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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스크랩] 정조가 끝내 노론을 축출하지 못한 이유는...?

정조가 추구한 것은 오로지 한 가지 왕권의 강화였다. 노론에 의해 아버지인 장헌세자 - 사도세자 - 가 죽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정조이기에, 노론의 나라가 되어 버리다시피 했던 당시 조선을 다시 왕에 의해 다스려지는 왕의 나라로 되돌려 놓고 싶었던 것이다. 개혁군주라고 하는 것도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의 일련의 정책의 성과 때문이지, 정조의 모든 행위는 오로지 왕권의 강화 그 한 가지만을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문이 남는다. 그러면 왜 정조는 그리 왕권강화를 추구했으면서도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노론과 끝내 손을 잡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정조가 원하는대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서도 노론을 축출하거나 배제하는 대신 노론의 일파인 김조순을 외척으로 끌어들여 그들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결국 이미 앞서 말한 대로 당시의 조선은 노론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고, 정조에게는 그들을 어떻게 할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노론은 일찌감치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기호지방에 뿌리를 내린 이른바 기호사림에서 시작되었다. 이들 기호사림은 상대적으로 일찍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훈구파들과 싸우고 갈등하고 죽고 죽이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선조 이후 이들 훈구파를 학연과 혈연등을 매개로 완전히 흡수하게 된다. 훈구파는 흔히 아는 것처럼 몰락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호사림 - 즉 서인과 결탁하여 사림으로서 그 모습을 바꾸었던 것이다.

여기서 역사상식 하나, 그럼 훈구파의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넓은 땅을 소유한 대지주라고 하는 것이었다. 공신전에, 권력을 이용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간척사업을 벌여 농지를 늘리는가 하면, 농민으로부터 땅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당시 조선 경제의 근간이랄 수 있는 농업경제를 장악한 것이 바로 훈구파였다. 그리고 그 재산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그 후손들에게 전해졌고, 후손들은 다시 서인으로 흡수되었고.

거기다 이처럼 스스로가 기호의 광대한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던 그들을 다시 기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호남의 대지주들이 후원하고 있었다. 원래 호남은 영남과 마찬가지로 동인의 세력이 적지 않던 곳인데, 기축옥사로 호남 출신인 정철에 의해 호남의 동인들이 거의 씨가 마르다시피 하면서 서인이 주도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소자영농이나 소작농에 유리하고 지주에 불리했던 대동법에 대해 서인이 반대하고 나선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기호와 호남의 농업생산을 장악한 위에 다시 시전의 상인들이 더해진다. 노론에 의해 주도되는 조정에 의해 금난전권이 제정되고 다시 노론을 견제하고자 했던 정조와 남인에 의해 금난전권이 폐지되는 과정은 시전상인과 노론과의 관계를 보여준다. 뿐일까? 만상도 있다. 원래 만상은 의주를 중심으로 청과의 국경지대에서 밀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아다시피 이런 밀무역에는 정치권력과의 결탁이 필수적이다. 노론계열의 북학파에 의해 저술된 북학의나 열하일기가 한결같이 무역과 상업의 발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다. 실제 영조 30년 책문후시를 공인했던 것이 다시 정조11년 수출물량이 너무 많아 내수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폐지되게 되는데, 금난전권이나 책문후시나 모두 정조에 의해 폐지되는 것을 주목해 볼 만하다. 당연하게도 책문후시가 폐지된 이후에도 만상에 의한 밀무역은 송상과 내상과 연결된 일본과의 무역로로 계속 유지된다.

한 마디로 당시 서인은 기호와 호남의 농업생산은 물론, 경상과 만상 등의 상업자본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경제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당장 장용영만 하더라도 오군영이 모두 노론의 수중에 들어갔기에 궁여직책으로 왕의 친위대로서 창설한 것인데, 이미 이때에 이르면 오군영의 수뇌부는 거의 노론계열의 인사가 독점하고 있었고, 노론이 아니더라도 노론으로부터 녹봉 이상의 용돈을 받아 쓰는 이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오군영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이기보다는 차라리 새로이 군영을 만드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군영 뿐일까? 장희빈이 왕비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숙종에 대해 미인계를 쓰려 하던 남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정작 장희빈에 의해 인현왕후 민씨가 밀려나는 상황에 이르자 노론은 당시 무수리로 있던 화경숙빈 최씨로 하여금 숙종과 동침을 하게 함으로써 반격을 한다. 역사란 때로 우연이면서도 우연이 아닌 경우가 적지 않은 법이라, 숙종이 무수리에 불과한 화경숙빈 최씨와 동침하고, 다시 숙빈의 첩지까지 내리기까지에는 미리 심어져 있던 노론 쪽 인맥이 움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물며 노론에 의해 태어났다 할 수 있고 노론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으며 스스로 노론에 가까웠던 영조에 이르러서는 어떠했을까?

물론 돈만 있다고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돈도 돈이려니와 노론의 세력기만이 기호지방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당장 궁녀며 내시며 들일 때는 한양 인근에서 선발하여 들인다. 오군영 역시 대부분 근무지에서 가까운 한양 인근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기호와 호남의 농지며, 만상과 경상의 상업자본이며 모두 노론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궁녀며 내시며 군사들이며 노론의 지역기반이랄 수 있는 기호지방에서 뽑혀 쓰인다. 돈과 지역기반이 만나게 되면 결국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밖에 없다. 즉 무수리에 불과했던 화경숙빈으로 하여금 임금과 동침하게 하고 숙빈으로서 내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할 수 있었던 바로 그 힘.

실제 정조가 즉위하고 바로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에 의해 일어난 암살사건의 경우 궁 내부에서 궁녀며 내시까지 가담한 동조자가 10여 명이나 나왔는데, 사건을 앞두고 매수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왕의 암살이라고 하는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오래전부터 궁 내부에 그들의 동조자가 침투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몇 차례 암살시도가 있은 끝에 정조가 소론의 대신을 모아 노론의 명분이 옳음을 설득하여 와해시킨 것은 그만큼 당시 노론의 위협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말해준다.

돈과 인맥,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남았다. 노론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추구했던 기본전략, "산림을 우대하고 국혼을 놓치지 않는다.' 그렇다. 노론이 송시열을 송자로 추존한 것은 성리학이 지배하고 있는 조선사회에서 학문적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였다. 송시열을 높임으로써 송시열을 따르는 자신들이 조선 성리학의 헤게모니를 쥐고 유림을 장악하고자 했던 것이고, 실제 노론은 명분으로서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유림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유림에 더해 노론은 국혼을 통해 왕실의 안방을 장악하고 있었다. 국혼을 할 때 왕명에 의해 금혼령이 내려지는 것은 기호지방에 한정되어 있었다. 궁녀며 내시도 마찬가지지만 왕비든 왕자비든 간택할 때 그 대상은 기호지방에 머무는 사대부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후보감을 고르는 것도 원래 노론에서 나온 왕비며 왕대비며 대왕대비다. 당장 장헌세자의 비인 혜경궁 홍씨도 노론이었고, 영조의 계비로 정조의 강력한 정적이었던 정순왕후도 노론출신이었다. 정조의 비인 효의왕후며,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말할 것도 없다. 순원왕후의 아비가 세도정치를 연 김조순이었으니. 왕은 이씨의 왕이되 왕비는 노론의 왕비였던 것이다.

결국 정조가 김조순을 세자의 장인으로 삼아 특히 노론 시파를 외척으로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은 이러한 현실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힘이 없었던 것이다. 돈과 인맥, 명분, 더구나 왕실의 안방까지, 사실상 조선의 모든 것을 노론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론을 축출하거나 제거한다고 하는 것은 조선사회 자체를 근본부터 뒤집어 엎는 혁명을 뜻하는데, 정조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이란 현실적으로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당시 노론을 견제할만한 시민사회라도 형성되어 있었다면 친위쿠데타라도 일으켜 볼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메이지 유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권력의 교체를 열망하는 새로운 흐름을 이용하여 스스로 세로의 시대의 중심에 서서 변화를 이끌어 다시금 새로운 시대의 중심에 왕권을 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인과 소론에게는 새로운 시대를 열만한 의지도 역량도 없었고, 그들을 대신할만한 어떠한 세력도 성장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정조가 노론과 대립하여 그들을 제거하려 해도 그를 뒷받침할만한 어떠한 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채였으니 정조의 선택이란 노론과의 타협 이외에는 달리 없었던 것이다.

물론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러한 정조의 시도는 정조 사후 정순왕후 김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 벽파가 정조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세자의 보호자로서 외척으로 끌어들인 김조순이 세도정치를 시작함으로써 모두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결국 노론이라고 하는 것은 정조 한 사람의 뛰어남이나 강력함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거의 절망과도 같은 현실의 벽이었다 할 수 있으니, 정조는 그 벽에 도전했다가 끝내 그 한계를 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말았던 것이고 말이다.

흔히 조선의 정치라 하면 선비들이 공자왕맹자왈 헛된 소리나 늘어놓고 탁상공론이나 하는 것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정치란 언제나 현실이다. 돈과 사람이라고 하는 현실적인 힘. 경영자든, 학자든, 연예인이든, 하다못해 백수한량이 정치를 해도 결국은 현실의 정치논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정조가 노론을 어쩌지 못한 것도 바로 그러한 힘에서 밀린 결과일 뿐, 결국 그조차도 현실정치의 연장이었던 것이다.

출처 : " 영원히 함께 "
글쓴이 : 늘영원 원글보기
메모 :

정조대왕 시절...당시 조선은 노론의 나라...정조는 대항할 힘이 없었다...결국 노론 일파인 김조순을 외척(세자의 장인)으로 끌어들여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기호사림 즉 서인은 훈구파와 결탁 흡수됨...훈구파는 공신전 등 농업경제를 장악...기축옥사로 호남의 정철에 의해 호남의 동인이 씨가 마르게됨...결국 기호와 호남의 농업생산을 서인이 장악함...서인이 대동법을 반대한 이유가 그 예임...^-^

여기에 시전의 상인들이 더해지고...청과의 밀무역을 독점했던 만상등을 지배하게 됨...영조 30년 책문후시 공인했다가 정조 11년 책문후시 폐지가 그 예...또한 노론계열의 북학파가 북학의, 열하일기 등으로 무역과 상업의 발전을 주장한 것도 그 예임...^-^

 

서인은 기호와 호남의 농업생산은 물론 경상과 만상 등의 상업자본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경제전반을 지배...오군영이 모두 노론의 수중...궁궐의 나인들도 거의 노론의 수중...정조의 암살이 몇 차례 있고나서 결국 노론과 타협할 수 밖에 없는 지경이 된 것임...^-^

 

숙종때 장희빈이 남인 세력...장희빈 왕비되자 노론은 무수리 숙빈최씨를 숙종과 동침...연잉군을 낳으니...영조 역시 노론에 의해 세워진(?) 왕이라 할 수 있다...^-^

 

노론의 기본전략..."산림을 우대하고, 국혼을 놓치지 않는다."...혜경궁 홍씨, 영조 계비 정순왕후, 정조비 효의왕후, 순조비 순원왕후(부친-김조순) 모두 노론임...^-^

정조는 돈과 인맥, 명분, 왕실의 안방까지 조선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노론을 축출하거나 제거할 수가 없었다...ㅠㅠ...^-^

 

기축옥사[己丑獄事]~조선 시대, 1589(선조 22) 여립() 모반 계기 일어난 옥사. 정여립 대동계() 조직하여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일당 처형된 사건이다. 이로 동인() 몰락하고 서인(西) 정국 주도하게 되었으며 호남 출신 관직 등용 제한 가한 계기 되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을 계기로 동인서인들 사이에 벌어진 세력 다툼.

 

1567년 선조의 즉위로 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정국을 장악한 사림세력은 1575년 이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고, 그 동안 양쪽의 조화를 주장하던 이이(李珥)가 서인이 되면서 서인이 정파로서의 틀을 잡게 되는 1582년부터 본격적인 붕당정치가 전개되었다. 한때 정국의 우세를 장악했던 서인은 이이가 죽은 뒤 선조의 견제를 받으면서 위축되고, 동인이 권력의 핵심에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때 이이의 천거로 청현직에 오르기도 했던 동인 정여립은 이이가 죽은 후 그를 배신했다 하여 선조의 미움을 받고 고향인 전주로 쫓겨갔다. 정여립은 전라도·황해도 일대의 세력들과 결탁하여 '대동계'(大同契)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모역을 꾀하였다. 그는 천하는 공물(公物)이라는 전제 아래 혈통에 의한 왕위 계승이 결코 절대성을 가질 수 없다 하고, 주자학적인 '불사이군론(不事二君論)'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당시 동인 중 조식(曺植)이나 서경덕(徐敬德) 계열의 사람들에게서 많이 보여지던 것인데, 정여립은 선조의 한계에 적극적으로 반발하여 모역을 준비했던 것이다.

 

옥사는 황해도에서 비밀이 누설되어 1589년 10월 황해감사 한준(韓準) 등의 고변으로 시작되었다. 이때 정철(鄭澈) 등 서인세력은 사건을 처리하면서 이를 정권장악의 기회로 삼아 동인을 제거하고자 옥사를 확대하였다. 정여립은 진안군 죽도로 도망했다가 자살하고 그 아들 옥남(玉男)은 잡혀와서 처형되었다. 정여립의 친척인 정언신(鄭彦信)·정언지(鄭彦智)·이진길(李震吉)과 평소 정여립과 친분이 깊었던 이발(李潑)·이길(李)·백유양(白惟讓)·이급(李汲) 등이 일당으로 몰려 심문 도중에 죽고, 이산해(李山海)·정인홍(鄭仁弘) 등 다수의 동인 핵심인물들이 관직에서 밀려났다. 특히 조식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은 역모의 또 다른 괴수로 인식된 길삼봉(吉三峯)으로 지목되어 옥사(獄死)하고, 서경덕의 제자인 정개청(鄭介淸)도 일당으로 지목되었다가 '절의를 배척했다'(排節義)는 죄목으로 옥사하였다.

 

그결과 동인은 크게 위축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으나, 서인의 지나친 세력 확대는 선조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정철이 후계자 문제를 거론하다가 밀려나면서 다시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이후 동인은 서인 처리에 대한 온건과 강경의 입장 차이로 이황(李滉) 계열의 사람들이 남인으로, 조식과 서경덕 계열의 사람들은 북인으로 나뉘는 조짐을 보이게 된다. 이 사건은 붕당정치의 운영 방식이 미숙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사림정치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지만, 이후의 붕당정치 전개과정에서 북인의 정인홍 등이 서인을 공격하는 주요한 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동인 , 정여립

금난전권 [禁亂廛權]

조선 후기 국역을 지던 육의전시전 상인이 서울 도성 안과 도성 밖 10리의 지역에서 난전을 금지하고, 특정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권리.

 

 

난전은 전안(廛案:시전에서 취급하는 상품의 종류, 상인의 주소·성명을 등록한 문서)에 등록되지 않은 상인들의 상행위인데, 이는 조선 후기 이래 발전한 상품화폐경제의 반영이었다. 육의전·시전 상인으로 대표되던 봉건적 특권상인들은, 난전의 등장으로 봉건적 상업질서가 무너지고 경쟁이 심해지자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정부도 봉건적 상업질서를 보호하고 관청의 수요와 사행(使行)에 필요한 세공(歲貢)을 확보할 목적으로 이들 상인에게 국역 부담을 조건으로 난전을 규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당시 사상도고(私商都賈) 등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고 발전하는 상품화폐경제를 억제하여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결국 1791년(정조 15) 2월 신해통공 (辛亥通共)으로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 시전상인이 가진 금난전권을 폐지하였다.

 


조선 후기 시전(市廛)이 가졌던 일종의 독점적 전매 특권. 곧 시전을 문란하게 하는 난전행위(亂廛行爲)를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이 금난전권이었다. 시전에 금난전권이 주어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인조 때 관부(官府) 가 막대한 국역(國役) 부담을 육의전(六矣廛)에게 부여한 댓가로 주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금난전권은 17세기 상업계의 변화 속에서 대두되어, 시전상인이 신흥 비시전계(非市廛系) 사상(私商)의 성장을 억 제하고 그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관부와 결탁해 획득한 독점 상업체제라는 데 의미가 있으며 또한 전통적 상업구조가 와해되는 초기 단계에서 성립된 특권적 매점 상업권이라는 점에서 경제사적 의미가 있다. 당시 관부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의 전란이 있은 뒤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시전에서 좀더 높은 이율의 시전세 (市廛稅)를 받아야 했으므로 그 댓가로 금난전권을 주었다. 그리하여 이것은 시전측으로서는 신흥상인층의 배제와 이윤독점의 법적인 바탕이 되었고 정부측으로서는 상업계의 파악과 세수입의 증가를 통한 재정난 해결방책이 되었다 난전 금지는 조선의 무본억말(務本抑末)이란 상업정책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후기에 와서 상업의 발전과 아울러 국가재정 확보의 필요성을 위해 시전을 보호하는 입장으로 바뀌어 금난전권을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최초의 금난전 권은 처음에 관부의 어용상인이며 최대의 국역부담자인 육의전에게만 주어졌으나, 병자호란 후 청으로의 진공물(進 貢物)을 조달하기 위해 당시 성장하고 있던 일반 시전에까지 국역 징수범위를 넓히고 그 댓가로 금난전권을 부여하 게 되었다. 서울 이외의 지방 시전에게는 인정되지 않음이 원칙이었으나 예외로 상업이 번창하던 개성 시전에겐 특 권이 주어졌다. 시전 상인들은 금난전권을 바탕으로 도고상업(都庫商業)을 전개하여 자본을 축적해 나갔으며, 이는 16세기 이후의 상업 발전을 촉진했으나 폐단도 적지 않았다. 일반 사상(私商) 시전이 모방 또는 악용하는 사례가 많았고 또 난전 금지가 자행되어 농민의 간단한 물품교환이나 세민(細民)의 물품이 시장에 반입되는 것까지 방해되었으며, 관부나 권세가의 하인들의 횡포도 컸다. 이러한 폐단은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고 이것이 상업 발전의 저해요인 으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19세기에 와서는 일반 사상도고에 의한 초기 독점의 전개와 이에 대한생산자·소비자 및 소상인의 반독점운동이 나 타나게 된다. 개항 후 개화파의 정책에 이것이 반영되기도 했고, 또 외국 자본의 침투에 의해 독점체제가 해체를 강 요당하면서 금난전권은 붕괴되어 갔다. 마침내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육의전의 금난전권마저 철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