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8일(수)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오늘의 글/시]
수덕사길 수덕여관 모정 이야기: 세 남자, 세여자 백두대간을 따라 뻗어내린 태백산맥에서 말을 갈아 타고 서해를 향하던 차령산맥이 잠시 쉬어가는 곳에 수덕사가 있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왼쪽에 곧 쓰러질 것 같은 초가집 한 채가 수덕여관이다. 한때는 이 나라의 내노라 하는 시인, 화가, 묵객들이 드나들던 여관은 주인도 객도 떠나가고 곰팡이 냄새나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이제 이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세 여자와 세 남자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세 여자란 김일엽, 나혜석. 박귀옥(이응로 화백의 본부인)이고, 세 남자란 송만공 스님, 이응로 화백. 김태신(일당스님=김일엽과 일본인사이에 난 사생아)을 말한다. 수덕사 일주문 옆에 있는 초가집 한 채는, 너무나도 유명한 당대에 쌍벽을 이룬 김일엽스님과 나혜석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한국 최초의 신시 여류시인 김일엽은,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의 먼지처럼" 털어 버리고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수덕사 견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 부터 수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자,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또 다른 신여성 나혜석도 1934년 이혼 후 극도로 쇠약한 몸으로 중이 되겠다고 김일엽을 찾아 나선다.어린 딸과 아들이 보고 싶어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일엽이 만류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이겨 마지못해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한다. 몇 년 전 경성에서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같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한 나혜석은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5년 동안이나 머무르며 '중 시켜 달라'고 1인 시위하면서 버티는 한편 붓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며 찾아오는 예술인들과 소일한다.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수덕사로 김일엽스님을 찾아온다. 그 소년은 김일엽이 일본인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이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베개를 해주고 젖무덤을 만지게 해준다. 나혜석 역시 모성애에 주려 있는 세 아이의 엄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은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이 중노릇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김태신은 이 후에도 어머니 김일엽을 찾을 때마다 수덕여관에서 묵는데, 나혜석은 마치 자기자식을 대하듯 팔베개를 해주고 자신의 젖을 만지게 하는 등 모성에 굶주린 일엽의 아이를 보살핀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김태신(후에 일당스님)에게 여러 모로 영향을 끼치는데... 나혜석과 특별한 교분이 있는 청년화가 이응로도 자주 찾아와 이들과 함께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 실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이러한 연유로 김태신도 후에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유명화가가 된다. 충남 홍성이 고향이고,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있던 이응노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이어서 자주 만나려 수덕여관을 들른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함께 이 산속 외진 곳에서 아예 같이 기숙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누나 같은 스승이자 선배 화가일 뿐 애정관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응로에게 파리의 환상을 심어 준다.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 버린 이응노는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인 다음, 부인 박귀옥에게 운영을 맡기고, 6.25때에는 피난처로 사용하는 등…. 6년간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나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는 1958년 드디어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 버린다. 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옥이 여관을 운영하나 글자 그대로 소박떼기 청상과부가 되어 버리고 만다. 머물다 미련 없이 떠나 버린 두 사람과는 달리 박귀옥 여사는 변치않는 애정과 절개로 이국땅의 남편을 그리며 수덕여관을 지킨다. 박귀옥여사가 외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이른바 “동백림사건”으로 1968년 이화백이 납치되어 형무소에 수감된다. 박귀옥은 한결같은 지극정성으로 이화백의 옥바라지를 한다. 출옥 후 이화백은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수리면서 그녀 곁에 잠시 동안 머무른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와 떠나버린 남편을 병구완하는 박귀옥 여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런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 화백은 아마도 그 마음을 추슬러 여관 뒤뜰에 있는 너럭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새겼으리라..... 그리고는 “이응로 그리다,”라는 사인까지 남겨 놓은 뒤“ 이 그림 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다.”고 말하고는 파리로 또 훌쩍 떠나 버린다. 박귀옥 할머니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어느덧 팔순을 앞둔 세월까지 남편을 기다려 온다. 그러나 죽기 전에는 꼭 다시 만나 볼 수 있으리라 실날같은 희망으로 살아 왔지만, 이응로는 1992년 귀국전시를 앞두고 파리에서 눈을 감고 만다. 장례식에도 가볼 수 없는 박귀옥은 마지막 소원으로 이응로 화백의 유골이라도 돌려받아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히고 싶어 한다. 그녀는 이응로가 파리로 떠날 때 그의 출세 길에 지장이 될까 봐 이혼 수속을 허락해 준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 이제 그녀는 이화백에 대해 아무 것도 주장할 수 없는 법적으로 남남의 처지였던 것이다. 그녀의 방에는 젊은 시절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과 이화백이 남겨 준 갈대꽃이 핀 강가에 홀로 서있는 오리그림이 걸려 있다. 고개를 내밀고 어느 곳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꼭 자신의 처지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2001년초 수덕여관 주인 박귀옥 여사가 92세를 일기로 돌아가신다. 그리고 이 수덕여관도 폐허와 전설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이다. 이제 수덕여관과 수덕사에 얽힌 추억의 인물은 김태식 한 사람만 직지사에 생존해 있었다.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할 정도로 유명한 일당스님(김태신) 그가 바로 일제 시대 한국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자 당대 최고의 비구니로 칭송받던 일엽스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공개돼 화제였다. 67세에 불가에 귀의하여 80세 노인이 된 노스님이 털어 놓는 그리운 나의 어머니, 그리고 파란만장 했던 삶의 이야기... “ 어머니란 존재는 각박하고 외로운 이승에 내 던져진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나의 고독, 나의 절망,나의 기쁨, 나의 소망은 모두 어머니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로 인해서 갈증을 느꼈으며, 또한 어머니로 인하여 제 삶은 충만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뿌리치는 옷자락에 엉겨 붙은 눈물같은 존재였습니다. ”일본에서 화가로 더욱 유명한 일당스님은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출간하면서, 그가 한국 비구니계의 거두 일엽스님(1896~1971)의 아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냈다. 일엽 스님이 입적한지 31년 만의 일이다. 그리고 수덕여관의 마즈막 추억 인물 김태신도 2014년12월25일 일당스님으로 입적했다. 옮긴글 주; 나혜석은 어디에 매어있는 것을 |
죽음 뒤에 삶이 있을까? 모든 종교는 전통적으로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고 믿는다. ‘죽음 뒤의 삶’은 죽은 뒤에도 삶이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모호한 개념이다. 죽음 뒤에는 삶이 그대로 지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삶은 죽음과 함께 끝나버린다. 세상은 누구에게나 죽음에서 끝이 난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에서는 우리가 죽음에서 사라지거나 파괴되지 않고, 하느님에게 이르며 하느님 안으로 들어간다고 예언 한다. 우리는 죽는 순간 우선 어둡고 불확실한 곳으로 간다.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삶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놓아버려야 한다. 이 때가 삶을 그만두는 순간이다. 숨 쉬고 생각하기를 멈추는 순간이다.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까닭은 바로 통제하는 힘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뒤 -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어둠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의학적으로 사망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고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고 이야기 한다. 영혼은 그런 뒤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크고 밝은 빛, 평안과 사랑이 가득한 빛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그 중에는 오래 전에 죽은 친척이 마중을 나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경험의 비유로서 우리의 믿음을 더 깊어지게 할 수 있다. 융은 심리학의 관점에서 사람이 죽음 뒤의 삶을 믿는 것은 정신건강에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심리학적인 경험도 죽음에 무엇이 있는지 끝내 증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많은 깨달음을 통해서 죽음 뒤에 삶이 있다고 믿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확실한 앎’을 묻는 질문에 유일한 답은 우리는 끝내 믿음을 감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에 어긋나는 행동이 아니라 이성의 사고를 도움으로 삼아 확실한 믿음을 도출하는 것이다. 참고한 글 “인생을 이야기 하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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