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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주경철 히스토리아]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85] 바칼로레아/화성문화재 과거시험 재연 2장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85] 바칼로레아

조선일보/오피니언/주경철 서울대교수 서양근대사

입력 : 2010.11.19 22:35

 
세계의 대학 입학제도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프랑스의 바칼로레아가 있다. 이것은 중등교육과정을 잘 수료하여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는지 검정하는 시험으로서, 우리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리세 마지막 학년에 치른다. 이 제도는 나폴레옹 시대인 1808년에 처음 도입되었으니, 무려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바칼로레아는 프랑스의 사회 변화를 반영하며 진화를 거듭해 왔다. 초기에는 대학입학이 상층계급의 전유물이어서, 1808년 첫해에는 과학 영역 바칼로레아 한 종류만 있었고, 구술시험을 통해 31명의 자격자(bachelier)만 배출했다. 1차대전 전야만 해도 여전히 자격자는 7000명에 불과할 정도로 소수였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 큰 변화가 찾아왔다. 이때까지 대학은 대부분 도시 상층민에게만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고, 농촌 지역에서는 초등교육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1960년대에 이러한 사실상의 구분이 사라져서 전국의 모든 학생들이 바칼로레아를 거쳐 대학에 가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1960년에 5만명이었던 자격자는 5년 안에 10만명에 육박했다. 이후 계속 응시자가 늘어나는 동시에 영역도 분화하여 현재는 일반·전문·기술 세 영역의 바칼로레아가 있어서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에 맞춰 한 가지를 선택하여 응시한다.

영역에 관계없이 모든 응시자들이 치르는 철학시험에서는 광범위한 독서와 독창적 사고를 요하는 논술문제가 출제된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식의 문제들은 응시자만 아니라 전 국민이 한 번쯤 이야기하는 화제가 되곤 한다.

이 제도 역시 여러 문제를 안고 있고 많은 개선 요구에 직면하지만, 장구한 기간 큰 틀을 유지하는 가운데 사회의 민주화와 다양화를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품위와 권위를 누린다는 것은 정말로 큰 장점이다. 말로는 교육이 백년대계(百年大計)라고 하면서도 쉴 새 없이 제도를 바꾸면서 그때마다 수험생들과 학부모들을 고통 속에 밀어 넣는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몇 년 뒤에는 또 어떤 새로운 대입제도가 발명될지 궁금하다.

 

 

 

반사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나폴레옹 시대인 1808년에 처음 도입되었으니, 무려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대학입학 제도...^-^

1808년 첫해에는 과학 영역 바칼로레아 한 종류만 있었고, 구술시험을 통해 31명의 자격자(bachelier)만 배출했다.... 현재는 일반·전문·기술 세 영역의 바칼로레아가 있어서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에 맞춰 한 가지를 선택하여 응시한다.

 

영역에 관계없이 모든 응시자들이 치르는 철학시험에서는 광범위한 독서와 독창적 사고를 요하는 논술문제가 출제된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식의 문제들은 응시자만 아니라 전 국민이 한 번쯤 이야기하는 화제가 되곤 한다.

 

장구한 기간 큰 틀을 유지하는 가운데 사회의 민주화와 다양화를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품위와 권위를 누린다는 것은 정말로 큰 장점이다. ...^-^

 

- 2013년 3월14일 목요일...화이트데이...수산나 -

 

바칼로레아가 처음 도입한해인 1808년 즈음 한국의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

 

1804년 순조의 친정시작

1805년 정조실록(正祖實錄) 인간됨.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 시작.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한중록(恨中錄)》 완간

1808년 북청(北靑)˙단천(端川)에서 민란 발생. 《만기요람(萬機要覽)》 완성.

1811년 곡산 등 민란 일어남. 홍경래(洪景來)의 난(평안도 농민전쟁) 일어남. 역법(曆法)을 개정, 시행.

 

홍경래의 난 [洪景來 ― 亂]조선 역사 | 브리태니커

 

1811년(순조 11) 12월부터 1812년 4월까지 약 5개월에 걸쳐 평안도지역에서 홍경래가 주도한 농민봉기.

 

 

평안도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1862년(철종 13)의 임술농민항쟁, 1894년(고종 31) 갑오농민전쟁과 함께 19세기에 일어난 대표적 농민항쟁이다.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에 사회·경제적인 역량이 성장함에 따라 여러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교육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지식인이 양산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사로서 입신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짐에 따라 정부에서는 문무 과거의 급제자를 크게 늘렸지만, 종래의 관직체제와 인재 등용 방식으로는 더 이상 그들을 포섭할 수 없어 불만 세력은 점점 늘어났다.

1728년(영조 4)의 이인좌난()은 주도층이 비록 과격한 소론 중심의 지배층이었지만 중간층 및 하층민들이 적극 참여함으로써 기층 세력의 저항이 격화되는 양상을 반영하였다. 특히 평안도는 활발한 상업 활동을 바탕으로 빠른 경제 발전과 역동적인 사회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지역민들의 불만이 더욱 컸다.

용강의 평민 출신으로 유교와 풍수지리 등을 익힌 지식인이자 용력을 갖춘 장사()인 홍경래는 봉기 10년 전부터 각처를 다니며 사회 실정을 파악하고 동료들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비슷한 성격의 지식인이자 상인인 우군칙, 명망 있는 양반 가문 출신의 지식인 김사용(김창시(), 역노() 출신의 부호로서 무과에 급제한 이희저(), 장사로서 평민 출신의 홍총각()과 몰락한 향족() 출신의 이제초() 등이 최고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이들의 신분과 생업은 매우 다양할 뿐 아니라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지만, 용력을 갖춘 지식인이 총지휘를 하고 저항적 지식인이 참모를 맡았으며, 부호가 봉기 자금을 대고 뛰어난 장사들이 군사 지휘를 담당하는 형태가 되었다. 그 밑에 평양의 양시위(), 영변의 김운룡()을 비롯한 장사들이 군사 지도자로 참여하였다. 이 장사들은 주로 홍경래의 조직활동에 의해 봉기의 인근 지역뿐 아니라 멀리 평안도 남부 및 황해도로부터 모여든 인물들이었으며, 봉기 당시 30~40명 가량이 적극적으로 항쟁하였다.

박천의 김혜철(), 안주의 나대곤() 등 상인들도 아랫사람들을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상인들은 특히 봉기 준비 단계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군졸을 모으는 데 절대적인 성과를 올렸다. 주도 세력은 또한 철산의 정경행(), 선천의 유문제() 등 청천강 이북 각처의 권력을 쥐고 있는 명망가들과 행정 실무자들을 포섭하여 내응세력으로 삼았다. 그들은 봉기군을 맞아들이고 자기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가산의 대정강() 인근 다복동()에 비밀 군사 기지를 세워 내응세력을 포섭하고 군사력과 군비를 마련한 주도층은 1811년(순조 11) 12월 18일에 봉기하였다.

홍경래가 평서대원수(西)로서 본대를 지휘하여 안주 방면으로 진격하고, 김사용은 부원수로서 의주 방면을 공략하고, 김창시와 우군칙이 모사, 이제초는 북진군 선봉장, 홍총각은 남진군 선봉장, 이희저는 도총()을 맡았다. 결약을 맺어 서명한 인원에서 자의가 아니었던 자들을 제외하면 봉기 당시 군사 지휘자와 주요 내응자는 약 6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 군졸은 상인들이 운산의 금광에서 일할 광부들을 구한다는 구실로 임금을 주어 끌어들인 인물들로서, 대개 가산·박천 지역의 땅없는 농민이나 임금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봉기군 본대는 가산·박천·태천을 별다른 저항 없이 즉시 점령하였고, 북진군도 곽산·정주를 점령한 후 어려움 없이 선천·철산을 거쳐 이듬해 1월 3일에는 용천을 점령함으로써 의주를 위협하였다. 점령한 읍에는 해당 지역의 토호·관속을 유진장()으로 임명하여 수령을 대신하게 하였고 기존의 행정 체계와 관속을 이용하여 군졸을 징발하고 군량·군비를 조달하였다. 봉기군은 청천강 이북의 여러 읍에서 기세를 올렸으나 요해처인 영변에서 내응세력이 발각되어 처형되고 경계태세가 정비됨으로써 병영이 있는 안주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고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그 사이 전열을 정비한 안주의 관군과 12월 29일 박천 송림에서 격돌하였으나 패하였고 그날 밤 정주성으로 퇴각해 들어가 농성을 시작하게 되었다. 무자비한 관군의 약탈과 살육이 행해지는 가운데 봉기군 지휘부가 함께 행동하자고 역설하였기 때문에 정주성에는 박천·가산의 일반 농민들도 매우 많이 들어갔다. 북진군 역시 의주의 김견신()·허항()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의 반격을 받은 데다 송림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진격하는 관군에게 곽산 사송평()에서 패전함으로써 군사를 해산하고 주요 인물들은 정주성에 들어갔다. 그 후 정주성의 봉기군은 서울에서 파견한 순무영() 군사와 지방에서 동원된 관군의 연합 부대에 맞서 전투를 계속하면서 오랫동안 성을 지켰으나, 땅굴을 파들어가 성을 파괴한 관군에 의해 1812년 4월 19일 진압되었다. 이때 2,983명이 체포되어 여자와 소년을 제외한 1,917명 전원이 일시에 처형되었고, 지도자들은 전사하거나 서울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지도자들이 내세운 봉기의 이념은 세상을 구원할 정진인()을 받들어 사업을 벌인다는 참위설이 가장 중요한 몫을 하였으며, 토호 관속을 향해서는 지역 차별과 정치적 모순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한편 토지 문제 등 사회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지 못하여 전개 과정에서 일반 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내지 못하고, 단지 곡식 분배 등을 통해 빈민을 불러모으는 데 그친 것이 커다란 한계였다. 그러나 이 반란은 당시 사회 발전을 바탕으로 지배체제의 외부에서 성장한 지식인과 장사들이 주체적으로 봉기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중세 말기의 지배체제를 허물어가는 데 중요한 단계가 되었다. 그 후로도 사회 변혁 세력은 민중들의 희원을 담아 홍경래가 죽지 않고 섬에서 봉기를 준비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김삿갓 -조선시대의 방랑시인. 본관 안동(安東). 본명 병연(炳淵). 속칭 김삿갓. 자 성심(性深). 호 난고(蘭皐). 경기 양주 출생.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익순(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한 죄로 폐족(廢族)이 되었다.

 

2008년 화성문화재...정조대왕 친림 과거시험 재연...과거시험 모습...^-^

 

2008년 화성문화재...정조대왕 친림 과거시험 재연...정조대왕 재연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