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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글·자녀교육·시사

[230203 글/시]평온한 마음(안젤름 그륀)/당신의 뜰/퇴계난택(退溪難擇)

[2023년 2월3일(금)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오늘의 글/시]

 

평온한 마음에 대하여...


“제가 마땅히 할 바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사부가 말했다.

“자네의 의로움을 믿지 말고,
일단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며 자네의 혀와
위를 다스리게.”
(금언집6)


안토니오는 여기서 매우 명확하게
우리가 삶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우리는 자신의 정당함을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신심이나
수덕생활을 너무 대단히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의롭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여전히 우리이다.
우리는 우리를 다른 사람 위에 올려
내 세우지 말고 그저 자신의 길을
가기만하면 된다.


우리들은 모든 상처를 다 들추어내어
치유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현 시점 에서
나를 강하게 만드시기 위해
오늘 내게 그분의 성령을 보내주신다.


나는 내 과거의 짐들을 먼저
없애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 상처들을 주시하고 그것들을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한다.


참고한 글 "사막을 통한 생명의 길"
-안젤름 그륀 신부-

 

곤줄박이

당신의 뜰


착한 목자이신 주님,
제 길을 인도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제가 언제나 당신 뜰 안에서

살게 하소서!

당신에게서 멀어지려할 때
당신 목소리 알아듣고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소서!

당신의 빛을 잊지 않게 하소서!
주님이 오시니 마중 나가자.
주님은 평화의 임금이시다.

감사합니다.아멘. 

 

곤줄박이

 

♤퇴계난택(退溪難擇)
(퇴계(退溪)선생의 어려운 선택)


퇴계(退溪)선생의 둘째 아들 채(寀)는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어머니 김해 허씨를 여의고 주로 외가(의령)에서 자랐다. 

성장하면서 건강이 나빠져 퇴계가 단양군수(丹陽郡守)로 있던 때 정혼만 해놓은 상태에서 2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채가 세상을 떠난 그 이듬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전임한 퇴계는 직책을 사임하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있을 때, 둘째 며느리는 자식도 없는 과부가 되었다.

선생은 홀로된 며느리가 걱정이었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젊은 며느리가 어떻게 긴 세월을 홀로 보낼까?' 그리고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 집이나 사돈집 모두에게 누(累)가 될 것이기에, 한밤중이 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집안을 순찰하곤 했다. 

어느 날 밤, 집안을 둘러보던 선생은 며느리의 방으로부터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순간 선생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점잖은 선비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며느리의 방을 엿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젊은 며느리가 술상을 차려 놓고 짚으로 만든 선비 모양의 인형과 마주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인형은 바로 남편의 모습이었다.

인형 앞에 술잔을 가득 채운 며느리는 말했다. 
"여보, 한 잔 드세요." 

그리고는 인형을 향해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흐느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남편의 인형을 만들어 대화를 나누는 며느리… 한밤중에 잠 못 이루고 흐느끼는 며느리… 

선생은 깊이 생각했다.
과연 윤리(倫理)는 무엇이고 도덕(道德)은 무엇인가! 
저 젊은 며느리를 수절시켜야 하다니… 
저 아이를 윤리 도덕의 관습으로 묶어 수절시키는 것은 너무도 가혹하다. 
인간의 고통을 몰라주는 이 짓이야말로 윤리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다. 
여기에 인간이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저 아이를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이튿날 선생은 사돈을 불러 결론만 말했다. 
"자네, 딸을 데려가게." 

사돈은 "내 딸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선생은 "잘못한 것 없네. 무조건 데려가게." 

친구이면서 사돈 관계였던 두 사람이기에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딸을 데리고 가면 두 사람의 친구 사이마저 절연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생의 사돈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안 되네. 양반 가문에서 이 무슨 일인가..."

선생이 다시
"나는 할 말이 없네. 자네 딸이 내 며느리로서는 참으로 부족함이 없는 아이지만 어쩔 수 없네. 데리고 가게." 

이렇게 퇴계(退溪) 선생은 사돈과 절연하고 며느리를 보냈다.

그리고 몇 년 후 선생은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다. 마침 날도 저물기 시작했으므로 아담한 민가 집을 택하여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런데 저녁상을 받아보니 반찬 하나하나가 선생이 좋아하는 것
뿐이었다. 더욱이 간까지 선생의 입맛에 딱 맞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이 집 주인도 나와 입맛이 비슷한가 보다.' 

이튿날 아침상도 마찬가지였다. 반찬의 종류는 어제 저녁과 달랐지만 여전히 입맛에 딱 맞는 음식들만 올라온 것이다. 
나의 식성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토록 음식들이 입에 맞을까?

'혹시 며느리가 이 집에 사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며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막 떠나가려는데 집주인이 버선 두 켤레를 가지고 와서 '한양 가시는 길에 신으시라'며 주었다. 신어보니 선생의 발에 꼭 맞았다. 
'아! 며느리가 이 집에 와서 사는구나.' 선생은 확신을 하게 되었다.

'집안을 보나 주인의 마음씨를 보나 
내 며느리가 고생은 하지 않고 살겠구나.' 
만나보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짐작만 하며 대문을 나서는데 한 여인이 구석에 숨어 퇴계선생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퇴계선생은 이렇게 며느리를 개가(改嫁)시켰다. 
이 일을 놓고 유가(儒家)의 한 편에서는 오늘날까지 선생을 비판하고 있다. "선비의 법도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다. 윤리를 무시한 사람이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정반대로 퇴계선생을 칭송하고 있다. "선생이야말로 윤리와 도덕을 올바로 지킬 줄 아는 분이시다. 윤리를 깨뜨리면서까지 윤리를 지키셨다."

답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잣대는 퇴계의 선택이 맞다고 단정 지울 것이다. 

퇴계선생은 엄격한 규범보다 따뜻한 인간미를 택하였다. 당시로는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다.

옛 연구집(聯句輯)에

•金剛山高松下立
(금강산고송하립) : 금강산이 높아도 소나무 아래 서있고

•漢江水深砂上流
(한강수심사상류) : 한강물이 깊어도 모래 위에서 흐르네
라는 문장이 있다.

윤리가 아무리 엄격해도 상식을 넘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도덕이 아무리 엄중해도 양심을 범할 수 있겠는가?


즐거운 하루 !! (방긋)

 

곤줄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