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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주경철 히스토리아]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28] 콜럼버스의 날/적개공신 손소의 초상 등 5장-이시애의난-남이의 역모사건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28] 콜럼버스의 날

조선일보/오피니언/주경철 서양근대사 

입력 : 2009.10.16 21:53 / 수정 : 2009.10.21 16:41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처음 육지에 상륙한 날은 1492년 10월 12일이었다. 이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그의 '항해일지(Diario)'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콜럼버스는 스페인 국왕의 이름 이니셜이 새겨진 깃발을 들고 몇명의 부하들과 함께 상륙한 뒤 그 땅이 스페인 국왕의 소유라고 선언하는 의식을 치렀다. 벌거벗은 채 살아가던 현지 주민들이 모여들어 이 기이한 행동을 지켜봤지만, 물론 그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곧 콜럼버스 일행은 모여든 사람들에게 붉은 모자·구슬 같은 물건을 주었고, 처음 보는 물건에 감탄한 주민들이 답례로 앵무새와 실타래 등을 주었다. 이런 식으로 그들과 접촉하고 난 후 콜럼버스는 그날 일지에 이런 글을 적었다. "자신들이 들은 것을 아주 빨리 되뇌어 말하는 것을 보니 그들은 똑똑한 하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아무런 종교도 없는 것으로 봐서 훌륭한 기독교도가 되리라고 믿는다. 내가 다시 떠날 무렵에 그들 중 여섯명을 잡아서 국왕 전하께 데리고 가서 말하는 법을 가르치고자 한다."

콜럼버스의 생각대로라면 현지 주민들의 언어는 언어도 아니고, 기독교가 아닌 종교는 종교도 아니다. 그들을 지배하고 노예로 삼으면 될 것이며, 우선 그중 몇명을 짐승 잡아가듯 맘대로 잡아다가 통역 겸 앞잡이로 키우면 좋을 것이다. 이것이 유럽인들의 태도였다. 실제로 이 이후 일어난 일들은 '인디언'이라고 잘못 명명한 이 사람들에 대한 착취와 노예화, 학살이었다.

소위 지리상의 '발견'이나 식민지 '개발'의 실상은 이런 것이었다. 그동안 콜럼버스를 영웅으로 기리던 미국 학교에서도 점차 실상을 숨김없이 가르치고 있다. 최근 신문지상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펜실베이니아 주의 한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이 콜럼버스를 피고로 해서 모의재판을 열었는데, 그 결과는 "스페인 왕실을 빙자하여 절도를 한 혐의"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고 한다. 일부 지역·국가에서 '콜럼버스의 날'을 '원주민의 날' 혹은 '마지막 자유의 날'로 바꾸어 기념하는 것도 이런 흐름과 통하는 일이다.

 

우하하1492년 10월 12일...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처음 육지에 상륙한 날... '콜럼버스의 날'을 '원주민의 날' 혹은 '마지막 자유의 날'로 바꾸어 기념하는 것...^-^

 

상륙한 날의 그의 일지 기록

 "자신들이 들은 것을 아주 빨리 되뇌어 말하는 것을 보니 그들은 똑똑한 하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아무런 종교도 없는 것으로 봐서 훌륭한 기독교도가 되리라고 믿는다. 내가 다시 떠날 무렵에 그들 중 여섯명을 잡아서 국왕 전하께 데리고 가서 말하는 법을 가르치고자 한다."

 

그는 "스페인 왕실을 빙자하여 절도를 한 혐의"를 가진 자...^-^

 

- 2012년 12월25일 화요일 크리스마스날 오전 9시...수산나 -

송첩삼보...구슬갓끈2점, 용모양 백자 연적, 상아집이 있는 작은 칼...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시...^-^

 

송첨삼보 안내문...적개공신 '손소'가 임금에게 받은 보물(?)....^-^ 

 

적개공신 '손소' 초상화...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시

 

적개공신 '손소' 안내문...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이 되었다고 함...^-^

 

[이시애의 난]

[역사] 조선 시대, 1467(세조 13) 함경도 호족() 이시애 일으킨 . 세조 중앙 집권 강화하기 위해 북도() 출신 수령 임명 제한하고 서울에서 관리 파견하자 이에 불만 품고 일으킨 으로, 3개월만에 진압되었다.

 

※남이의 옥(남이의 역모사건, 1468)※

1468년(예종 즉위년) 남이 등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처형한 사건이다.
의산위 휘와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남이는 일찍부터 무반의 기질을 나타내어..
1457년(세조 3년) 17세로 무과에 급제한 뒤 세조의 신임을 받아 여러 무반직을 역임하였다.
1467년 이시애의 반란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의 칭호를 받고 의산군에 봉해졌으며..
건주위의 오랑캐를 토벌한 공로로 공조판서를 거쳐, 27세로 병조판서에 임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종이 즉위한 뒤 한명회, 신숙주 등은 노골적으로 남이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는데..
강희맹, 한계희 등 훈구대신들의 입을 통해 남이가 병조판서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하자..
예종은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고 겸사복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남이가 궁궐에서 숙직하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난 것은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펼칠 징조이다."라고 말하였는데..
병조참지 유자광이 이 말을 듣고 곧바로 남이가 반역을 꾀하였다고 모함하였다.

이 때 남이를 비롯하여 강순·변영수·조경치·문효량 등 약 30명의 관련 인물들이 국문을 받고 처형됬고
그 가족들은 노비로 전락하였다.
이 옥사는 그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순탄하지 못한 과정을 거쳐 즉위한 세조가 왕권강화를 도모하다가
죽고 어린 왕이 새로 즉위하는 등 유동적인 정국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한편으로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원상세력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등장한 신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남이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으나, 그 뒤 사림이 세력을 잡고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유자광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상대적으로 남이의 옥사 역시..
유자광이 조작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일부 야사에서는 남이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영웅적 인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연려실기술』의 기록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남이는 순조 때 그의 후손 남공철의 상소에 의해 신원되었으며..
방계인 남용익·남유용·남공철 등이 빛을 볼 수 있었다.  [출처]다음 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