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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2년 8월 14일 주일[(녹) 연중 제20주일]/전삼용-조재형-이수철-이영근 신부 강론

[매묵]2022년 8월 14일 주일[(녹) 연중 제20주일]/전삼용-조재형-이수철-이영근 신부 강론

 

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20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대를 받는 표적인 아드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 마음의 비밀을 밝히시어, 사람들이 진리와 은총을 거부하는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시대의 표징을 깨달아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도록 합시다.

입당송

시편 84(83),10-11 참조
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말씀의 초대

치드키야 임금은 대신들의 말을 듣고 예레미야 예언자를 저수 동굴에 가두었다가, 악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에벳 멜렉의 말을 듣고 그를 꺼내도록 한다(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가자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고,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예레 15,10).>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38,4-6.8-10
그 무렵 4 대신들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예레미야는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이따위 말을 하여, 도성에 남은 군인들과
온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자는 이 백성의 안녕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을 구하고 있습니다.”
5 이에 치드키야 임금은 “자, 그의 목숨이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소.
이 임금은 그대들의 말에 어찌할 수가 없구려.” 하고 말하였다.
6 그들은 예레미야를 붙잡아 경비대 울안에 있는
말키야 왕자의 저수 동굴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밧줄로 묶어 저수 동굴에 내려보냈는데,
그곳에는 물은 없고 진흙만 있어서 그는 진흙 속에 빠졌다.
8 에벳 멜렉은 왕궁에서 나와 임금에게 가서 말하였다.
9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저 사람들이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한 일은 모두 악한 짓입니다.
그들이 그를 저수 동굴에 던져 넣었으니, 그는 거기에서 굶어 죽을 것입니다.
이제 도성에는 더 이상 빵이 없습니다.”
10 그러자 임금이 에티오피아 사람 에벳 멜렉에게 명령하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서른 명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죽기 전에 그를 저수 동굴에서 꺼내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40(39),2ㄱㄴ.2ㄷ-3.4.18(◎ 14ㄴ)
◎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
○ 주님께 바라고 또 바랐더니, 나를 굽어보셨네. ◎
○ 외치는 내 소리 들어 주셨네. 나를 멸망의 구렁에서, 더러운 수렁에서 꺼내 주셨네. 반석 위에 내 발을 세워 주시고, 발걸음도 든든하게 잡아 주셨네. ◎
○ 새로운 노래,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을, 내 입에 담아 주셨네. 많은 이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주님을 신뢰하리라. ◎
○ 나는 가련하고 불쌍하지만, 주님은 나를 기억하시네. 저의 도움, 저의 구원 당신이시니, 저의 하느님, 더디 오지 마소서. ◎

제2독서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2,1-4
형제 여러분, 1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2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3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요한 10,27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알렐루야.

복음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기쁨이신 주님,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도와주시어, 온갖 조롱과 수모를 이겨 내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가게 하소서.

2. 세계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자비하신 주님, 세계 지도자들의 마음을 이끌어 주시어, 지나친 욕망과 무분별한 개발로 생태계를 파괴한 지난날을 뉘우치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생태계를 복원하는 데 앞장서게 하소서.

3. 중소기업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중소기업들을 굽어살피시어, 경제와 사회 위기에서도 사업을 이어 가고,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 봉사하는 길을 찾으며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4. 본당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구원자이신 주님, 저희 본당 공동체의 모든 이에게 굳건한 믿음을 주시어, 언제나 깨어 준비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놀라운 교환의 신비를 이루시어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치는 저희가 주님을 합당히 모시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6 : 영원한 파스카의 보증>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는 주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오니
이 세상에서 날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고 있나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으니
성령의 첫 열매를 지닌 저희에게도
파스카 신비가 영원히 이어지리라 희망하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천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130(129),7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또는>

요한 6,5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영성체 후 묵상

▦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말씀의 뜻을 깊이 새기며,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인자하신 주님,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니
저희가 세상에서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늘에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울타리가 느슨하고 모호한 공동체는 매력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흡연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매년 5만 명에 이릅니다. 전 세계적으로 매년 500만 명이 흡연으로 사망합니다. 흡연하고 장소를 옮기더라도 흡연자의 옷이나 머리카락 등에 여러 가지 유해 성분이 묻어와 주변 사람에게 건강 문제를 일으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금연을 시작한 지 20분 후에는 혈압과 맥박이 정상화되며, 12시간 후에는 혈액 속 산소량이 정상화됩니다. 2주가 지나면 혈액순환이 좋아지고 폐 기능이 회복됩니다. 이후에는 여러 질병의 위험이 감소하며, 5~15년부터는 질병 위험이 정상인과 비슷해집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금연을 불가능한 과제로 여깁니다. 혼자 힘으로는 끊지 못해 금연보조제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약으로도 1년 금연 성공률이 20% 전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희소식이 있습니다. 담배를 정말 끊고 싶다면 이곳으로 가면 됩니다. 어떤한 국가인데 앞으로 담배 없는 나라가 될 것 같습니다. 담배를 마약과 같은 것으로 규정해 2009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은 앞으로 담배를 죽을 때까지 구입 할 수 없게 되며, 담배를 파는 가게도 찾기 어려워질 전망입니다. 이런 법을 만들려는 나라가 뉴질랜드입니다. 수십 년 후 뉴질랜드 자체가 금연할 수밖에 없는 국가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금연하고 싶은 사람들, 혹은 담배 연기가 싫은 사람들에게 천국은 어디가 될까요? 바로 뉴질랜드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천국을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세속-육신-마귀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 공동체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것들을 끊고 사랑의 법만으로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니 사탄과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이들은 그냥 교회 안에만 머물면 됩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처음에 가진 재산을 다 팔아 봉헌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그 법이 얼마나 엄했는지, 재산의 반만 바친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벌을 받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 사람을 많이 늘려주신 이유는 돈 걱정하며 살 필요가 없는 사랑의 공동체라는 매력을 풍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가톨릭교회는 그런 매력을 풍기고 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우리가 신자가 얼마냐고 물으면 한국에 한 500만 정도가 된다고 말합니다. 세례만 받으면 공동체 일원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예수님께서 처음에 계획하셨던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배울 수 없습니다. 한 나라가 담배를 팔지 않아야 ‘금연하려면 무조건 뉴질랜드로!’라는 말이 성립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금연하고 싶은 사람에게 매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범위를 좁힌 것이 3년에 한 번 고해성사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무금을 많이 내고 단체에 속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바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신앙생활 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매력을 잃고 또 그 안에서 성장도 할 수 없습니다. 

 

    강형욱의 ‘개는 훌륭하다’에서는 주인의 법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 개들이 많이 나옵니다. 개들이 곧 법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개들에게 자비롭고 개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주인을 물고 개들끼리 서로 물고 싸우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지옥이 되어갑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그건 개들을 방치하는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개를 키우거나 더 데려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에덴동산의 법은 지켜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선악과가 바쳐졌습니다. 교회의 일원이면 당연히 교무금을 내야 합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고백하는 의미도 있고, 본당과 교구가 유지되게 하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그다음은 아담과 하와의 친교였습니다. 그 친교 안에서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법이 실현됩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세례만 받으면, 혹은 3년에 한 번 고해성사만 드리면 신자로 인정하겠다는 태도 자체가 어쩌면 자비롭게 보일 수는 있지만 교회 전체 이미지에는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놓으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세례를 통해 세상에 뿌려지는 성령이십니다. 그러니 성령의 불이 붙여진 사람과 붙여지지 않은 사람, 두 부류밖에는 없습니다. 선이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의 불을 붙여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어디로 와야 하는지 명확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주님께서 세우신 성령의 법이 실현되는 더 선이 명확한 공동체가 되도록 쇄신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인 1972년에는 국민소득 1,000, 수출 100억불이라는 구호가 학교 벽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1980년이 되면 개발도상국인 대한민국이 중진국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표현이었습니다. 외국여행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제품보다는 일본, 독일, 미국의 제품을 선호하였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선진국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2022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35,000불이 넘었습니다. 수출은 6,400억불이 넘었습니다. 경제적인 수치에서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문화와 예술에서도 대한민국은 한류를 전하고 있습니다. ‘기생충, 미나리와 같은 영화가 국제적인 상을 받았습니다. ‘오징어 게임, 킹덤, 이상한 변호사 우병우와 같은 드라마는 세계인들이 즐겨보았습니다. ‘BTS'는 춤과 노래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대한민국은 방역에서도 성공을 보였습니다. ‘추적, 검사, 테스트라는 방식으로 확진자를 줄였고, 의료진의 헌신과 시민들의 협조로 방역에서도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정말 눈떠보니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눈물 젖은 빵을 먹었던,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막아냈던 분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서 선진국의 문턱을 넘었던 나라들이 있습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가 있었고, 아시아의 필리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들은 선진국이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제는 낙후되었고, 시민들의 삶은 어렵습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린 탓도 있습니다. 세계적인 경제대국인 일본은 선진국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 30년 동안 거품이 꺼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선진국은 문턱을 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선진국의 자리를 오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혁신과 도전이 필요합니다. 일본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세계 최고라는 자만심 때문에 혁신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본이 스마트 폰, 스마트 TV에서 발전이 더딘 것은 아날로그에서 세계최고라는 자만심에 취해서 디지털로의 전환을 늦게 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의 연결에서도 일본은 전화선으로 세계최초로 인터넷 망을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전화선으로 인터넷 망을 연결하는 대신에 광케이블로 인터넷 망을 구축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망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기름을 기반으로 하는 차에서는 세계최고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기차 시장으로 진입하는데 늦었습니다. 일본의 거품 붕괴는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있는 대한민국에는 타산지석이 되고 있습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하듯이 대한민국도 혁신과 도전이 없으면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2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교회는 세계교회를 선도하였습니다. 화려한 건축과 예술은 대부분 교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을의 중앙에는 늘 교회가 있었습니다. 신앙은 삶이었고, 신앙은 생활이었습니다. 유럽교회의 제도와 교리 그리고 신학은 현대사회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떠났고 그곳에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유럽교회는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에서는 선진국이었습니다. 유럽의 표본은 교회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사상과 이념의 대립을 겪으면서 두 번의 세계전쟁을 겪으면서 유럽교회는 세계교회를 선도할 힘을 잃었습니다. 유럽교회의 신자들은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에 심취하면서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급격히 고령화 되었고, 성직자들의 수도 줄었습니다. 신자들이 떠난 교회는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유럽교회에 영향을 받았던 북미교회의 사정도 유럽교회와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성직자 수는 줄고 있고, 고령화 된 교회는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교회가 통폐합되고 있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저는 그런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성장하고 발전하였습니다. 10년마다 신자는 100만 명씩 늘었습니다. 많은 교회가 새로 신축되었습니다. 7개의 신학교가 설립되었고 사제들이 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도 최근 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성소자가 감소하고 있고,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으며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변화와 쇄신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눈에 보이는 유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을 물려주려고 하였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신앙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도에 충실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삶입니다. 자녀들의 결혼도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 중에서 선택하도록 하였습니다.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거룩한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배우자가 신앙이 없으면 교리를 받아 세례를 받은 후에 혼인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학력과 능력 그리고 재산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3.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022.8.14.연중 제20주일                                            

예레38,4-6.8-10 히브12,1-4 루카12,49-53

 

하느님의 ‘살아 있는 보물 창고’ 수도공동체

-참 좋은 도반들-

 

“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시편84,10-11ㄱ)

 

어제는 참 행복했던 날이었습니다. 색다른 깨달음 때문입니다. 수도공동체가 순간 “살아 있는 보물 창고”라는, 또 수도형제들이 “참 좋은 도반들”이란 깨달음에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오늘 주일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또 여러 수녀님들이 내일 성모승천대축일을 앞두고 고백성사로 영혼을 깨끗이 한 사실이, 오랜만에 정성가득 담긴 성전의 꽃꽂이가, 또 저녁성가연습시 성모승천 대축일 전례 노래들이 흥겹고 행복하게 했습니다.

 

제 주특기는 자랑입니다. 자랑은 팔불출이라 하는데 제 하느님 자랑, 교회 자랑, 전례 자랑, 형제 자랑은 순수한 사랑의 표현이기에 팔불출엔 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살아 있는 보물 창고” 수도공동체에 속한 “참 좋은 도반들”에 대한 자랑입니다. 하나하나 “신의 한 수” 같은 도반들입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컴퓨터 사용이 익숙치 않아 도움을 청했을 때, 한 “컴퓨터 도사”인 형제가 말끔히 해결해 주었고, 문제가 있을 시 걱정을 했더니 언뜻 스치던 윗 대답이 참 마음 흐뭇하고 든든하게 했습니다.

 

“눈만뜨면 일입니다. 보이는게 일이요, 끝없는 일입니다.”

어제는 멀리 온종일 외출하여 감곡에까지 가서 복숭아를 가져온 형제가, 토요일 오후에도 일하고 돌아왔기에 “일하고 왔느냐?”에 대한 화두같은 위 말이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앞서 형제가 “컴퓨터 도사”라면 이 형제는 “일의 도사”입니다. 수도원내 다방면에 걸쳐 행하는 무수한 일들을 보면 절로 그 일눈에 경탄하게 됩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나름대로 어느 방면에 도사의 경지에 이른 수도형제들이요, 그리하여 “주님을 섬기는 공동체”인 수도원이 “참 좋은 도반들”로 가득한 “살아 있는 보물 창고”임을 감사로이 깨닫고 행복했습니다. 

 

또 엊저녁 오랜만에 길게 참석한 공동휴게 시간 역시 사랑의 소통시간에 “살아 있는 보물 창고”임을 깨닫고, 또 성가연습시 늘 부르던 내용들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아 행복했습니다. 새삼 행복도 은총의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성가연습시 새롭게 와닿은 내용은 전례 자랑이 되겠습니다. 모두가 노래로 흥겹게 부른 찬미 감사기도입니다.

 

“어느덧 새벽해도 꺼져가오니, 빛이요 영원한 빛 성삼이시여,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이여. 그 빛을 우리맘에 부어주소서.”

 

얼마나 아름다운 내용의 찬미가인지요! 이어지는 셋의 후렴에 이은 응송, 계응, 마리아의 노래 후렴 모두가 영혼에 큰 기쁨을 줬습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빌어주라.”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 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

“주 예수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원토록 높이 올리셨도다.”

“해뜨는데서부터 해지는데까지,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주님께 올리는 나의 기도 분향같게 하옵시고, 쳐든 손 저녁제사같게 하옵소서.”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으니, 이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하는도다.”

 

이런 은혜 충만한 내용의 전례가 삶을 만듭니다. 삶의 전례화를 통한 존재론적 변화의 정화淨化와 성화聖化이니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런 전례 은총의 힘이, 공동체의 힘이, 공동체를 통한 주님의 도움이, 어려움을 타개해 가는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공동체를 통한 주님이 세가지 가르침입니다.

 

첫째, “목표를 지녀라!”입니다.

아무리 구름 짙거나 비오는 캄캄한 날에도 그 배후에는 빛나는 태양처럼, 우리의 영원한 희망의 태양, 사랑의 태양인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를 정확히 가르쳐 줍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면서 완성자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참된 목표입니다. 세상에 사랑의 불을, 말씀의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이요,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예수님 사랑의 불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예수님의 평생 내적 고뇌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 또한 받아야 할 온갖 시련과 마침내 죽음의 세례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오심 자체가 분열의 심판을 초래합니다. 파괴적 분열이기보다는 참된 평화에 이르는 과정중의 창조적 분열입니다. 참평화이신 예수님 앞에 거짓평화는 그 정체가 폭로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 자체로 인해 빛과 어둠, 참과 거짓, 생명과 죽음이 둘로 나뉘니 저절로 분열이요 이는 참평화에 이르는 과정의 잠정적 분열, 창조적 분열이니 일희일비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끝없이 인내와 기다림의 믿음중에 묵묵히 잘 견뎌내면 됩니다. 참으로 늘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 목표를 바라볼 때 온갖 분열, 불화, 갈등중에도 꿋꿋히, 반듯하게 주님의 진리로, 주님의 평화로, 주님 사랑의 불로, 주님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절망하지 마라!”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입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입니다. 영어로 “Christ is alive!” 한눈에 감격스럽게 와닿던 말마디가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다!” 우리말로 번역되니 참신하게 안 와닿는 것입니다. “You are ‘the now’ of God” 한눈에 감동으로 와닿던 말마디가 “너희들은 하느님의 ‘지금’이다” 우리말로 번역되니 역시 참신하게 안 와닿으니 참 신기하네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기에,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지금’이기에 결코 절망할 수도 없고 절망하지도 않고 절망해서도 안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목표로 둔 이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절망은 불신에서 기인하는 죄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가 그 좋은 증거입니다. 참으로 사면초가, 고립무원의 절망적 사지에서 주님의 은총으로 구출되는 예레미야입니다. 저수 동굴에 빠져 여지없이 죽게된 예레미야를 주님은 에벳 멜렉을 통해 치드키야 임금을 움직여 살려냅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서른 명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죽기 전에 그를 저수 동굴에서 꺼내어라.”

 

주님을 목표로 하여 주님과 함께 사는 이에게 절망은 없다는 깨우침을 주는 실화입니다. 그러니 예레미야처럼 늘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 사는 이에게 절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주님은 좋은 이웃을 통해 도와 주실 것입니다. 제가 여기 불암산 기슭에 34년 동안 정주하면서 결코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三望했던 기억은 없습니다.

 

셋째, “꾸준하라!”입니다.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 경주입니다. 우보천리牛步千里, 호시우행虎視牛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오늘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도중하차하여 무너져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골인 지점을 눈앞에 두고 무너져 내리면 얼마나 허망하고 억울하겠는지요!

 

하느님은 회개한 자들의 과거는 불문에 붙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지금입니다. 지금부터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것이요, 끝까지 골인지점을 통과할 때 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니라 내일의 희망의 주님을 내다 보며 오늘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합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입니다. 역시 히브리서 저자가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 갑시다.”

 

얼마나 좋은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요 믿음의 증인들인지요! 교회가 바로 하느님의 ‘살아 있는 보물 창고’입니다. 특히 저희로 말하면 하느님의 “살아 있는 보물 창고” 수도공동체 안에 있는 “참 좋은 도반들”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참으로 언제 어디서나 주님 목표를 향하여 바라보며 살게 하고, 절망하지 않게 하고, 한결같이 꾸준하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시편130,7). 아멘.


4. 이영근 신부님 묵상

 

220813. 연중 19주간 토요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오늘 <복음>은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줍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작심하시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벌어진 상황에 따라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부자청년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두 이야기를 다 같이 ‘하느님 나라’에 관련하여 이끌어갑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장(18장)에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3)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친구로 여기건만 제자들은 그들을 업신여기며, 그들이 예수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이처럼,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는 성경에서 무력하고 힘없는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 수 없어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약한 이를 표상하며, 동시에 사회에서 미천하고 버려진 이,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대변합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복음의 뒷 장면에서 자기주장을 하는 부자청년(19,16-22)과 자신들의 성과에 목소리를 높이는 제자들(19,27)과 대조를 이룹니다. 

 

사실, 어린이들에게 우리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우리에게 어린이들이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다가가면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되게 해 주고, ‘작은 자’ 되게 하고,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가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에게 다가가면, 우리가 그들에게 시혜를 베풀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복음화 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단지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나 혹은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교회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단지 ‘어린이에게 다가가라’ 혹은 ‘어린이를 돌보라’고 하지 않으시고 ‘어린이처럼 되어라’ 곧 ‘어린이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주님! 

어린이같이 아래에 있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래에 있기에, 떠받들고 존경하게 하소서. 어린이처럼,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약하기에,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아멘.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