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0 ㅣ No.124327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저는 루카 복음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루가복음 1장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은총이 가득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도시도다.’라고 축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상대방을 축복하고,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하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순명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10장의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이야기는 사제인 저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 아픈 사람, 지금 가난한 사람, 지금 외로운 사람이 바로 나의 이웃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제와 레위 사람은 그냥 지나쳤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신앙인은 지금 고통 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15장의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는 감동입니다. 저는 늘 큰 아들처럼 살아왔습니다. 잘못한 이를 용서하기보다는 비난하고 단죄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저의 성실함을 드러내고 싶어 했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한 큰 아들도 사랑하였지만, 돌아온 아들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우리가 뉘우치면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고, 눈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종교의 진정한 가치는 용서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루가복음 19장은 회개는 행동으로 드러나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을 만나고 싶다면 믿음의 나무로, 사랑의 나무로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나누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24장의 엠마오 이야기는 아름다운 그림 같습니다. 지친 제자들과 동행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의 청을 들어주시고, 함께 머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성경 말씀을 전해주시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전해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저는 성가 엠마우스를 참 좋아합니다. 이 성가를 작곡하신 원선오 신부님도 존경합니다. 그분은 일본에서 사목을 하시다가 한국으로 오셨습니다. 한국이 어느 정도 발전을 하자 케냐로 가셨습니다. 케냐에서는 더욱 어려운 수단으로 가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힘든 이들과 동행 하셨습니다. 신부님은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에 계실 때, 매일 아침 등교하는 학생들을 맞이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했던 학생들은 신부님의 따뜻한 눈빛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교문 앞에서 비를 맞고 있는 아이를 보았고, 우산을 들고 아이에게 가셨습니다. 우산을 함께 쓰고 아이를 데려다 주신 신부님을 아이는 기억하였고 신부님의 영향으로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축복과 은총, 사랑과 기쁨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길의 끝은 부활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도들은 죽음의 길도 감사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루카 복음은 제게는 자비로운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는 복음입니다. 저 또한 따뜻한 이웃이 되도록 촉구하는 복음입니다. 사제는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임을 알려 주는 복음입니다. 여러분에게 루카 복음은 어떤 복음이신지요?
00:57 ㅣ No.124325
2018년10월18일 목요일 복음묵상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루카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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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운 일입니다.
잡혀 먹히러 가라는 말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호랑이에게 사자와 싸우러 가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목동의 인도 없이는 풀조차 제대로 뜯어먹을 수 없는 양을 이리의 무리 속으로 집어넣겠다는 것입니다.
양이 의미하는 것은 선하다는 것이고, 힘이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악의 방법이 아니라, 오로지 선한 방법만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순한 양의 모습을 가지고 당신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리가 득실대는 듯한 세상으로 들어가서 말입니다.
생각해봅니다.
1.
보내야 하는 마음과 떠나는 마음.
우리가 어느 입장이 된다고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너무 잘 알면서도, 사랑하는 이를 사지로 보내야 하는 마음.
죽을 줄 알면서도 보내는 이의 마음을 믿고 따라야 하는 마음.
당시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과 제자들이 가졌을 두려움을 상상해봅니다.
사실, 그대로 되었고,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이들의 여정의 끝은 순교라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파견된 여정의 길 안에서, 자신들이 걷는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고,
하여 두려움을 넘어선 희망으로 순교의 칼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지요.
2.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은 그분의 가르침을 사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곡해하고 실행한 오류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교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외교적 폭력 수단을 등에 업고,
이교도라고 불렸던 이들의 땅을 점령했고 강제했던 오류의 역사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남미대륙의 슬픈 가톨릭 교회의 역사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순한 양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로,
복음을 모르는 이들에게 다가가 참 희망을 전하는 것입니다.
선이 너무 아름다워 악이 힘을 잃고 마는 그런 길이어야 합니다.
3.
오늘 날 한국교회를 생각해봅니다.
여기서 구교, 신교를 구분하고 싶지 않습니다.
같은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아닌 교회일 수 있습니다.
목자가 아닌 목자일 수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가 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하는 교회일 수 있습니다.
선한 양의 모습이 아니라,
먹이를 노리는 이리의 눈으로 세상을 농락하는 거짓 교회들일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결국 악마에게 먹힌 교회들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양은 목자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요한10,3 참조)
결코 예수를 팔아 장사하는 짓거리를 해서는 안 됩니다.
목자라고 하는 이들은 자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 수많은 양들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길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금토산 마당바위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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