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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복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2013년 5월 19일 주일[(홍) 성령 강림 대축일] 

복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게 되면서 이 세상에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증인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로써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는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시어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믿음의 공동체로 거듭 태어났음을 기뻐하며 감사합시다

 

본기도

하느님, 오늘 이 축제의 신비로 모든 민족들과 나라에 세우신 하느님의 온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니, 성령의 선물을 온 세상에 내려 주시어, 복음이 처음 선포될 때 베푸신 그 큰 은혜를 이제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가득 채워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예수님의 승천 뒤 마티아가 사도로 뽑혀 사도들은 비로소 열두 명이 되었다. 오순절에 그들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을 때 불꽃 모양의 혀들이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아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된다(제1독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고, 성령을 통하여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받고 활동하면서 일치를 이룬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문을 모두 잠가 놓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나누신 뒤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1-11

제2독서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3ㄷ-7.12-13<또는 로마 8,8-17>

복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23<또는 요한 14,15-16.23ㄴ-26>

영성체 후 묵상

▦ 사도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근 채 방 안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나약한 그들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의 인사를 나누시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 살면서 많은 고난과 어려움으로 우리 자신 안에 숨으려 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양식으로 오시어 평화의 성령을 내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우리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바치며 성령을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을 우리는 다양한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각 사람에게 주어진 육체적인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만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각 공동체에게는 ‘일치’를 이루시는 분이시고, 냉담 교우들에게는 뜨거운 ‘열정’을 불러일으키시며,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깨달음’을 주십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생명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 정교회의 이냐시오 총대주교가 성령에 대하여 역설한 다음의 내용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하느님께서는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역사적 인물에만 머무르신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복음서는 죽은 문서에 지나지 않으며, 교회란 한낱 조직일 따름이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권위란 다만 지배하는 것일 뿐이고, 선교란 선전에 지나지 않는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전례란 과거의 회상일 따름이며,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노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고, 사도들은 그러한 성령을 받아 교회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바람이 우리 안에 자리 잡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야겠습니다.    

 

수리산성지 최경환 프란체스꼬 성인성지....'예수님상'

 


2013-05-18 오전 10:50:07 조회수 286 추천수 7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5월 18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Jesus said to him,
"What if I want him to remain until I come?
What concern is it of yours? You follow me.”
(Jn.21,22)


제1독서 사도 28,16-20.30-31
복음 요한 21,20-25

아직 돈의 가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어린 꼬마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어떤 어른이 이 꼬마에게 맛있는 것을 사먹으라면서 손에 만 원짜리 지폐를 쥐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꼬마의 형들이 다가와서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돈과 바꾸자고 유혹합니다. 즉, 동전 여러 개로 아니면 돈을 예쁘게 포장을 해서 바꾸자고 하면 어떨까요? 분명 동전 몇 개가 훨씬 적은 가치이고, 예쁘게 포장이 되었다고 해서 돈의 액수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린 꼬마가 손해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유혹하면 대부분 그냥 넘어가고 맙니다. 왜냐하면 돈의 가치를 아직 모르기 때문이지요.

만 원짜리 지폐보다 동전 몇 개가 더 양이 많아 보입니다. 또 포장 안 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보다, 예쁘게 포장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더 멋있어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적 가치는 분명 다르지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본질적인 가치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본질적인 가치를 염두에 두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쓰면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가치라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러나 우리들이 이 본질적 가치를 염두에 둘까요? 그보다는 겉으로 화려하고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주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서 행동 하지 않습니까?

요즘 제 아버지가 입원해 계신 병원으로 매일 찾아가 기도를 해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전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일주일에 한 번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도 벅차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를 찾아뵐 수 있다는 것은 조금 한가해졌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가득 놓여 있으며, 충분히 바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병환 중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뵙고 기도드리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기에 전과 달리 매일 부모님을 찾아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여기에 본질적 가치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어디에 본질적인 가치를 두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가리키며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묻지요. 그러나 그 제자가 어떻게 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즉, 제자의 미래를 아는 것은 본질적인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보다 더 큰 본질적인 가치는 어떠한 순간에서도 당신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에 본질적인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어떠한 순간에도 주님을 향해 자신에게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남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힘의 시험이요, 남을 위해 위리가 고통받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의 시험이다(비숍 웨스콧).


대전교구 합덕성당입니다.



행복하십니까?

어제는 올 여름방학 때에 있을 인천교구 대신학생 하계연수 장소에 다녀왔습니다. 사실 삼일간의 연휴가 시작되기에 교통체증이 심할 것이라는 뉴스를 그 전날 들었지요. 그래서 저는 교통체증을 피하겠다고 새벽 5시 30분에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평소 1시간 3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를 새벽부터 길이 막히기 시작해서 9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본당신부님과 프로그램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본당 미사도 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 때 너무나도 고생했기 때문에, 또 다시 끔찍한 교통체증에 걸리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미사 후 얼른 올라왔습니다.

올라오는데, 맞은 편 하향선 차선은 아직도 엄청나게 막히더군요. 그러나 제가 있는 상행선 차선은 차도 없고 너무나도 한산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천까지 거의 1시간 만에 도착했습니다. 솔직히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맞은편은 길이 막힌다고 답답해하고 있는데, 저는 속도를 내면서 편하게 운전을 하고 있으니까요.

만약 내려올 때에 전혀 막히지 않았다면, 올라가면서 느끼는 기쁨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즉, 내려올 때의 고생이 있었기 때문에 올라갈 때의 편함이 기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행복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고통과 시련이 있기 때문에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측면에서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고통과 시련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