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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산성·조선왕릉

남한산성 행궁 개관기념 무료관람(2012.5.26)

남한산성 행궁이 어제, 그러니까 2012년 5월24일 (목)요일 오후 2시에 개관식을 했다. 사람이 많아 혼잡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가기를 포기하고, 오늘에야 남한산성 행궁 시찰(?)에 나섰다. AK프라자 건너편에서 52번 버스만 타면 산성 정상 버스 종점까지 한번에 가는 복(?)을 누린다. 버스 정류장에서 인터넷 정보검색을 하니, 막~ 정류장를 버스가 떠나버려 25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모란에서 9번 버스를 타느냐? 그냥 25분을 기다리느냐?  설왕설래하다가 "있다는 것이 시간 뿐인데... 그냥 기다립시다." 하여 오고가는 사람들 구경 하며  기다리니, 52번 버스가 '궁안마을' 버스종점에서 지금 출발했다고 인터넷에 떴다고 한다. 참~ 세상 좋아졌다. '앉아서 구만리' 라고 손바닥만한 기계에서 온갖 요술보따리 같은 사연과 정보가 쏟아지니 흥부의 박덩어리에서 나온 금은보화 부럽지 않은 세상이 되어버렸다...^-^

 

산성정상에 도착하여 그곳 민속식당에서 강원도식 순두부백반(각 6,000원)을 시켜 먹고, 행궁관람에 나섰다. 5월 24일~ 29일 까지는 무료관람이라고 한다. 문화해설사의 설명도 간간이 들으며 관람을 했다. 해설사님께 어제 개관식을 성대하게 잘 치르었느냐? 낙성연 행사는 어땠느냐? 고 물으니..." 말도 마라...제대로 행사를 못 했다."고 한다. 이유인즉 노점상 연합회 측이 공연할 곳을 점령하여 꽹과리를 치고...확성기를 동원하여 방해공작을 펴서라고 한다...개관식에 광주시장, 경기도지사, 문화관광부 장관을 비롯하여 장관만 6명이 참석했는데 낙성연 공연이 취소되었다가 오후 5시즘 약식으로 거행되었다고 한다. 노점상 연합회측의 시위행동의 사연인즉 "노점 상업행위를 허가하라."는 것이라고 한다. 경찰만 100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세상 사는 일이 번잡하고 시끌시끌하고 정말이지...'쉬운 일이 하나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햇빛이 쨍쨍해서인지...내가 피곤해서인지 관람하는 행동이 지지부진, 축축 처졌다...외행궁 앞 신라시대 주장성 터를 보여주는 온실모습의 가건물 같은 것이 있는데...들어가면 푹푹 찌는 한증막을 체험할 것 같아 들어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이왕 왔는데...들어가지도 않으면 억울할 것 같아 용기(?)를 내어 들어가 보았다...아닌게 아니라 한증막(?) 스럽다...신라시대 주장성으로 쌓았던 성벽이 조선시대 까지 이어져 지금의 남한산성 성벽으로 이어져 왔다는 내용이고, 성벽 일부의 돌담 쌓은 실물모습과 설명판 등을 전시했는데... 내용은 매우 좋은데...환경이 안 좋다...푹푹 찌는 한증막 같은 체험을 갖게하는 전시장, 날리는 황토먼지를 마시고 있다는 위기감과 뿌연 시야를 견디며 바라보는 설명판, 굴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 나쁜 묘한 선입견을 갖게하는 느낌 등등...  좀 더 쾌적한 분위기에서 전시하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본다....^-^   

 

- 2012년 5월 26일 (토) 수산나 -

 

남한산성행궁 안내도 / 사적 제480호(2007년 6월 8일 지정)

 

행궁이란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행궁이라 한다.
남한산성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건립되었다.
실제로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였다.
이후에도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 등이 여주, 이천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한산성행궁 이정표

 

남한산성행궁 매표소 주변 풍경

 

남한한산성매표소와 기념품판매소 여담

 

남한산성행궁 초가집

 

남한산성행궁 매표소 주변 풍경

 

남한산성행궁 매표소 주변 풍경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건물

 

남한산성행궁 인화관 중건공사 안내문

 

남한산성행궁 인화관 터

 

남한산성행궁 매표소 주변 풍경

 

남한산성행궁 범종각

 

남한산성행궁 범종각

 

남한산성행궁 한남루

 

 

남한산성행궁 한남루

 

남한산성행궁 한남루 현판

 

남한산성행궁 한남루 주련

 

남한산성행궁 한남루 주련

 

남한산성행궁 한남루 주련

 

남한산성행궁 한남루 주련

 

남한산성행궁 한남루 후면

한남루(漢南樓) / 정면 3칸 X 측면 2칸(114㎥)

한남루는 행궁 정면에 해당하는 행궁의 대문으로 한강 남쪽 제일의 누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남루 건립 전에는 대문에 해당하는 외삼문과 중문만이 있던 것을 정조 22년(1798)에 광주 유수 홍억이 한남루라는 2층의 누문만들고 그것을 대문으로 삼았다.

 

남한산성행궁 연못 / 13.8m X 7.7m

한남루 안쪽 마당에서 발굴되었다.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남한산성도에서 방형의 연못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한산성행궁 한남루와 외삼문 전경

 

남한산성행궁 외삼문과 행각

 

남한산성행궁 외삼문

 

남한산성행궁 외삼문북행각

 

남한산성행궁 외삼문남행각

 

남한산성행궁 외삼문

 

남한산성행궁 외삼문행각 굴뚝

 

남한산성행궁 외삼문남행각

 

남한산성행궁 외삼문과 남행각

 

남한산성행궁 외행전을 출입하는 작은 문

 

남한산성행궁 외행전

외행전(外行殿) / 정면 7칸 X 측면 4칸

외행전은 하궐의 중심 건물로 정당이리고도 하였다.

외행전은 내행전과 함께 인조 2년(1624) 총융사 이서가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시작하여 인조 4년(1626)에 완성하였다.

병자호란(1636) 당시 인조가 외행전에서 군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음식을 베푸는 호궤를 행하였다는 기록과 청군이 한봉에서 대포를 쏘아 포환이 외행전 기둥을 맞추어 인조가 내행전으로 거처를 옯겨간 기록이 있다.

 

남한산성행궁 하궐 남행각

 

남한산성행궁 상궐과 하궐을 출입하는 작은 문 주변

 

남한산성행궁 하궐 남행각 1

 

남한산성행궁 하궐 남행각 1

 

남한산성행궁 와행전 뒤 중문과 굴뚝

 

남한산성행궁 일장각 전경

 

남한산성행궁 일장각

 

남한산성행궁 일장각

 

남한산성행궁 일장각 내부

일장각(日長閣) / 정면 4칸 x 측면 2칸

일장각은 청량산의 또 다른 이름인 '일장산'을 전각 이름으로 한 것이다.

하궐 왼편에 있는 관아건물로 순조 29년(1829) 광주유수 이지연이 세웠다고 한다.

2010년 외행전과 함께 복원되었으며, 건물내부는 광주 유수가 지냈을 법한 모습으로 재현하여 꾸며 전시하였다.

 

남한산성행궁 통일신라건물지 안내문

 

남한산성행궁 통일신라건물지 안내문

 

남한산성행궁 통일신라건물지

 

남한산성행궁 통일신라건물지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 정면 16칸 X 측면 6칸

현재 전시관내에는 통일신라 건물지의 일부가 노출 전시 되어 있다.

발굴된 건물의 벽의 두께는 2m 가량으로 기와는 조선시대의 기와와 비교하여볼 때 그 무게와 크기가 6배를 넘는다.

건물의 용도는 신라 주장성 기록과 연결하여 볼 때 군사시설 용도의 건물이라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발굴된 기와의 모습은 행궁 남쪽 통일신라 와적지에서 전시하고 있다.

 

남한산성행궁 내행전 출입문 정면

 

남한산성행궁 내행전 출입문 후면

 

남한산성행궁 내행전

 

남한산성행궁 내행전

 

남한산성행궁 내행전

 

남한산성행궁 내행전 내부

 

남한산성행궁 내행전 임금 침전

 

남한산성행궁 내행전 동궁 침전

 

남한산성행궁 내행전 내부

 

남한산성행궁 내행전 천정

 

남한산성행궁 내행전 일월오악도

내행전(內行殿) / 정면 7칸 X 측면 4칸

내행전은 임금의 침전으로 전체 28칸 건물이다.

이는 창경궁의 침전인 통명전, 환경전, 경춘전과 동일한 구조로 궁궐 침전의 법도를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기둥 윗부분의 공포는 그 건물의 격을 나타내는데 내행전의 공포형식은 새의 날개처럼 생긴 부재를 두 개 겹쳐 쌓은 이익공 형식으로, 행궁 내 건물 중 가장 격식이 높다.

 

남한산성행궁 상궐 남행각

 

남한산성행궁 하궐 남행각 1 내부 - 책 읽는 행궁

 

남한산성행궁 하궐남행각 1 내부 - 책 읽는 행궁

 

남한산성행궁 상궐  북행각

 

남한산성행궁 내행전 뒤 굴뚝

 

남한산성행궁 좌승당

 

남한산성행궁 좌승당

 

남한산성행궁 좌승당에서 바라본 내행전 지붕과 상궐 북행각

좌승당(坐勝堂) / 정면 6칸 X 측면 3칸

좌승당은 내행전(상궐) 북쪽 담장 밖에 있는 광주 유수의 집무용 건물이다.

전각의 이름은 순조 17년(1817) 광주 유수 심상규가 지은 이름으로 '좌승(坐勝)'이란 '앉아서 이긴다'는 의미로 반드시 이길만한 계책을 써서 적을 물리친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중정남한지」에는 좌승당의 서쪽벽을 뚫어 루를 만들어 유차산루(有此山樓)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남한산성행궁 재덕당

 

남한산성행궁 재덕당 남쪽  '반석' 이라는 암각문이 새겨진 바위

재덕당(在德堂) / 정면 3칸 X 측면 25칸

재덕당은 내행전 뒤편 언덕에 있는 건물로 행궁 북쪽의 좌전(종묘)이 건립되기 전 숙종 14년(1688)에 유수 이세백이 건립하였다.

건물 남쪽에는 반석(磐石)이라는 암각문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

 

남한산성행궁 후원 이위정

 

남한산성행궁 후원 이위정

 

남한산성행궁 후원 이위정

이위정(以威亭) / 정면 3칸 X 측면 1칸

후원에 있는 이위정은 '군기의 집'이란 의미로 순조 17년(1817년) 광주 유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사정(射亭)으로 지은 정자다.

'이위정기(以威亭記)'의 글은 심상규가 짓고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썼다.

'내가 여기에서 활쏘기를 하는것은 호시(弧矢)를 일삼아 길이 힘쓰고자 함이 아니라 성안 사람들의 미음 속에 인의와 충용이 길이 날로 일어났으면 하는 큰 바람에서이니 어찌 천하가 위복하지 않겠는가!'···「중정남한지」

 

남한산성행궁 후원

 

남한산성행궁 후원에서 내려다 본 행궁

 

남한산성행궁 후원에서 내려다 본 행궁

후원(後園)

후원에서는 백제시대 수혈유구 8기와 다량의 백제토기편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인들이 터를 잡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행궁 좌전 안내문

 

남한산성행궁 좌전

 

남한산성행궁 좌전

 

남한산성행궁 좌전 영녕전

 

남한산성행궁 좌전 정전

좌전(左殿) / 정전 : 정면 5칸 X 측면 2칸 / 영녕전 : 정면 5칸 X 측면 2칸

좌전은 유사시 종묘의 신주(神主 : 선대왕의 위패)를 옮겨 봉안하기 위해 만든 곳으로, 숙종 37년(1711)에 부윤 김치룡이 우실과 함께 같이 지었다.

좌전과 우실의 건립은 남한산성행궁이 일반적인 행궁이 아닌, 임시수도의 역활을 수행하는 중요한 곳(보장처, 유사시 수도)이었음을 뜻한다.

 

자전곶교지광주노상도(自箭串橋至廣州路上圖)

1885년 / 남영우 제공, 미국의회도서관 소장

일본군 카이즈 미쓰오 공병 대위가 전곡교(箭串橋, 살곶이다리, 조선 성종 13년에 왕십리와 뚝섬사이 중랑천을 가로잘러 건립된 조선시대 석교 중 가장 큰 장석판교(長石板橋))에서 지금의 남한산성까지를 측량하여 제작한 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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