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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2년 11월 10일 목요일[(백)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5개

[매묵]2022년 11월 10일 목요일[(백)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5개

 

오늘 전례

성 대 레오 교황은 400년 무렵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440년 식스토 3세 교황의 뒤를 이은 그는 행정 능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깊이 있는 설교로도 유명하였다. 레오 교황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일치와 정통 신앙을 수호하고자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재임 중인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에서 에우티케스, 네스토리우스 등의 이단을 단죄하고 정통 교회를 수호하였다. 461년에 선종한 레오 교황을 1754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입당송

집회 45,24 참조
주님은 그와 평화의 계약을 맺으시어, 백성을 다스리는 영원한 사제직을 주셨네.

본기도

하느님,
사도들의 반석 위에 세우신 교회를
저승의 세력도 결코 이기지 못하게 하셨으니
복된 레오 교황의 전구를 들으시어
교회를 하느님의 진리로 견고하게 하시며
언제나 평화로이 지켜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맞아들여 주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필레몬서 말씀입니다.7-20
사랑하는 그대여, 7 나는 그대의 사랑으로 큰 기쁨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대 덕분에 성도들이 마음에 생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8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큰 확신을 가지고
그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명령할 수도 있지만,
9 사랑 때문에 오히려 부탁을 하려고 합니다.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10 이러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11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2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13 그를 내 곁에 두어,
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할 생각도 있었지만,
14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5 그가 잠시 그대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를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6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17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18 그가 그대에게 손실을 입혔거나 빚을 진 것이 있거든
내 앞으로 계산하십시오.
19 나 바오로가 이 말을 직접 씁니다. 내가 갚겠습니다.
그렇다고 나에게 빚을 진 덕분에
지금의 그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20 그렇습니다, 형제여!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덕을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이 생기를 얻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6(145),6ㄷ-7.8-9ㄱ.9ㄴㄷ-10ㄱㄴ(◎ 5ㄱ)
◎ 행복하여라, 야곱의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는 이!
○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 주님은 잡힌 이를 풀어 주시네. ◎
○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주님은 이방인을 보살피시네. ◎
○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시온아, 네 하느님이 대대로 다스리신다. ◎

복음 환호송

요한 15,5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20-25
그때에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25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집회 39,6-10)와 복음(마태 16,13-19)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교회를 인자로이 비추시어
어디서나 주님의 양 떼가 불어나게 하시고
목자들은 주님을 충실히 따라 주님 이름에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마태 16,16.18 참조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르셨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거룩한 양식으로 자라나는 교회를 인자로이 이끄시어
교회가 주님 사랑의 섭리로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온전한 신앙을 끝까지 간직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오늘의 묵상

1. 2022년 11월 10일 목요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가 올 시기에 관하여 다룹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고

예수님께서 이에 대답하시는 것으로 복음은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은 비단 바리사이뿐 아니라

당시 많은 유다인에게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 나라가 온 것을 짐작할 수 있는 표징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이때를 추정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여러 사람이 잘못된 표징을 보이며 왜곡된 길로 이끌 텐데,

그들의 꼬임에 걸려 넘어지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십니다.

믿음은 정확하게 계량하거나 측정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여정 또한 그저 막연하고 모호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때로 구체적 표징확실한 계시’, 강렬한 은사를 간절히 구합니다.

이 목마름을 악용하여 인류 역사 안에서 이단과 사이비가 끊이지 않고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가 올 시기에 관한 표징을 해석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과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그리스도인이 애타게 기다리는 종말의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종말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종말은 희망과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 찬 구원의 순간입니다.

그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마주 뵙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여러분은 오늘 어떤 준비를 하겠습니까?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사람을 비웃으며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서울대교구는 명동 계성여고가 있던 자리에 명동밥집을 열었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나누는 밥집입니다. 기업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온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봉사자들이 멀리서 기꺼이 오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며느리가 봉사하러 오기도 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오기도 합니다. 봉사하면서 가족들이 더욱 화목해졌다고 합니다. 동창신부님도 고시촌이 밀집해 있는 대학동에 사랑방을 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는 것을 넘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남이섬으로 가을 소풍도 다녀왔다고 합니다. 추석이나 설날에는 함께 모여서 먹고 마시며 정을 나눈다고 합니다. 친구 역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모험을 하고 있습니다. 친구가 가는 곳에는 놀라운 일들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바위보다 더 단단하게 굳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단단한 바위 위에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 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모험을 하셨습니다. 갈릴래아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남들이 가려고 하지 않았던 길을 기꺼이 가셨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희생의 길이고,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사랑을 기꺼이 하셨습니다. 원수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그 십자가와 사랑이 단단하게 굳어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겨자씨와 같던 하느님 나라는 갈릴래아를 넘어서 온 세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1784년 한국의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박해가 시작되었지만 뜨거운 신앙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103위의 성인이 시성되었고, 124위의 순교자가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순교자들의 무덤은 성지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 사목을 할 때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가정에 충실하고, 이웃에게 모범이 되고, 본인의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분들이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기쁘게 본당 사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를 믿고, 함께 해 주신 분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충남 태안의 천수만에서 가족캠프를 하였고, 베론 성지로 기차 성지순례를 하였고, 절두산 성지까지 도보 순례를 하였고, 멀리 안동까지 연도를 하러 갔었습니다. 저보다 더 성당의 물품을 아끼고, 청소하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매주 교우들을 위해서 점심을 준비해 주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폭우가 내리는 날 성당에 오셔서 창문을 닫고, 하수구에서 오물을 걷어내고, 성모상 앞에서 조용히 기도하시던 분, 남모르게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시던 분, 본당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하시던 분, 기도로서 제게 힘을 주시던 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도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비록 사도들이 믿음이 부족하고, 지혜롭지 못했어도 끝까지 믿어주셨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믿음을 통해서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된 지혜의 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 아닐까요? 겸손의 계란, 희생의 계란, 십자가의 계란, 나눔의 계란은 단단한 바위에 희망의 꽃, 믿음의 꽃, 사랑의 꽃이 자라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는 바로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 주님은 잡힌 이를 풀어 주시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3.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지금 하느님 나라를 잘 키우고 계십니까?

 

캐나다의 한 거리에서 심한 피부병을 앓고 있는 어린 강아지 한 마리가 어미도 보호자도 없이 길거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강아지 모조를 목격한 와그너 씨는 안타까운 마음에 서둘러 근처 병원으로 녀석을 데리고 갔습니다. 
다행히 모조는 와그너 씨 덕분으로 치료받게 되었지만, 어느 사람도 심한 피부병을 앓는 녀석을 선뜻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렸습니다. 모조를 처음으로 구조했던 와그너 씨는 줄곧 녀석의 소식이 궁금했습니다. 모조의 입양 소식을 듣게 될 것이라는 기대로 병원에 연락을 취했던 와그너 씨는 심한 피부병 탓에 모조가 아직 입양처를 찾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와그너 씨는 그 후 며칠을 고민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와그너 씨는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마침내 와그너 씨는 모조의 구조자를 넘어 영원한 가족이 되어주기로 한 것입니다. 오갈 데 없이 병원에 머물던 모조는 와그너 씨가 등장하자 마치 아빠를 기다렸던 아이처럼 세차게 꼬리를 흔들며 와그너 씨 얼굴을 연신 핥았습니다. 간절히 기다리던 가족을 만난 듯 모조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와그너 씨의 집으로 옮겨진 후, 심각한 피부병을 앓았던 모조는 몸과 마음이 점점 건강해졌고 온몸에 뽀송뽀송한 털도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안전한 가족의 울타리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모조는 멋진 성견이 되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출처: ‘어린 강아지는 자신을 구조해 준 남성을 만나자’, 유튜브 채널, 감동실화감동영상]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느님 나라는 다윗 왕국과 같은 외적인 강력한 나라입니다. 그것이 행복이라 여겼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결국 행복입니다. 그들이 행복의 기준을 돈과 쾌락과 힘으로 여긴 것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녀가 부모로부터 받는 사랑으로 느끼는 행복과 같습니다. 짐승들도 주인으로부터 그런 행복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주인을 기억하기 위해 무덤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부모가 나의 부모인지 의심스러울 때 항상 부모가 나를 위해 해 준 희생을 기억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야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 안의 뱀은 끊임없이 하느님께 받은 사랑보다 우리가 부족한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도 바칠 수 없었습니다. 반면 기도는 하느님께 받은 것을 기억하여 감사와 봉헌의 마음이 생기게 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갖지 않기 때문에 우리 안에 떨어진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자라지 못하고 죽고 마는 것입니다. 
 
    2006년 3월 아르헨티나, 셰퍼드 카피탄을 기르던 주인 미구엘 구즈만이 죽어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가족들은 카피탄이 사라진 것을 알았습니다. 가족들은 카피탄이 있을 만한 곳이라면 모두 돌아다니며 애타게 카피탄을 찾았지만 결국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단념하였습니다. 
    일주일 뒤 가족들은 미구엘이 묻힌 카를로스의 공동묘지를 방문하였습니다. 이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미구엘의 무덤 앞을 지키다가 가족들을 발견한 카피탄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내며 가족들에게 달려온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가족들이 카피탄을 단 한 번도 묘지에 데리고 간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묘지 관리인은 개가 나타나 묘지를 한 바퀴 돌더니 자기 주인 묘지 앞에 섰고 아무리 쫓아내도 다시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가족들은 카피탄을 다시 집으로 데려가려고 여러 차례 노력했지만 카피탄은 번번이 집에서 도망쳐 미구엘의 비석 위에 몸을 웅크린 채 발견되곤 하였습니다. 묘지 관리인은 그런 카피탄을 측은히 여겨 먹이를 주고 보살피기 시작하였습니다. 
    카피탄은 매일 저녁 6시가 되면 무덤 위에 올라가 감싸 안 듯 엎드립니다. 그리고 밤새 그 자리에 엎드려 있습니다. 이는 마치 어둠과 추위로부터 주인을 지켜주려는 모습 같습니다. 죽은 미구엘의 아들 데미안 구즈만은 “카피탄이 ‘죽을 때까지 여기 있겠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2018년 10년 넘게 주인의 묘소를 지키던 카피탄은 미구엘의 비석 위에서 엎드려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죽기 4년 전부터 동물병원에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그 와중에도 묘지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주인의 곁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공동묘지의 개’라고 물리던 아르헨티나의 콜리도 있습니다. 콜리도 9년간 주인의 무덤을 지켰습니다. 콜리가 무덤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자 가족들은 밧줄까지 가지고 와 콜리를 묶어 집에 데려가려고 했지만, 콜리는 도망다니며 무덤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돌아가기를 완강히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유족들은 콜리를 데려가기를 포기했고 콜리는 묘지를 집 삼아 묘지 관리인과 친구처럼 지내며 총 9년간, 조용히 주인의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콜리가 죽자 묘지 관리인은 콜리가 주인과 함께 묻히고 싶었을 것이라며 콜리를 화장해 주인 무덤 위에 뿌려주었습니다. 
[출처: ‘죽은 주인 곁을 떠나지 못하고 무덤에서 오열하는 강아지’, 유튜브 채널, 이슈텔러]
 
    이러한 사례는 꽤 많습니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어도 동물도 당연히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희생한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분명 슬퍼할 것입니다. 개가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유는 분명 주인이 자신에게 해 준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기억하기 위해 죽어도 주인의 곁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당신 가족으로 입양하시기 위해 당하신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복음에서 이러한 말씀을 덧붙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루카 17,25)
    우리도 미사 때나 기도 때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그럴수록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 행복이 커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 때 나에게 부족한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뱀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분명 감사로 끝나야 합니다. 자기 봉헌으로 끝나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올바른 예배입니다. 봉헌의 의미가 퇴색하는 전례나 기도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행위가 되지 못합니다.

4.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2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일찍이 다윗은 주님의 현존인 “궤약의 궤”를 모실 집을 짓고 싶어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유다의 멸망과 더불어 파괴되었고 백성들은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 온 유다백성들은 기원전 515년에 제2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 역시 그리스시대와 로마시대에 종교적, 정치적 이유로 두 차례에 걸쳐(기원전 167년과 63년) 다시 유린당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 이후, 기원 후 70년에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로마군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파괴되었다.
 
그리고 기원 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반포되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난 후, 324년에 황제는 자신의 별궁을 성전으로 세우고 봉헌하였다. 오늘은 바로 이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곧 오늘은 로마의 주교좌성당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타락한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진정한 성전이신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제시하십니다. 곧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성전으로 내어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목숨을 거두실 때에는 성전의 장막이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됩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잘 표현해주고 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가 나무에 둥지를 틀듯이, 우리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동굴을 파고 들어와 앉아 계십니다. 당신의 사랑에 응답을 요청하시면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이끄시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는 존재요, 그분의 소유요, 그분의 것이 됩니다.
 
주인은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결코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성전의 봉헌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그분의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가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주님!
성령의 채찍을 휘두르소서.
아버지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삼키게 하소서.
당신이 세우신 성전의 뜰이 장사치와 도둑들의 소굴이 아닌
사랑의 열매를 나누는 나눔 터가 되게 하소서.
저의 영혼이 당신의 사랑을 경배하는 예배와 기도의 집이 되게 하소서.
제 안에 계시는 당신을 경배하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5.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성전 정화

-날마다의 삼중三重 성전 정화-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전으로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거의 천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세계의 각 지역 교회는 오늘 로마의 모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고자 오늘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냅니다. 믿는 이들의 일치의 가시적 중심이 바로 성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성전을 사랑합니다. 고향집을 찾듯이 주님의 집인 성전을 찾습니다.

 

저희 요셉수도원의 가시적 중심 역시 수도원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성전입니다. 저는 물론 우리 수도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 성전이요 수도원 정문에서 성전입구까지 곧장 난 메테세콰이어 가로수 길을 저는 ‘하늘길’이라 칭하며 거의 매일 사진에 담습니다. 

 

아마 1987년 3월19일 수도원 개원후 만35년동안 날마다 24시간 개방된 성전은 여기 수도원 성전 하나뿐일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영혼의 고향집을 찾듯이, 끊임없이 힐링센터를 찾듯이 주님의 평화를 찾아 매일 미사가 거행되는 수도원 성전을 찾습니다. 기도의 집, 평화의 집으로 불리는 성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역시 얼마나 하느님의 집 성전을 사랑하시는지, 파스카 축제를 앞둔 오늘 복음의 격렬한 성전정화 활동을 통해 여실히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 서두의 묘사를 통해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난잡하고 속화되었는지 눈에 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성전속화에 대한 열화와 같은 분노의 표출과 더불어 성전을 정화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비둘기를 파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좀 부드럽게 대하십니다.

 

“이것들을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세상을 성화聖化해야할 세상의 중심인 성전이 타락하여 속화俗化되면 더 이상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겠는지요!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이, 아니 날마다 이뤄져야 할 성전정화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성전정화의 열정을 통해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 삼킬 것입니다.’라는 성경말씀을 연상했다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이 성전정화활동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화두같은 말씀에 동문서답같은 대화가 전개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안에 세우겠다는 말이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아 알고 믿게 되었지만 후대의 우리는 당시의 제자들보다 더 잘 압니다. 

 

이제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전은 물론 비가시적 성전인 주님의 몸인 공동체와 더불어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성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성전에서 거행하는 미사가 우리 모두 삼중적三重的 성전에 속한 신분임을 깨닫게 합니다. 가톨릭 교리서가 이를 명쾌하게 정리합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요한4,24) 드리는 신약의 예배는 어느 한 특정 장소에만 매이지 않는다. 온땅은 거룩하며, 사람의 자녀들에게 맡겨졌다. 신자들이 한 장소에 모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영적 집”으로 세워지도록 “살아 있는 돌”(1베드2,5)이 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생수가 솟아 나오는 영적 성전이다.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2코린6,16)이다.-(교리서1179)

 

그리스도의 몸은 바로 생수가 솟아나오는 영적 성전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의 꿈같은 예언이 그대로 이 거룩한 성전에서 거행되는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여기서 강은 은총의 강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실낙원失樂園이 복낙원復樂園으로 변화되는 놀라는 미사은총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에제키엘의 꿈은 그대로 하느님의 꿈이며 마침내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바로 신약성경의 마지막 묵시록에서 이를 황홀하게 묘사합니다.

 

“그 천사는 또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습니다.”(묵시22,1-2ㄱ)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은총의 강이 이를 앞당겨 맛보게 합니다. 참으로 은혜롭게도 삼중적 성전 현실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가시적 건물의 성전, 비가시적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 그리고 나의 성전입니다. 바오로의 말씀이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성전임을 웅변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코린3,16-17)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해 정화되고 성화되는 건물 성전에 주님의 성전인 교회 공동체요 각자 성전인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지상에서 나그네이며 이방인인 우리 신앙인 모두가 하루하루 날마다 본향집인 천상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름다운 감사송 일부를 나눔으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기도하는 집에 자비로이 머무르시며,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저희가 성령의 성전이 되고, 거룩한 생활로 주님 영광의 빛을 드러내게 하시나이다. 또 눈에 보이는 이 집으로 교회를 드러내시고,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가 나날이 거룩해져, 무수한 자녀들과 함께 기뻐하며, 하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나이다.” 아멘.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그리스도인에게 종말은 희망과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 찬 구원의 순간입니다.(김상우 신부)

 

2. 예수님께서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모험을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도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비록 사도들이 믿음이 부족하고, 지혜롭지 못했어도 끝까지 믿어주셨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믿음을 통해서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조재형 신부)

 

3.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당신 가족으로 입양하시기 위해 당하신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전삼용 신부)

 

4. 저의 영혼이 당신의 사랑을 경배하는 예배와 기도의 집이 되게 하소서.
제 안에 계시는 당신을 경배하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5.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코린3,16-17)(이수철 신부)

 

9.6~12.14일 100일기도 중 제66일(66/100일) 기도

 

주님!

제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임에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 2022년 11월10일(목) 10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