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사외칼럼 손철주 미술평론가
입력 : 2012.10.21 22:55
- '서생과 처녀'… 작자 미상, 종이에 담채, 25.1×37.3㎝,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짝사랑에 우는 여자가 여기 있다. 바야흐로 가을이라 나뭇가지가 앙상하다. 독서하는 서생(書生) 앞에 등잔불이 어른거린다. 유건(儒巾)을 눌러쓴 서생은 차돌처럼 야무지다. 청운의 뜻이 단단한지 공부하는 몸가짐이 곧다. 어느새 낭자 하나가 마당에 들어섰다. 몸을 기둥에 가린 그녀는 책 읽는 소리를 엿듣는다. 댕기 달린 귀밑머리에 윤기가 나는데, 얼굴은 무슨 일로 수심에 겨울까. 묻지 않아도 알겠다. 그녀는 서생이 보고파 밤마다 찾아왔을 테다. 그런데 서생은 웬걸, 돌아앉은 목석이다. 그녀는 한 발을 주춧돌에 올리고 여닫이 문짝을 지긋이 잡는다. 몰라주는 서생이 야속하건만 왔다는 기척을 숨겨야 하니 두근대는 가슴마저 들킬세라 억누른다.
이름 모를 화가가 그린 풍속화다. 풍경은 소박해도 이야기는 애잔하다. 꼿꼿한 저 서생을 보니 조선 중종 때의 도학자 조광조(趙光祖)의 야담이 떠오른다. 서생 시절 조광조는 책 읽는 소리가 낭랑했다. 이웃 처녀가 반해 숨어서 보다 들켰다. 그는 처녀에게 나뭇가지를 꺾어오라고 했다. 그걸로 그 처녀의 종아리를 때리며 야단쳤다. 서생들의 심지가 다들 냉갈령 같다. '초학(初學)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한 옛말이 그래서 나왔다.
서생이 책을 덮고 등불을 꺼야 저 낭자가 발길을 돌릴까. 안타까울 손, 매는 맞지 않아 다행이라고 달랠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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