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14일(화)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 오늘의 글/시]
♡ 마부(馬夫)와 농부(農夫) 이야기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미쳐서 죽었다. 그의 말년 모습은 강렬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1889년 겨울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휴가를 보내던 니체는 집을 나선다. 우체국으로 편지를 부치러 가다, 광장에서 매를 맞는 늙은 말을 발견한다. 무거운 짐 마차를 끌고 가던 말은 미끄러운 빙판길에서 그만 발이 얼어붙고 만다. 겁먹은 말은, 마부가 아무리 채찍을 휘둘러도 움직이지 않는다. 마부는 화가 나서, 더욱 세게 채찍질을 한다. 그 광경을 본 니체는 마차로 뛰어들어 말의 목을 감고 흐느낀다. 이웃이 그를 집으로 데려갔다. 그는 침대에서 이틀을 꼬박 누워 있다가 몇 마디 말을 응얼거린다.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 그 후로 11년 동안 정신 나간 상태로 침대에 누워 죽음을 맞는다. 니체가 늙은 말을 부둥켜 안은 것은 존재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을 것이다. 짐마차를 끌고 가는 말과 삶의 등짐을 지고 가는 자신을 같은 처지로 여기고 감정이입(感情移入)을 했는지도 모른다.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지도 못한 채 채찍을 맞아야 하는 삶이라면 얼마나 고달픈가. 그것이 가죽의 채찍이든, 세파의 채찍이든 말이다. 니체가 눈물샘이 터져 울부짖은 것이 바로 그 지점이다...... 1960년 방한한 미국 소설가 펄벅은 니체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한다. 그녀는 늦가을에 군용 지프를 개조한 차를 타고 경주를 향해 달렸다. 노랗게 물든 들판에선 농부들이 추수하느라 바쁜 일손을 놀리고 있었다. 차가 경주 안강 부근을 지날 무렵, 볏가리를 가득 실은 소달구지가 보였다. 그 옆에는 지게에 볏짐을 짊어진 농부가 소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신기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펄벅이 길을 안내하는 통역에게 물었다. “아니, 저 농부는 왜 힘들게 볏단을 지고 갑니까? 달구지에 싣고 가면 되잖아요?” “소가 너무 힘들까봐 농부가 짐을 나누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지요.” 펄벅은 그때의 감동을 글로 옮겼다. "이제 한국의 나머지 다른 것은 더 보지 않아도 알겠다. 볏가리 짐을 지고 가는 저 농부의 마음이 바로 한국인의 마음이자, 오늘 인류가 되찾아야 할 인간의 원초적인 마음이다. 내 조국, 내 고향, 미국의 농부라면 저렇게 힘들게 짐을 나누어 지지 않고, 온 가족이 달구지 위에 올라타고 채찍질 하면서 노래를 부르며 갔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농부는 짐승과도 짐을 나누어지고 한 식구처럼 살아가지 않는가.” 동물이든, 사람이든 모든 생명체는 자기 삶의 무게를 지고 간다. 험난한 생을 견뎌내는 그 일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받을 자격이 있다. 하물며 같은 종의 인간끼리라면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런 마당에 SNS에는 오늘도 비수 같은 말들이 홍수를 이룬다. 당신은 늙은 말에 채찍질하는 마부인가, 등짐을 나눠지는 농부인가? |
스트레스와 영적체험. 환자들은 고통의 순간! 오히려 참된 삶의 기쁨을 되찾는다. 병이 온갖 걱정과 두려움을 유발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건강했을 때보다 오히려 줄어든다. 사람들은 병이라는 고통을 통해 비로소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스트레스의 근본 원인은 윗사람이 못살게 굴거나 아이가 말썽을 부리고 연인과의 관계가 깨지는 데 있지 않다. 영혼의 감각을 잃는 데에 있다. 우리를 일깨우고 영혼의 감각을 깊게 해주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다. 기도, 묵상, 성가 부르기, 요가, 단식, 선 등등. 나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을 상실한 사람들을 통해 영혼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우쳤다. 영혼은 생각이나 신념이 아니다. 꿈과 음악, 예술, 그리고 부모가 되는 체험을 통해서 아무런 대가 없이 우리를 일깨워 준다. 그것은 때로 우리 일상의 삶의 한 가운데에 갑자기 들이 닥친다. 영적인 체험은 배움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삶의 한 순간 우리에게 발견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어진다. 교육을 많이 받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상관없이 전혀 기대하지 않을 때에 우리에게 다가 온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순간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내기도 한다. 그것에 큰 가치를 두지 않거나 알아채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영적체험이 우리 삶을 바꾼다. 참고한 글 “삶의 기술” -안젤름 그륀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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