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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2년 2월 10일 목요일[(백)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오늘 전례

스콜라스티카 성녀는 480년 무렵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성인이 세운 여자 수도원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성녀는 베네딕토 성인과의 영적 담화를 통하여 수도 생활에 대한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입당송

이 슬기롭고 지혜로운 동정녀는 등불을 밝혀 들고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갔네.

<또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얼마나 아름다운가! 주님의 화관, 영원한 동정의 화관을 받았네.

본기도

주님,
복된 동정녀 스콜라스티카를 기억하며 비오니
그를 본받아
저희가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주님 사랑의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솔로몬이 우상 숭배를 허락하자, 주님께서는 진노하시며 나라가 분열될 것이라고 이르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녀가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이교도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신다(복음).

제1독서

<네가 계약을 지키지 않았으니, 이 나라를 떼어 내겠다. 그러나 다윗을 생각하여 한 지파만은 네 아들에게 주겠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1,4-13
솔로몬 임금이 4 늙자
그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다른 신들에게 돌려놓았다.
그의 마음은 아버지 다윗의 마음만큼
주 그의 하느님께 한결같지는 못하였다.
5 솔로몬은 시돈인들의 신 아스타롯과
암몬인들의 혐오스러운 우상 밀콤을 따랐다.
6 이처럼 솔로몬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고,
자기 아버지 다윗만큼 주님을 온전히 추종하지는 않았다.
7 그때에 솔로몬은 예루살렘 동쪽 산 위에
모압의 혐오스러운 우상 크모스를 위하여 산당을 짓고,
암몬인들의 혐오스러운 우상 몰록을 위해서도 산당을 지었다.
8 이렇게 하여 솔로몬은 자신의 모든 외국인 아내를 위하여
그들의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쳤다.
9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진노하셨다.
그의 마음이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그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시어,
10 이런 일, 곧 다른 신들을 따르는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는데도,
임금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11 그리하여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뜻을 품고,
내 계약과 내가 너에게 명령한 규정들을 지키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너에게서 떼어 내어 너의 신하에게 주겠다.
12 다만 네 아버지 다윗을 보아서 네 생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네 아들의 손에서 이 나라를 떼어 내겠다.
13 그러나 이 나라 전체를 떼어 내지는 않고,
나의 종 다윗과 내가 뽑은 예루살렘을 생각하여
한 지파만은 네 아들에게 주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6(105),3-4.35-36.37과 40(◎ 4ㄱ)
◎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 행복하여라, 공정하게 사는 이들,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시고, 저를 찾아오시어 구원을 베푸소서. ◎
○ 백성들이 이민족들과 어울리면서 그 행실을 따라 배우고, 그 우상들을 섬기니, 제 스스로 덫에 걸렸네. ◎
○ 백성들은 자기네 아들딸을 마귀에게 바쳤네. 주님은 당신 백성을 향하여 분노를 태우시고, 당신 소유를 역겨워하셨네. ◎

복음 환호송

야고 1,21
◎ 알렐루야.
○ 너희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여라. 그 말씀에는 너희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다.
◎ 알렐루야.

복음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24-30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아가 8,6-7)와 복음(루카 10,38-42)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복된 동정녀 스콜라스티카를 기리는 저희가 놀라우신 주님을 찬양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님 앞에 엎드려 청하오니
그의 공로를 기꺼워하셨듯이
저희가 바치는 제사도 기쁘게 받아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마태 25,6 참조
보라, 신랑이 오신다. 주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가라.

<또는>

시편 27(26),4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 하느님,
천상 선물을 나누어 받고 비오니
저희가 복된 스콜라스티카를 본받아
예수님의 수난을 깊이 새기며
오로지 주님의 뜻만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우리 주 …….
 

- 지롤라모 투로파, <성 베네딕토와 성녀 스콜라스티카와 함께 있는 로사리오의 성모>, 1692년,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치타두칼레, 이탈리아.

성녀 스콜라스티카(Scholastica, 5세기 말경)는 성 베네딕토의 쌍둥이 누이동생으로 이탈리아 노르치아(Norcia)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성녀는 오빠와 같이 어려서부터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마음을 간직하면서 자랐다. 수도원의 창립자로 유명한 오빠 성 베네딕토는 세속을 떠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엄격한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성녀는 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아름다웠던 성녀가 나이가 차자 많은 청년 귀족이 청혼했다. 하지만 성녀는 조금도 마음의 요동도 없이 혼담을 물리쳤다. 그 까닭은 이미 성녀는 오빠와 같이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성녀의 열성적이 신심에 탄복한 아버지는 그녀의 수도 생활을 허락하게 되었다. 성녀는 자기 몫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오빠의 수도원이 있는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에 작은 초막을 세우고 오빠에게 지도를 받으며 기도 생활을 시작했다. 점차 성녀와 함께 수도 생활을 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모여들었다. 성 베네딕토는 이미 자신의 대수도원에서 실행해 온 대로 여동생의 수도원에도 일정한 회칙을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베네딕토 수녀원이 설립되었고,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이 수녀회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이 되었다. 성녀는 말과 행동으로써 덕행의 길을 걸으며, 언제나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자매들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는 그의 저서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활과 기적에 관한 대화집」에서 성 베네딕토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성녀의 신성함을 증명하는 많은 기적적인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남매는 두 수도원의 가운데에 있는 한 집에서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났다. 성녀는 오빠와 함께 자매들을 지도하는데 필요한 도움과 마음의 양식을 나눌 담화를 나누곤 했다. 이렇게 성녀와 오빠와의 밀접한 관계 이야기는 그림으로도 표현된다. 화가들은 성녀의 모습을 대부분 오빠와 함께 있는 모습으로 나타냈다. 이탈리아 화가 지롤라모 투로파(Girolamo Troppa, 1636-1710)의 작품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로사리오의 성모는 아기예수님과 함께 성인, 성녀 각각에게 묵주를 건네주고 있다. 베네딕토회 수도복 차림을 한 성녀는 두 손을 가슴에 올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보인다.

성녀가 1년에 한 번 오빠와 만나려고 하는 날, 그녀는 성령의 특별한 예시를 받고 오래지 않아 자신이 세상을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 만남의 날이었던 밤, 성녀는 수도원으로 돌아가려는 오빠와 함께 밤 새워 영적생활과 무궁무진한 천상의 행복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다. 오빠는 수도원의 규율을 어길 수 없어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져 심한 폭풍우가 닥쳤다. 이때 오빠는 성녀에게 “하느님께서 너의 뜻을 허락하셨구나” 말하며 “무엇을 했냐?”고 물으니, 성녀는 “오빠는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지만, 주님은 자기 말을 귀담아 들어주었다”고 대답했다.

그 후 3일째 되는 날, 성 베네딕토는 수도원에서 기도하던 중 얼핏 창밖을 내다보니까 동생 수도원에서 백색으로 빛나는 비둘기 한 마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고, 즉시 천국으로 향하는 동생의 영혼임을 확신했다. 이렇게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상징물은 비둘기가 되었다. 이 그림 작품에서도 아래에서 아기 천사는 한 손에 비둘기를 들고 있다. 성녀가 죽은 후 오빠 성 베네딕토가 보았다는 동생의 영혼을 상징하는 비둘기이다. 마치 성녀가 천상에 오른 것처럼 그림은 천상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축일 : 2월 10일
수호성인 : 베네딕토 수도회, 경련을 일으킨 아이들
상징 : 베네딕토 수도복(검은색), 비둘기

[2018년 2월 4일 연중 제5주일 인천주보 3면, 윤인복 소화 데레사 교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오늘의 묵상

 

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강론

 

환대의 사랑

-정주, 환대, 경청, 우정, 치유- 

 

오늘 우리 베네딕도 수도회는 성녀 스콜라 스티카 동정 축일을 지냅니다. 참 아름다운 축일에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환대, 아름다운 영적 우정입니다. 베네딕도와 스콜라 스티카 오누이가 그렇고,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그렇습니다. 어제는 수십년 동안 맞이하는 축일인데 새삼스런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 기막힌 하느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오빠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 오누이 쌍둥이의 생몰연대(480-547)가 같다는 사실입니다. 쌍둥이 남매니 태어난 날은 물론이지만, 죽은 해도 같다는 사실이 참 신비로웠습니다. 이런 경우는 토마스 머튼의 수도원 입회 날짜(1942.12.10)와 방콕에서의 선풍기 감전사로 죽은 날짜(1968.12.10)와 일치함에서 느낀 신비로운 그분 섭리의 손길을 보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 33장과 34장은 두 남매간의 아름다운 환대와 경청, 영적 우정이 참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동생을 환대한 정주의 수도승이자 오라버니인 성 베네딕도는 사랑하는 여동생 성 스콜라스티카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귀원한 것이 좌절당한 채 환대의 장소에서 밤새껏 누이와 영적대화를 나누며 영적우정을 깊이합니다. 

 

바로 33장의 내용이며, 34장은 이 아름답고 복된 만남후 3일만에 세상을 떠난 스콜라스티카요, 같은 해 성 베네딕도 아빠스도 귀천했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입니다. 베네딕도 전기 34장의 아름다운 내용을 인용합니다.

 

‘삼일 후에 성인께서 수도원에 계셨는데,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누이의 영혼이 육신에서 나와 비둘기 형상으로 하늘에 신비롭게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분은 그처럼 영광스런 누이의 모습에 기뻐하시면서, 찬송과 찬미가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고 형제들에게 누이의 임종을 알려 주었다.

 

그분은 즉시 형제들을 보내어 누이의 시신을 수도원으로 모셔와서 당신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둔 무덤에 안장하게 하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두 분의 마음이 하느님 안에서 늘 하나였던 것처럼 그들의 육신도 무덤에서까지 갈라져 있지 않았다.‘(베전34,1-2).

 

얼마나 놀랍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일화인지요! 이를 요약한 오늘 저녁 성무일도 찬미가나 후렴 및 응송, 그리고 마리아의 후렴도 아름답고, 축일 미사때 불렀던 부속가의 가사와 곡도 아름다운 감동입니다. 전문 가사를 인용합니다. 원래의 라틴어를 우리 말로 옮긴 것입니다. 오늘은 틈나는 대로 불러볼 생각입니다.

 

“영원 평화 안식이 성녀 스콜라 스티카에 담뿍 안겨졌도다.

휴식소에 들어가 사랑하던 정배와 포근한 정 누리니,

사랑하는 그이를 얼마나 그리워해 열심히 찾았는고.

 

눈물로써 하늘을 움직여 비오게 해, 오빠 맘 누그렸네.

숭고하신 말씀이 천당복락에 대한 성 베네딕도 말씀,

갈망과 동경이며 동신이신 정배인 그를 일깨우셨네.

 

아름다운 사람아, 사랑하는 신부여, 면류관을 받으라.

백합중에서 살며 가득히 찬 행복속에 맘껏 취하러

강가에서 나아와 천당궁궐로 가는 동녀중의 비둘기

아름다운 향기로 우리 인도하여 영생 얻게 하소서.”

 

얼마나 감미로운 사랑과 아름다움의 부속가인지요! 새삼 축제같은 삶에 축제같은 죽음임을, 또 죽음은 천상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임을 깨닫습니다. 그곳에서 정주의 하느님은 지상생활을 아름답게 끝내고 귀가하는 성인성녀들인 우리를 사랑으로 환대하실 것입니다.

 

환대의 사랑이요 환대의 영성입니다. 정주 수도승 생활을 하는 우리 베네딕도회의 특징적 요소가 환대입니다. 정주와 환대가 한 셋트입니다. 정주의 환대요 사랑의 환대를 통한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사명입니다. 그러니 "정주-환대-경청-우정-치유의 구원"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이런 영적 진리는 오늘 복음에서도 그대로 입증됩니다.

 

여기 요셉 수도원처럼 환대의 집인 나자로-마르타-마리아 삼남매가 정주하는 베타니아 집입니다. 이 환대의 집은 늘 예수님께 활짝 열려 있었음을 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수시로 찾았던 듯 합니다. 환대는 새삼스런 덕목이 아니라 옛 우리 조상들에게 일상화 되었던 덕목이었습니다. 환대의 집 베타니아 집처럼 전통 한옥집에는 반드시 환대의 방, 사랑방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아파트 집들이 결여하고 있는 손님 접대의 환대의 방, 사랑방입니다. 위키백과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한국식 전통 가옥에 존재하는 손님방의 이름이 사랑방이다. 바깥 사람이 거처하며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다. 기본적으로 한옥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주거는 폐쇄적 구조가 아니기에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마당과 생활공간 사이에서 시야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때문에 손님을 맞이하는 용도 및 대외적 공간과 사적 공간인 안방을 분리하는 사랑채가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환대의 사람, 마리아와 마르타의 환대의 양식이 참 대조적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참 환대의 모범을 봅니다. 우선 주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에 경청함으로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주님을 환대하는 마리아입니다. 둘간의 영적우정도 무르익어 갔을 것이며 마리아는 내적치유의 구원도 체험했을 것입니다.

 

새삼 마리아의 주님 환대와 경청이 우리 수도자들의 성전에서의 공동전례기도 시간에도 그대로 실현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좁은 마음에 반발하는 마르타에 대한 애정 가득 담긴 주님의 충언 말씀도 활동주의에 중독된 이들을 깨우쳐 주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말씀의 경청을 통한 주님 환대의 선택이 우선임을 일깨우며 마리아의 손을 들어 줍니다. 이건 마리아에 대한 편애가 아니라 올바른 분별의 지혜입니다. 이래서 미사의 구조도 경청의 말씀전례에 이어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나누는 성찬전례가 뒤를 잇습니다. 환대의 하느님이요 환대의 모범인 하느님입니다. 오늘 호세아서는 광야 여정중의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여기 광야의 ‘아내’가 상징하는 바 이스라엘 백성이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광야 여정중의 우리들입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리라.”

 

우리를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로서 환대해 주시는 주님 환대의 사랑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의 우리 환대와 우리의 주님 환대가 만나는 복된 은총의 미사시간입니다. 수도원의 정주와 환대의 관계가 아름답게 묘사된 제 좌우명 자작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중 한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여

영혼의 쉼터가, 샘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2. 2.10.“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강론

 

마르 7, 24-30(연중 5 목)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지방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정결법’에 대한 시비와 논쟁이 있은 뒤에, 그곳을 떠나 티로라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방인 시리아 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이방인 어머니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고 박절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자녀를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매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냥 거절한 것이 아니라, ‘개’로 취급되는 지독한 모욕과 경멸감을 느끼게까지 합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의 이러한 냉혹한 처사에 당혹스럽고 저항감마저 생깁니다. 참으로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간청이 단순히 거절당한 것만이 아니라 멸시와 모욕을 당하고 배신감마저 들면, 말할 수 없는 큰 상처와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순간이 한편으로는 믿음이 흔들리고 좌절되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신뢰와 믿음을 깊은 곳으로 이끌어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어머니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박절한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절하게 청하는 이 어머니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어옵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을 “강아지”로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진정으로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강아지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지만, 그래서 메시아가 베푸는 구원과 생명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님의 무한한 자비의 부스러기를 입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층 더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를 간청합니다. 마치 백인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겸손하게 자비를 청합니다.

그것은 마땅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손길이 이방인에게도 번져갑니다. 사실,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개’로 여기던 선민사상을 파괴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가 드러난 일이었습니다. 이는 가히 혁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20세기를 빛낸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하느님의 진정한 뜻이 드러난 계시사건”이라 말합니다. 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백성을 죄인과 의인으로 나눈 것에 대한 일침을 가한 사건”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주님!

거절당하고 무시당했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때가, 부르심의 순간임을 알게 하소서!

그 순간이, 당신께서 저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임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 믿음과 사랑을 더 깊게 끌어당기심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의 자비를 믿고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아멘.

 

 

3.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때 믿음이 생긴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방인들과 유대인이 섞여 사는 접경지역 티로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려고 하셨으나, 그분이 오신 것을 어찌 알았는지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엎드려 딸의 치유를 청합니다. 그 여인은 그리스인, 곧 이방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당신 나라인 유대인들에게도 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셨는데 이방인이 와서 청하니 순서상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그러자 그녀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과 희망의 크기를 보시고 유대인들에게도 충분히 주지 못하신 치유의 은총을 그 여인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은 믿고 원하기만 한다면 이방 신을 믿는 사람에게라도 언제든 당신 은총을 주실 준비가 되어계십니다. 이 이방 여인은 어떻게 예수님께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일까요? 분명 자신이 믿는 신들에게 악령을 쫓아달라고 빌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안 되니 이스라엘의 예언자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녀에겐 출구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힘은 희망에서 나옵니다. 완전히 행복해지려는 희망은 한 사람을 유일한 희망이신 그리스도께로 이끕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하루 평균 3,000여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죽여 화장했습니다. 탈출을 시도하는 유대인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총살을 당했습니다. 탈출할 수 없어지자 유대인들은 낙망하여 무기력하게 자기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레히’라는 사람은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같은 유대인들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끔찍한 곳을 탈출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대답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소용없는 일이야. 여기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없어. 다들 총살된 거 보면 몰라? 우리에게 희망은 없어.” 하지만 레리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합니다. 분명히 탈출할 방법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해답은 찾으면 보입니다. 그가 일하는 작업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한 수많은 시체가 트럭으로 던져지고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레리는 이 광경에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레리는 일과가 끝나고 작업자들이 막사로 돌아갈 때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하여 재빨리 트럭으로 올라가서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시체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는 시체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꼼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시체 썩는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차갑게 굳은 시체들이 몸을 덮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트럭이 출발하여 덜컹거리며 수용소 담장 밖으로 나가서 엄청난 크기의 구덩이 안으로 시체들을 쏟아부었습니다. 레히는 밤이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시쳇더미 속에서 빠져나와 알몸으로 40㎞를 달린 끝에 나치의 만행이 없는 자유의 땅에서 빛나는 불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출처: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 마빈 토케이어, 함께북스]
    레히는 어떻게 남들이 절망할 때 희망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러기를 원치 않았을 뿐입니다. 절망에 속하지 않고 희망이 있음을 믿고 싶었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선택입니다. 이 선택을 할 때 항상 자기 자신에게 묻습니다. ‘내가 믿지 않아서 좋은 건 뭔데?’ 우리는 믿음이 증거가 있어서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처음에 믿음과 희망은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 그대로 멈추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이 분명히 있음을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도대체 믿지 않으면 뭐가 좋을까요? 한 봉쇄 수도원에 무신론자가 왔습니다.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고 믿는 것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는 수도원장에게 만약 신이 없다면 당신들이 하는 고생은 다 헛수고가 될 것이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수도원장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지금 수도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하느님을 믿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 뜻대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한 공동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하느님이 안 계셔도 이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산 것에 대해 후회할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부터의 행복을 선택했기에 믿는 것입니다.
    믿지도 희망하지도 않고 하느님 뜻대로 사랑하지도 않는 삶이 참으로 행복합니까? 믿지 않으면 그저 자기 자신을 주님으로 모시며 허무함만 남기는 탐욕과 쾌락과 헛된 명예만을 추구하는 집착의 삶만 남습니다. 당신은 조금이라도 더 생존하기 위해 현세의 고통을 감당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죽어도 상관없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살다가 하느님이 계시면 정말 후회할 사람은 당신일 것입니다.”
    도대체 믿지도 않고 희망하지도 않으며 사랑하지도 않는 삶이 뭐가 좋아서 선택하는 것일까요? 오히려 죽음의 두려움도 없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편을 선택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단 두 개의 선택밖에 없는 것입니다. 희망하든지 절망하든지. 
    어느 유명 박물관 벽면에 사람과 악마가 장기를 두고 있는 아주 특이한 그림이 한 폭 걸려있었습니다. 그 그림에는 악마가 사람을 상대로 ‘체크’(장기에서 ‘장군!’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체스게임 용어)라는 제목이 붙어있었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이 상황을 모면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이 그림을 오랫동안 뚫어지라 바라보더니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악마가 인간에게 ‘장군’을 외치다니 어디 될 법이나 한 말인가?” 그리고 또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갑자기 그 젊은이는 펄쩍펄쩍 뛰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야!” 박물관에서는 큰 소리를 내면 안 되었기에 경비원들이 그들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젊은이는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또 큰 소리로 “이건 거짓말이야!”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또 쫓겨났습니다. 이제는 아예 경비원이 그를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켰습니다. 그가 박물관 문 앞에서 소리 지르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거짓말이야! 저 그림은 거짓이야. 끝장이 아니라 희망은 남아 있어. 아직 한 수가 남아 있단 말이야!” 이 말을 듣고는 사람들이 그 그림 앞으로 가서 그림을 자세히 뜯어보았습니다. 얼핏 악마가 인간을 완전히 이긴 것으로 보이나 그 젊은이에게는 완전한 ‘체크’(장군!)를 당한 것이 아니라 아직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희망은 내가 죽지 않는 한, 내가 포기하기로 하지 않는 한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그저 양자택일일 뿐이고 내가 그 길을 선택할 때 비로소 그 증거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그림 정 중앙에는 인간에게 한 수를 알려주기 위해 안타깝게 훈수를 두려 하는 천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악마는 그냥 체념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믿음은 증거를 따름이 아니라 나의 선택입니다. 사형 집행 때 믿는 사람은 100% 행복하게 죽음으로 나아가고, 믿지 않는 사람은 죽지 않으려고 끝까지 발버둥 친다고 합니다. 믿지 말라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좋아요. 그런데 안 믿어서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성녀 스콜라스티카 

 

4.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3가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가족을 보았습니다. 10명이 넘는 가족이 성당 좌석 1줄을 채우고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손녀는 미사에 복사를 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들과 딸 그리고 손자들이 미사에 참례합니다. 매주 온 가족이 성당에 오는데 마치 잔치에 초대 받아 오는 것 같았습니다. 주일미사만큼은 온 가족이 함께 하자는 할아버지의 의견을 온 가족이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학업 때문에, 아이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봉사를 하기 때문에 가족이 따로 미사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대학교에 갈 때 까지는 성당에 가지 않아도 눈감아 주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어릴 때는 성당에 나오지만 대학교에 가면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말이 서투르기 때문에, 미사가 재미없어서 안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바쁘기 때문에, 먹고 사는 일이 힘들기 때문에 신앙은 나중으로 미루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온 가족이 매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것을 보니 마치 천연기념물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모습이 당연했지만, 지금은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아이의 출산을 집에서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아이의 출산은 대부분 병원에서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자연분만을 주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수술을 통해서 아이가 태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전에는 신앙교육은 집에서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함께 하였습니다. 성경도 읽고, 묵주기도를 같이 바쳤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기일이 오면 연도를 하였습니다. 가족들의 이름은 세례명으로 불렀습니다. 따로 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신앙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은 문제 삼지 않았어도, 성당에 가지 않거나, 기도하지 않으면 엄하게 꾸중을 하였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보다는 천상에서의 영원한 삶이 더욱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합니다. 어쩌면 세상의 것들이 조금씩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신앙에 스며들은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솔로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지혜로웠고, 백성을 사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서 성전을 세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고, 재물과 건강을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읽었던 것처럼 솔로몬은 이방인을 위한 성전을 세웠고, 이방인 아내를 위해서 하느님을 멀리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솔로몬 곁에 계셨지만 솔로몬이 하느님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비록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그것이 솔로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만함으로 하느님을 멀리한다면, 이방인의 신을 섬긴다면 비록 왕일지라도, 기름 부음을 받은 선택된 하느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율법을 잘 안다고 하였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도 교만과 허영의 늪에 빠져서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불가의 조주 스님은 장례행렬을 쫓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산 사람을 수많은 죽은 사람이 쫓아가고 있구나." 경허 스님은 세속과 청산은 어느 것이 옳은가, 봄볕 비추는 곳에 꽃 피지 않는 곳이 없구나."라고 말하였습니다. 육신이라는 옷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일 수 있다는 성찰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도, 우리가 떠나야 하는 그곳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한다면 굳이 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윗의 도성이 있었고, 임금이 살았던 곳이기에 중요한 곳이고, 갈릴래아는 호숫가이고, 어부들이 살았던 곳이기에 시골이라는 생각도 어쩌면 주관적인 것 같습니다. 갈릴래아는 많은 상인이 다니는 곳이고, 그곳을 통해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이 전해진다면 갈릴래아가 더 중요한 곳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전통과 율법을 고수하며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변방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시로페니카아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난한 이방인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미처 알지 못하였습니다. 병든 딸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의사에게 딸을 데려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람 따라 들려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성한 사람보다는 아픈 사람을 더욱 사랑한다고 합니다. 가난한 이, 슬퍼하는 이,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다고 합니다. 부자의 헌금보다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더 귀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바리사이의 경건한 기도보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더욱 귀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이방인이었던 여인은 아픈 딸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 아니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솔로몬처럼 지혜가 크지도 않았습니다. 저처럼 사제생활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듣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겸손함을 보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능력, 지혜, 업적, 지위를 모두 모아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겸손과 모든 것을 내맡기는 믿음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이었던 여인의 뜨거운 신앙을 보았습니다. 딸을 위한 엄마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구원은 신분과 직책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은 겸손과 열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5. 매일미사 묵상 결론 기도문

 

2022년 2월 10일 목요일[(백)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말씀의 초대

솔로몬이 우상 숭배를 허락하자, 주님께서는 진노하시며 나라가 분열될 것이라고 이르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녀가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이교도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신다(복음).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주님!

거절당하고 무시당했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때가, 부르심의 순간임을 알게 하소서!

그 순간이, 당신께서 저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임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 믿음과 사랑을 더 깊게 끌어당기심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의 자비를 믿고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아멘.

늘상 저와 동행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기도 봉헌합니다.   

 

성 베네딕토의 동생인 스콜라스티카 성녀는 움브리아(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삶을 살았다. 오빠가 있는 몬테카시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생활했으며, 일년에 한 두 차례 오빠로부터 영신지도를 받고, 플롬바리올라에서 여성들을 위한 수도 공동체를 세웠다. 최초의 베네딕토회 수녀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