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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교황강론

[교황님 미사 강론]사목 방문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산타코스 공원 미사 강론(2018.9.23.) /춘천 죽림동 주교좌 성당 11장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s://www.vaticannews.va/en.html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8.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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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 2018923일 주일[연중 제25주일]

[강론 당일 독서와 복음 말씀] 1독서 : 지혜서 2,12.17-20

화답송 : 시편 54(53),3-4.5.6 8(◎ 6)

2독서 : 야고보서 3,16─4,3

복음 : 마르코 복음 9,30-37

http://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8871&gomonth=2018-09-23&missatyp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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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사목 방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2018 9 22-25]

 

장엄미사

 

교황 성하의 강론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산타코스 공원

2018 9 23일 주일

 

 

성 마르코는 그의 복음 말씀의 전체 부분을 주님의 제자들의 가르침에 바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여정의 중간 지점에서 제자들이 그분을 따르는 일에는 시련과 슬픔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분을 따르겠다는 그들의 선택을 새롭게 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세 번 알리셨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예수님 인생의 이 시기를 묘사합니다. 이 세 번 모두 제자들은 당황스러움과 반대를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 번의 각각의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가르침을 남겨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는 방금 이 세가지 상황 중에서 두 번째 상황에 대해 들었습니다. (마르코 복음 9,30-37 참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십자가의 체험을 수반합니다. 때로는 그것은 끝없이 지루하게 계속되는 것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초기의 세대들은 아직도 점령기의 상처들을 견디고 있고 추방당한 사람들에 대한 고뇌를 견디고 있고 결코 다시 되돌아오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불확실성을 견디고 있고 밀고자와 배반자들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치욕을 견디고 있습니다. 지혜서는 우리에게 박해 받는 의인들에 대해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 의인들은 오로지 그들의 선행 때문에 모욕과 벌로 고통을 받습니다(지혜서 2,10-12 참고). 여러분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직접 또는 어떤 가족들의 역사 안에서 우리가 방금 읽은 저 구절에 동질감을 느낄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또한 하느님께서 당신의 편을 들어주시는 것 같지 않았다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린다고 느껴 왔습니까? 카우나스는 이것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다른 것들 가운데에서 시베리아나 빌뉴스와 카우나스의 빈민가에 대한 언급에 대해 아직도 몸서리치면서 리투아니아 전체가 그것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들은 야고보 서간의 구절에서 야고보 사도가 말한 심판의 말을 반복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욕심을 불리고, 그들은 살인까지 하며, 그들은 다투고 싸웁니다.(야고보 서간 4,2 참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슬픔과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난과 역경에 관한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성 마르코는 제자들이 다른 것들에 관심이 있었고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권력과 영광에 대한 갈망은 과거의 기억들을 치유하지 못한 사람들, 어쩌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현재의 임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표징입니다. 그들은 차라리 누가 더 큰 사람인지 논쟁하고 싶어할 것이고 누가 과거에 더 진정성 있게 행동했었는지 그리고 누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특권을 갖고 있는지 논쟁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사를 부인합니다. “그것은 희생과 희망과 일상적 투쟁의 역사이고 봉사에 헌신하고 부단한 노고도 마다하지 않은 삶의 역사이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96)”. 그것은 우리의 믿는 이들과의 접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현실을 구축하는 것에 관여하기를 거부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헛된 자세입니다. 우리는 멀리서 판단만 하고 끊임없이 되어져야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저 영적 지도자들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96 참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무엇에 관해 논쟁하고 있었는지 알면서 권력을 향한 그들의 싸움과 희생을 향한 그들의 거부에 대한 해독제를 그들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더 엄중하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부르셨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셨습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푼돈을 버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오늘 여기에 이 주일 아침에 예수님께서 누구를 우리 가운데 세우시겠습니까? 누가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 가장 가난한 사람이겠습니까? 독립 후 100년 우리가 누구를 따뜻하게 맞이해야 합니까? 누가 우리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고 우리의 노력과 희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줄 사람입니까? 아마도 우리 도시의 소수 민족들일 것입니다. 또는 다른 나라로 이주해야 하는 실업자들일 것입니다. 어쩌면 노인들과 외로운 사람들 또는 자신의 뿌리를 잃어버려서 삶에서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하는 청년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동시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박수 받기를 원하거나 뽑혀서 칭찬 받기를 원하면서 아무도 몰랐다고 주장할 수 없도록, 아무도 내가 그를 못봤어라거나 나는 멀리 있으니까라는 이유로 그건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고 논쟁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곳 빌뉴스의 도시에서 빌니아 강은 물을 가져다 주었고 네리스 강에 기원을 둔 이름을 잃어버렸습니다. 여기 네리스 강 그 자체도 네만 강에 물을 끌어 오면서 그 이름을 잃어 버립니다. 이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전진하는 교회가 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약한 사람들 버려진 사람들 인생의 변방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아가면서 우리 자신을 쏟아 부어야 할 것 같은 때조차도, 우리 자신을 잃어야 할 것 같은 때조차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개입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또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때때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우리의 근심과 걱정들을 한 옆에 놓아 두는 것을, 그리고 알아차리는 것을, 듣는 것을, 그리고 길거리에 버려진 사람들과 동행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알고 있기도 합니다. 때때로 그것은 탕자의 아버지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오자 마자 문을 활짝 열기 위해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문가에서 기다렸습니다(복음의 기쁨 46 참고). 평소에 제자들처럼 우리는 어린 아이를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예수님 당신을 맞이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 안에서 성체 안에서 그분의 작은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을 맞이하기를 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기억을 치유하실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에게 가슴 설레는 도전들과 이정표들을 우리에게 주는 이 현실에서 우리와 동행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그분을 그분의 제자로서 따를 수 있도록 그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가슴 안에 있는 울림을 발견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것, 진실로 인간적인 것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 사람들 특히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우리 자신의 기쁨과 희망으로 느낍니다.( SECOND VATICAN ECUMENICAL COUNCIL, Gaudium et Spes, 1 참고) 이러한 이유로 그리고 공동체로서 우리는 모든 인류와 진정한 그리고 깊은 연대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 여기 이 도시에서 리투아니아를 통해서 그리고 그 역사를 통해서 (SECOND VATICAN ECUMENICAL COUNCIL, Gaudium et Spes, 1 참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기쁜 봉사를 하며 살고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하나된 희망이라는 것을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를 바랍니다.

 



강론 영어 원문 ->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8/documents/papa-francesco_20180923_omelia-lituania-kaunas.html

 

 

 


(위 강론 묵상)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세 번 알리셨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예수님 인생의 이 시기를 묘사합니다. 이 세 번 모두 제자들은 당황스러움과 반대를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 번의 각각의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가르침을 남겨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는 방금 이 세가지 상황 중에서 두 번째 상황에 대해 들었습니다. (마르코 복음 9,30-37 참고)


(마르코 복음 9,30-37 참고)


30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 하시되
34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지혜서는 우리에게 박해 받는 의인들에 대해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 의인들은 오로지 그들의 선행 때문에 모욕과 벌로 고통을 받습니다(지혜서 2,10-12 참고).



(지혜서 2,10-12 참고).


10절     가난한 의인을 억누르고 과부라고 보아주지말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라고 존경할 것없다.

11절     약한 것은 스스로 쓸모없음을 드러내니 우리 힘이 의로움의 척도가 되게 하자.

12절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

           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우리가 들은 야고보 서간의 구절에서 야고보 사도가 말한 심판의 말을 반복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욕심을 불리고, 그들은 살인까지 하며, 그들은 다투고 싸웁니다.(야고보 서간 4,2 참고)


(야고보 서간 4,2 참고)


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고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성 마르코는 제자들이 다른 것들에 관심이 있었고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우리는 멀리서 판단만 하고 끊임없이 되어져야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저 영적 지도자들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96 참고)





(복음의 기쁨 96 참고)


96.    이러한 사고방식은 알량한 권력에 만족하는 자들의 허영을

부추기고, 또한 전쟁을 계속하는 군대의 병졸보다는 차라리 패잔

군의 장군이 되고자 하는 자들의 허영을 키워 줍니다. 우리는 마치

패전한 장군처럼, 치밀하게 기획한 원대한 사도직 활동 계획을 얼

마나 자주 꿈꾸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는 우리 교회 역사을 부인하

는 일이 됩니다.  교회사는 희생과 희망과 일상적 투쟁의 역사이고

봉사에 헌신하고 부단한 노고도 마다하지 않은 삶의 역사이기 때

문에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모든 일은 '우리 이마에 흘린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하여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말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잘못을 저지르며, 영적 지도자나 현명한 목자로서 바깥에서 지시

만 내립니다.  결국 우리는 끝없는 환상에 빠져 우리 신자들의 고통

스러운 현실과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97.    이러한 세속성에 빠진 이들은 높고 먼 데에서 바라보고 그들

의 형제자매의 예언을 거부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을 무시하고

다른 이들의 잘못을 계속 들추어내며 겉치레에 집착합니다.  그들

은 자기 내면과 관심사에만 제한된 지평에 갇혀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 죄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용서에 진심으로 열

려 있지도 못합니다.  이는 선으로 포장된 끔찍한 타락입니다.  이러

한 타락을 피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교회는 끊임없이 자기 자

신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사명을 지속하며 가

난한 이들을 향한 투신을 계속하여야 합니다.  하느님, 껍데기뿐인

영성과 사목으로 치장한 세속적인 교회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이

숨 막히게 하는 세속성은 성령의 순수한 공기를 들이마실 때에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이 없는 종교적 겉

치레 밑에 감춘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복음을 빼

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부르셨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셨습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푼돈을 버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오늘 여기에 이 주일 아침에 예수님께서 누구를 우리 가운데 세우시겠습니까?


그들 가운데에는 동시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박수 받기를 원하거나 뽑혀서 칭찬 받기를 원하면서 아무도 몰랐다고 주장할 수 없도록, 아무도 내가 그를 못봤어라거나 나는 멀리 있으니까라는 이유로 그건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고 논쟁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가슴 안에 있는 울림을 발견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것, 진실로 인간적인 것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 사람들 특히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우리 자신의 기쁨과 희망으로 느낍니다.



춘천 죽림동 주교좌 성당 1...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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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죽림동 주교좌 성당 11...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