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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문화원·문화해설사·인문학

현종 임금님이 이경석선생에게 내려준 명품 선물 - 보물 제930호

임금이 내려준 명품 선물

 

***** 이경석(李景奭, 1595~1671) 선생의 본관은 전주(). 자 상보(尙輔), 호 백헌(白軒), 쌍계(雙溪),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 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알성문과(謁聖文科 : 조선 시대에 임금이 성균관의 문표에 참배한 뒤 실시한 문과)에 급제한 이후로 현종 때까지 3대에 걸쳐 50년 가까이 임금을 모시면서 병자호란 등의 국난 극복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1641(인조 19)에는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이사(貳師)가 되어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신(斥和臣)으로 심양(瀋陽)에 잡혀가 1년간 봉황성(鳳凰))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현지에서 청나라의 어려운 외교문제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이듬해 엄금하던 명나라 선박이 선천(宣川)에 들어온 일이 알려지자, 그 사건의 전말을 조서하려는 청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서북지역으로 돌아왔으나, 조선의 관련 사실을 두둔하느라 청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영부조영(永不調用 : 영구히 등용되지 못함)의 조건으로 귀국해, 3년 동안 벼슬에서 물러났다.

1646(인조 24)에 효종의 북벌계획이 이언표(李彦標) 등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져 또 사문사건(査問事件)이 일어나게 되었다. 청나라의 사문사는 남별궁(南別宮)에서 이경석과 정승, 판서 및 양사(사헌부, 사간원)의 중신 등을 모두 세워놓고 북벌계획의 전말을 조사, 죄를 다스리고자 해 조정은 큰 위기를 맞았다.

이에 이경석은 끝까지 국왕을 비호하고 기타 관련자들까지 두둔하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국왕과 조정의 위급을 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청나라 사신들로부터 대국을 기만한 죄로 몰려 극형에 처하게 되었으나, 효종의 구명운동으로 간신히 목숨만은 부지하여,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圍籬安置 : 가시 울타리 속에 갇힘)되고, 다시 영부조영의 명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1년 남짓 광주(廣州)의 판교(板橋)와 석문(席門)에서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1653(효종 4)에 겨우 풀려나 영중충주사(領中樞府事)에 임명되었으며, 1659(현종 즉위년)에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된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68(현종 9)에는 신하로서는 최고의 영예로 임금으로부터의 존경과 신임의 표시인 궤장(几杖)을 받았다. 이때 임금은 지팡이와 의자를 내려 주면서 크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그 지팡이와 의자,그리고 잔치를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경기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보물 제930호로 지정되었다.

묘소는 청계산 서남쪽 구릉인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51, 속칭 대감능골에 있으며 경기도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성남 옛 이야기 37~38쪽(한춘섭 · 윤종준 편저]

 

 

[경기도박물관 - 궤장(几杖) : 전주이씨 덕천군파 백헌상공 종중 기탁]

 

  

[경기도박물관 -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 : 전주이씨 덕천군파 백헌상공 종중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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