다.

 

우리 모두 고립되고 폐쇄된 교회에서 빨리 걸어 나와야겠습니다.

더 이상 우리만의 교회, 끼리끼리 교회를 고집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세상의 현실에 무관심했던 지난날을 가슴 쳐야겠습니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교회, 그 누구든 스스럼없이 찾아올 수 있는 열린 교회,

산 위의 등불 같은 우리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좀 더 매력적인 교회로 탈바꿈하기 위한 고민과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젊은이들의 발걸음을 교회로 돌아오게 할 수 있겠는지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양승국 신부)

 

3. 초대 교회의 문헌인 <디오그네투스에게>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세상 안에 살되 세상과는 다른 삶’, 세상에 살되 세속 정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 세상과 결별하고서 피안(彼岸)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에 살되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비추는 이들이요, 단지 어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막아내고, 빛을 비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이끌어 가는 이들임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의 사명이 ‘세상’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마태 5,16)

주님!
제게서 착한 행실의 빛이 타오르고, 세상이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소서
제가 타오를 수 있음은 제 안에 당신의 심지를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불을 붙이시어 제 심지를 태우소서.
영의 바람을 일으키시어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제 몸뚱아리를 녹이고서야 빛이 되어 밝힐 수 있기에, 부서지고 사라지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2018년 5월21일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기념미사를 봉헌할 때 교황님 강론이 공감이 가고 저절로 웃음짓게 합니다.

중요한 내용을 인용하여 나눕니다.

 

“‘교회는 여성적이다,’ ‘교회는 어머니다.’ 교회의 이런 정체성이 상실되면,

교회는 ‘하나의 자선단체나 축구팀’이 되고 맙니다.

남성적인 교회가 될 때, 슬프게도 사랑할 수도 없고 출산할 수도 없는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노총각들의 교회가 되고 맙니다. 

 

교회가 여성이고, 신부요 어머니인 이러한 태도를 지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성없이 교회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여성적인 태도는, 교회의 모성애는 마리아 성모님에게서 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원하셨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어머니입니다.

침묵할 줄 알고, 연민 가득한 눈길로, 조용하게 어루만져주는, 수많은 지혜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어머니입니다.

또한 사랑이 넘치며 웃음을 머금고, 따뜻한 애정과 부드러운 온유의 사랑으로서,

어머니의 길을 똑같이 걸어가야 하는 교회임을 자각하면서, 자모이신 교회에 속한 자녀들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지의 감동적인 내용들입니다.

그러니 자모이신 교회요 우리가 온유하고 겸손하신 자모이신 마리아 성모님을 닮아갈 때 저절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6/10(화) [(녹)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마태 5,16)

주님!
제게서 착한 행실의 빛이 타오르고, 세상이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소서
제가 타오를 수 있음은 제 안에 당신의 심지를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불을 붙이시어 제 심지를 태우소서.
영의 바람을 일으키시어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제 몸뚱아리를 녹이고서야 빛이 되어 밝힐 수 있기에, 부서지고 사라지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6월10일(화) 3시3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