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6월 11일 수요일[(홍)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이 성인은 복되어라. 사도들의 대열에 든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고 착한 사람이었네.
본기도
믿음과 성령으로 가득 찬 복된 바르나바를 뽑으시어
여러 민족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게 하셨으니
그가 굳은 신념으로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희도 말과 행동으로 충실히 선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1,21ㄴ-26; 13,1-3
그 무렵 21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23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24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5 그 뒤에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3,1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르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메온, 키레네 사람 루키오스,
헤로데 영주의 어린 시절 친구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다.
2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3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 비파 타며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에 가락 맞춰 노래 불러라. 쇠 나팔 뿔 나팔 소리에 맞춰,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환성 올려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복된 바르나바가 주님 사랑으로
여러 민족들에게 복음의 빛을 전하게 하셨으니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에 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시어
저희 마음도 그 사랑의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 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으리라.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복된 바르나바 사도를 기념하며
영원한 생명의 보증을 받고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믿음으로 거행한 신비를 하늘 나라에서 직접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시카고 사제 모임에서 매일 현지 한인 성당 공동체와 미사를 했습니다. 각 본당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랐습니다. 어떤 본당은 기도와 영성의 깊이가 느껴졌고, 어떤 본당은 친교와 나눔의 따뜻함이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분위기는 대개 그 본당에 있는 신부님의 삶의 방식과 사목 방향과도 닮아 있었습니다. 어느 본당은 미사 30분 전부터 교우들이 모여 묵주기도를 드렸습니다. 제의실도 깔끔했습니다. 전례와 관련된 책도 잘 정리되고 있었습니다. 성작과 성합도 서랍장에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조용히 기도하는 분위기 속에 성령의 숨결이 느껴졌습니다. 반면 다른 본당은 음악과 친교의 열정이 넘쳤습니다. 평일 미사임에도 성가대가 반주하며 함께 노래했고, 미사 후에는 교우들과 신부님이 자연스럽게 식사하며 ‘노래방’까지 하며 즐겁게 지냈습니다.
이 두 본당을 바라보면서 오늘 기념하는 성 바르나바 사도의 삶이 떠올랐습니다. 사도행전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라고 전합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많이 하였습니다. 이분들의 땀과 노력이 열매를 맺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유대인의 회당이 아닌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교회는 고속도로의 휴게소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운전하다가 고속도로의 휴게소에서 잠시 쉬기도 합니다. 간식을 먹기도 하고, 차에 기름을 넣기도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휴게소는 시설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우선 깨끗하고, 음식도 맛이 있고,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었습니다. 아무리 고속도로의 휴게소가 좋아도 그곳에서 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금 목적지를 향해서 떠나게 됩니다. 인생이라는 고속도로에 많은 휴게소가 있습니다. 사찰, 회당, 사원, 교회들이 있습니다. 각 종교는 저마다 삶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인생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영원한 삶을 이야기합니다.
가톨릭교회는 2000년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사’를 통해서 신자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된 우리는 모두 ‘사도직’에 불리었다고 표현합니다. 사도들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충실하게 따랐던 것처럼 우리도 삶을 통해서 주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켜나가야 하는 사명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도직은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언직입니다. 예언직이란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아야 하고,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는 많은 예언자가 나옵니다. 둘째는 제사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전에서 봉헌되었고, 성전에서 가르쳤으며,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전례에 함께 하면서 신앙의 샘에서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셋째는 봉사직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을 주고,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주고, 묶인 이들에게 해방을 알려 주는 일,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걸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신 말씀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신앙인들은 교회를 통해서 삶의 위로를 받고, 새로운 길을 향해서 나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마태오 10,7-13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평화로 평화를 얻는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지혜로운 노신사가 정년퇴직을 한 뒤 고등학교 근처에 작은 집을 구입했습니다. 처음 이삼 주 동안 그는 평화와 만족감 속에서 은퇴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신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다음 날 오후, 세 명의 학생이 방과 후에 젊음의 에너지로 가득 차서 거리로 내려왔습니다. 그들은 길가에 세워 둔 휴지통들을 신나게 걷어차기 시작했습니다. 날마다 그 와장창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노신사는 뭔가 조치를 취할 때가 됐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튿날 오후. 노신사는 거리로 나가 여전히 쓰레기통을 빵빵 차며 걸어오는 어린 소음꾼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을 멈춰 세우고서 노신사는 말했습니다. “너희들 정말 재밌게 노는구나. 너희들이 그처럼 기운 넘치는 걸 보니 나도 기쁘다. 나도 너희 만한 나이였을 때 그렇게 놀곤 했었지. 내 부탁을 들어주겠니? 날마다 여기로 와서 계속 휴지통을 두들겨 패 준다면 너희들 각자에게 1달러씩을 주마.” 신이 난 학생들은 방과 후마다 그곳으로 와서 어김없이 쓰레기통에 발길질을 퍼부었습니다. 며칠 뒤 노신사가 다시 학생들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얼굴에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놀이가 내 생활비에 큰 타격을 주고 있구나. 더 주고 싶지만 이제부턴 너희들에게 쓰레기통을 차는 대가로 50센트밖에 줄 수가 없다.” 소음꾼들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노신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방과 후의 소동을 계속했습니다. 며칠 뒤 이 지혜 많은 노신사는 다시 학생들을 기다렸다가 말했습니다. “얘들아, 난 아직 사회보장 연금을 받지 못하고 있어, 그러니 이제부턴 너희들에게 25센트씩밖에 줄 수 없구나. 너희들도 이해하겠지?” 그러자 학생들 중의 대장 격인 친구가 소리쳤습니다 “코 묻은 25센트를 받으라고요? 고작 동전 하나를 받기 위해 우리더러 날마다 시간을 낭비하며 쓰레기통을 걷어차란 말예요? 정말 제정신이 아니시군요. 우린 그만두겠어요.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어요.” 그리하여 노신사는 생애 마지막 날까지 평화와 정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만약 노신사가 자신의 평화를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걷어차는 아이들에게 윽박질렀다면 평화를 찾을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 아이들이 더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노신사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평화를 빌어주라고 합니다. 그래야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평화롭고, 또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평화가 자신에게 돌아와 또 평화롭다고 하십니다. 평화를 얻는 방법은 평화를 주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증오와 보복으로 자신의 평화를 얻으려고 합니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이 미움인데 어떻게 사랑으로 가득차고 평화로 돌아오기를 바라겠습니까? 테러리스트들을 섬멸하기 위하여 전쟁을 수차례씩이나 했다고 해서 테러리스트들이 줄어들었겠습니까? 지금 그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더 큰 테러를 준비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내가 주는 것으로 내가 가득차고, 내가 주는 것이 되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성 프란체스코가 어느날 제자 리오에게 말했습니다. “설사 자네가 소경을 보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게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더라도 그것은 결코 완전한 기쁨일 수 없네. 설사 자네가 모든 외국어에 정통하고 성서를 깊이 이해하고 예언을 할 수 있어도 그것은 결코 완전한 기쁨일 수 없네. 설사 자네가 천사처럼 말하고 모든 식물과 동물에 대해 잘 알고 인간의 특징을 모조리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완전한 기쁨일 수 없네. 그리고 설사 자네가 모든 불신자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완전한 기쁨일 수 없네.” 여기까지 들은 리오는 어리둥절하여 물었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 완전한 기쁨인가요?” “그건 비가 내리는 싸늘한 날에 자네가 비에 흠뻑 젖어 굶주린 창자를 안고 수도원에 와서 문을 두드렸을 때 수도자인 접수계의 사람이 화가 나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묻기에 자네가 ‘나는 형제요’ 하고 대답하자 ‘당신은 게으름뱅이요, 여기서 나가 줘요’ 하는 말을 듣고도 자네가 불평하지 않고 참는다면 그건 완전한 기쁨이지. 상대방이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을 때 그가 밖에 나와 당신에게 욕하면서 당신을 쫓아내어도 참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완전한 기쁨이지.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리면서 문을 두드렸을 때 상대방이 나타나 자네를 진창 속에 쓰러뜨리고 몽둥이로 때려도 그 고통을 예수님처럼 받아들인다면 그건 완전한 기쁨이지.” 프란치스코는 내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조차도 저항하지 않고 평화로 대하면 그 평화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기쁨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그 기쁨은 소멸되지 않고 나에게로 다시 돌아옵니다. 기쁨과 평화를 얻는 방법은 누구를 만나든 기쁨과 평화로 대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왼 뺨을 때리면 오른 뺨도 가져다 대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남에게 공격을 받았다고 발끈하지 맙시다.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하지 말고, 항상 선으로 돌려줍시다. 예수님도 내가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해 주라고 하십니다. 내가 주려고 하는 것이 결국에는 나에게로 되돌아와 나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
3. 이영근 신부님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마태오 10,7-13
<예수님께서는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분부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마태 10,7)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례없는 위대한 직무를 받았습니다.
전혀 새롭고 놀라운 직무와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감히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무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지상에서의 일시적 약속에 대한 것들을 선포했을 뿐이었지만, 제자들에게는 바로 '하늘 나라'를 선포하라는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 어떤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특별한 능력이 있던 이들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지상의 약속에 대한 직무를 받았을 때마저 망설이고 꺼려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이나 박해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오히려 지극한 열정으로 그 직무를 다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바르나바 사도도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서 그들은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그러할 ‘권능’이 함께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하늘 나라가 주어졌고, 하늘 나라를 선포할 힘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받아서 가진 것을 주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것', 그것은 그들이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받아서 가지게 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애로, 거저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먼저 그것을 주신 분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만 합니다.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아무 것이나 주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결코 우리가 만든 그 어떤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만약 실제로 받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한다면, 그것은 거짓 선포요,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포해야 할 나라는 우리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그분이 주신 '하늘 나라'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마태 10 9)
주님!
길을 떠나면서 아무 것도 가지고 갈 필요가 없음은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더 이상은 제 말로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제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제 무능과 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6.10.연중 제10주간 화요일
2코린1,18-22 마태5,13-16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참행복한 삶”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소서."(시편119,135ㄱ)
어제는 늦췄던 봄소품이 있었습니다.
열두명의 수도형제들과 두분의 손님 신부 전부 열네분이 강원도 홍천에 다녀왔습니다.
소풍 내용도 나이와 취향을 고려하여 다양하게 배려했습니다.
오후 1시까지 세팀으로 나뉘어 저를 포함한 한팀은 공작산 수타사 절과 생태숲을 방문하여 산소길도 걸었고,
한팀은 홍천강에서의 래프팅을, 한팀은 홍천 온천원탕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사님들은 ‘육신의 때’를 씻었고 우리는 ‘영혼의 때’를 씻었네요.”
공작산 수타사를 방문했던 제가 온천을 다녀온 형제에게 던진 덕담이었지만 영육은 하나이기에
양쪽 다 좋은 정화의 시간이었음을 믿습니다.
오후 1시에 합류하여 열네 형제들이 <홍천 제일 숯불 닭갈비> 집에서 함께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정말 주님 안에서 한가족, 한형제들임을 확인하는 공동체 소풍체험이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한팀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어요!”
원장수사의 탄성같은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천차만별의 복장에 외모도 정말 달랐습니다.
정말 하느님 중심의 다양한 일치 수도공동체임을, 하느님 중심이 없다면 애당초 성립 불가능한
수도 공동체임을 실감했습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공동체를 부요하고 풍요롭게 하는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하나하나 귀하고 고유한 존재 자체가 공동체 세상의 소금과 빛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2부 성령강림대축일 행사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주일 성령강림대축일에 이은 월요일 소풍이었으니 그대로 성령강림대축일 제2부 소풍에
닭갈비 성찬과 같은 점심식사시간이었습니다.
모두가 성령 가득한 싱그러운 모습들이었습니다.
새삼 하나하나가 공동체 고유의 소금과 빛과 같은 귀하고 고유한 존재들임을 확인했습니다.
이어 방문한 곳은 “홍천 수제 맥주학교 농담 브루어리”였고 여기서 주인의 설명도 들으면서 후한 대접에
손수 만든 수제맥주를 한껏 마시며 즐겼습니다.
차량이동시 많은 대화도 나눴고 저녁식사는 수도원 가까이 있는 별내 신도시에 소재한 “샤브올데이”에서
풍요한 시간을 갖고 일찍 귀가했습니다.
수도형제들로부터 많은 것을, 특히 내 자신의 한계와 부족을 많이 배운, “겸손을 공부”한 “겸손의 학교”같은
하루의 소풍이었습니다.
공동체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가는 ‘코스모스’같은 일상에서 때로는 재충전의 ‘카오스’와 같은
소풍의 필요성도 새삼 절감했습니다.
컴퓨터가 작동치 않을 때 껐다 키면 원활하게 작동하듯 때로 멈춰 관상과 놀이의 시간을 가질 때 원활한 삶입니다.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는 시편 성구도 생각났고 “멈추면 보이고 들린다”는 말마디도 생각났습니다.
어제부터 파스카 축제의 이벤트도 끝나고 다시 시작된 평범한 일상의 연중시기, 오늘 복음도 아주 적절합니다.
그 유명한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산상설교중 “참행복”의 진복팔단에 이어,
이제부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라는 복음입니다.
믿는 이들의 영예스럽고 빛나는 신원입니다.
단숨에 읽히는 복음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세상에 속화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하는 세상의 소금같은, 빛같은 존재로 살라는 것입니다.
정말 맛이간 인생이라면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음식은 맛이가면 버릴 수 있지만 사람은 맛이가며 버릴수도 없습니다.
1년 농사는 실패하면 다음해를 기약할 수 있지만 사람 농사는 평생 농사라 하루하루 회개를 통한
치열한 삶이 필수요 이래야 맛이 가지 않은 세상의 소금과 같은 삶이겠습니다.
세상의 소금입니다.
세상을 떠난, 세상과 격리된 소금같은 존재라면 역시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소금처럼 자기는 녹아 사라지면서 공동체는 물론 자신의 삶에서 부패를 막아주고 맛을 내게 하는 방부제와
조미료와 같은 소금같은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과연 주변을 비추는 세상의 빛으로서의 삶인지요?
세상의 어둠이 아니라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세상의 빛, 공동체의 빛으로서의 삶인지 묻습니다.
말그대로 주님을 반사하여 주변을 환히 밝히는 주님의 빛, 세상의 빛으로서의 삶입니다.
복음의 결론 말씀이 더욱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의욕을 북돋웁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말이 아니라 착한 행실을 통한 언행일치의 삶자체로, 존재자체로 입증되고 검증되는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착한 삶과 말과 글이 일치를 이룰 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이요 감동을 선사하며
하느님께 찬양이, 영광이 되는 삶입니다.
어떻게?
바로 산상설교의 내용을 구체적 현장에서 살아가는 것이요, 바로 오늘 복음 앞부분의 참행복을 사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참행복의 사람들이자 동시에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이니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바로 사도 바오로가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할 것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을 닮아 단호히 결연히 한결같이 “예!”와 “아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하면서 ‘아니요!’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는 ‘예!’도 되시면서 ‘아니요!’도 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을 통해서 ‘아멘!’합니다.”
한마디로 정직하고 진실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와 ‘아멘!’의 삶”을, “찬양과 감사의 삶”을 살 때 역시 참행복한 삶에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의 실현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한결같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참행복한 삶을,
예수님처럼 “예!”와 “아멘!”의 참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네 앞길 주께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이 해 주시리라."(시편37,5).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요셉수도원
6/11(수) [(홍)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우리는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신 말씀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신앙인들은 교회를 통해서 삶의 위로를 받고, 새로운 길을 향해서 나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조재형 신부)
2. 프란치스코는 내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조차도 저항하지 않고 평화로 대하면
그 평화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기쁨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그 기쁨은 소멸되지 않고 나에게로 다시 돌아옵니다.
기쁨과 평화를 얻는 방법은 누구를 만나든 기쁨과 평화로 대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왼 뺨을 때리면 오른 뺨도 가져다 대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남에게 공격을 받았다고 발끈하지 맙시다.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하지 말고, 항상 선으로 돌려줍시다.
예수님도 내가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해 주라고 하십니다.
내가 주려고 하는 것이 결국에는 나에게로 되돌아와 나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마태 10 9)
주님!
길을 떠나면서 아무 것도 가지고 갈 필요가 없음은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더 이상은 제 말로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제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제 무능과 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4. 세상에 속화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하는 세상의 소금같은, 빛같은 존재로 살라는 것입니다.
정말 맛이간 인생이라면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음식은 맛이가면 버릴 수 있지만 사람은 맛이가며 버릴수도 없습니다.
1년 농사는 실패하면 다음해를 기약할 수 있지만 사람 농사는 평생 농사라 하루하루 회개를 통한
치열한 삶이 필수요 이래야 맛이 가지 않은 세상의 소금과 같은 삶이겠습니다.
(이수철 신부)
6/11(수) [(홍)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오늘의 기도
복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오늘의 말 · 샘 기도>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마태 10 9)
주님!
길을 떠나면서 아무 것도 가지고 갈 필요가 없음은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더 이상은 제 말로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제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제 무능과 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 2025년 6월11일(수) 5시5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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