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2월 15일 수요일[(녹) 연중 제6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본기도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8,6-13.20-22
6 사십 일이 지난 뒤에 노아는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밖으로 나가 땅에 물이 마를 때까지 왔다 갔다 하였다.
8 그는 또 물이 땅에서 빠졌는지 보려고 비둘기를 내보냈다.
9 그러나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노아에게 돌아왔다.
온 땅에 아직도 물이 있었던 것이다.
노아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아 방주 안으로 들여놓았다.
10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
11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12 노아는 이레를 더 기다려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자 비둘기는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3 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20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21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22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께 감사 제물 바치나이다.
○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
○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 나의 서원 채우리라. 주님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하네. ◎
○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 나의 서원 채우리라. 주님의 집 앞뜰에서,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2-2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22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제사로 저희를 깨끗하고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그들은 실컷 먹고 배불렀네. 주님이 그들의 바람을 채워 주셨네.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셨네.
<또는>
요한 3,16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지금은 은퇴하신 전임 마산 교구장 배기현 주교님의 책 “늙은 아버지와 고독한 아들”을 읽었습니다. 마산교구 총대리 시절에 교구 주보에 매주 올린 글을 모은 책입니다. 글 하나하나에 주교님의 진솔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글은 맵시와 내용도 중요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진실한 마음은 전해지기 마련입니다. 글 내용 중에 ‘담배’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담배를 배웠다고 합니다. 35년간 담배를 피우던 중 고인이 되신 김수환 추기경님과 1주일을 지낼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추기경님은 학도병 시절에 담배를 배웠고, 3번의 결심 끝에 65세가 되어서 담배를 끊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배 신부! 담배는 그냥 끊는 거야.”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진심’을 느낄 수 있었고 그 뒤로 담배를 끊었다고 합니다. 그런 어느 날 부친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니 담배 끊었다면서? 내 니가 신부가 된 것만 해도 가슴 아픈데 신부가 담배꺼지 끊고 어찌 살끼라고, 도로 푸라!”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담배를 끊으라고 하였던 추기경님의 마음도, 애잔한 마음에 담배를 다시 피우라고 했던 아버지의 마음도 참 따뜻하게 보였습니다. 주교님은 담배는 끊었지만 하느님 품으로 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컴퓨터나 프린터가 작동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이것저것 해보다가 안 되면 마지막으로 해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원’을 끄고 다시 켜는 것입니다. 그러면 컴퓨터도 프린터도 다시 정상이 될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래도 안 되면 전문가를 불러서 손을 봐야 합니다. 전원을 끄고 다시 켜는 것은 컴퓨터와 프린터가 미워서가 아닙니다. 다시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저의 방법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작동이 잘 되지 않듯이 하느님을 닮은 사람에게도 ‘사탄’이라는 바이러스가 들어왔습니다. 그 바이러스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전쟁과 폭력으로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을 파괴하고, 타락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물의 심판’으로 병든 세상을, 타락한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려 하셨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하셨고 물의 심판이 끝난 후에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새로운 세상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쿨’하게 인정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하는 방법을 포기하셨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그것은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외아들은 하느님나라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세상을 말씀하셨습니다. 전쟁, 폭력, 정복으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닌 나눔, 희생,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참된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이 아닌 자비, 인내,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죄와 인간의 잘못 때문에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을 뽑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품종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빛이 입자와 파동의 속성을 가진 것처럼 사람의 마음은 밀과 가라지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가라지의 모습일지라도 뉘우치고 회개하면 밀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밀의 모습일지라도 악의 유혹에 빠지면 가라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기다리는 10처녀의 비유를 통해서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등잔에 기름을 채워서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옹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은 무엇이 될지 모릅니다. 다만 옹기장이의 뜻에 따라서 화병도 되고, 그릇도 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화병이든, 그릇이든 쓰임새에 맞게 사용되면 됩니다. 주어진 나의 삶에 감사한다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소경은 이제 새로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욕망과 교만으로 닫혀있는 우리의 눈을 순명과 겸손으로 새롭게 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
예수님 장탄식의 원인
탄식하시는 예수님, 슬퍼하시는 예수님, 서글퍼하시는 예수님,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십니다. ‘탄식(歎息)’한다는 말의 의미는 ‘한탄하여 한숨을 쉬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앞에 벌어진 실망스런 일을 두고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하며 한탄함을 뜻합니다.
예수님 탄식의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대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메시아니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충족시켜줄 그들만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권력과 전지전능함을 지닌 세속적 왕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상반된 메시아이셨지요. 평화의 왕, 순종의 왕, 종들의 종으로서의 겸손한 메시아였습니다.
또 다른 예수님 장탄식의 원인이 있습니다. 그 숱한 예수님의 기적과 치유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또 다른 그 무엇을 기대했습니다. 보다 더 자극적인 것, 보다 더 큰 것, 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그 무엇을 끝도 없이 요구해왔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사적인 욕구를 상시적으로 채워주는 개인 비서, 해결사, 심부름꾼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 마술사로 격하시키고 만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맺음 방식 안에서 제대로 된 신앙인들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시험해서 안됩니다. 내게 이득되는 것만 청해서도 안 됩니다. 좋은 것, 달콤한 것만 추구해서도 안 됩니다.
매일의 우리 삶 안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모든 상황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이 소중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 우리가 희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 것들도 다 하느님께서 내게 필요하니 주시겠지, 하는 넓은 사고방식이 중요합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당신을 향한 여정에서 무수히 많은 표징들, 기적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과 하직했지만, 우리 모두는 아직도 하느님 자비의 품 안에서 기쁜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이 좋은 세상, 이 좋은 형제들, 이 좋은 피조물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미사성제를 통해 그 크신 하느님께서 이 작고 비천한 인간 존재 안으로 다시금 들어오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표징, 더 큰 기적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마르 8,17)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달마누카지방에서 바리사이들과 표징에 대한 논쟁이 있은 후에, 배를 타고 벳사이다로 건너가던 중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마르 8,14-16)
제자들은 “빵이 없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마르 8,14)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 개의 빵은 대체 어떤 빵인가?
사실, 이 빵은 마르타에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루카 10,42)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직 필요한 하나인 빵’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전부인 하나인 빵’ 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하더라도 이 ‘하나’를 가지지 못하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 되고 마는, 그러나 이 “한 개”만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 되는 그런 ‘빵’입니다. ‘배’가 교회의 표상이라면, ‘빵’은 바로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
대체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누룩”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일컫는다 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고,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행동하며,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라는 위선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소유와 권력과 화려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바로 그들의 그러한 삶의 방식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녀야 할 누룩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씀’이 아니고서야 무엇일까요? 비록 씨앗으로 뿌려지지만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을 그 ‘말씀의 누룩’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말씀이 우리의 모든 삶을 부풀리게 할 것입니다. 바로 이 ‘누룩인 말씀의 빵’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마르 8,17)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2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닫다”(σινιετε)라는 단어는 ‘나란히 서다’, ‘함께(같이) 서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한 개의 빵”을 깨닫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이신 우리 주님, 그리스도’ ‘곁에’ 그리스도와 ‘함께’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마르 8,14)
주님!
실상 필요한 빵은 한 개면 충분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오직 필요한 한 개의 빵입니다.
제게는 이미 당신이 있고, 당신만이 진정 필요한 한 개의 빵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당신이 아니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일 뿐,
제게는 당신만이 전부입니다.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깨달음의 여정-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며 와닿는 첫 느낌은 주님의 인간에 대한 참 깊은 좌절감입니다. 창세기의 하느님이나 복음의 예수님이나 똑같습니다. 이는 때로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나 우리 자신을 보면서도 때로 느끼는 좌절감이기도 합니다. 사람 하나하나가 참 구제 불능같다는 불경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광야인생 제대로 미쳐 살면 성인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괴물이나 폐인이 된다고 주저없이 단언하곤 합니다. 참 사람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평생공부가 사람되는 공부요, 평생공부해도 될까 말까한 참사람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의 인간 창조에 대해 후회하고 아파하는 마음이 실감있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내가 그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마음에 들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사람들같습니다. 그 장구한 세월이 지난 오늘에 주님께서 보셔도 똑같은 인간 현실에 깊은 좌절감을 지닐 듯 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끈 솟았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막연히 남탓 할 것 없이 나부터 참사람이 되고자,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평생 분투의 노력을 다해 보자는 결의입니다.
삶은 부단한 선택입니다. 참사람되고자 하는 선택보다 고귀한 선택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좋은 선택에 이어 부단한 의식적 훈련에 습관화입니다. 참 요즘 제가 많이도 강조한 선택-훈련-습관의 도식입니다. 바로 창세기에서 반갑게 발견되는 모델, 한사람이 바로 노아입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
8절에 이어 생략된 9절까지 내용입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Noah walked with God)’라는 영어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직역하면 평생 하느님과 함께 걸어갔다는 것이니 평생 도반, 평생 동반자 하느님입니다. 앞서 5장 24절에 나오는 에녹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소망이 담겨 있는 서품 상본의 성구이기도 합니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longer here, for God took him)’
참 멋지고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죽음 없이 승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하여 구약에서는 에녹, 모세, 엘리야 셋을 승천한 인물로 여깁니다. 에녹 역시 평생 도반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걷기의 도보 운동을 할 때는 혼자가 아닌 하느님과 함께 걷고 있음을 의식하기 바랍니다. 저는 수도원 하늘길을 걸을 때 그렇게 합니다. 이 또한 복된 영성훈련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가까이 있는 제자들에게 깊은 좌절감을 느끼시는 모습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악한 성향, 부패와 타락의 상징인 누룩에 견주어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주의를 줬는데 동문서답식으로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며 현실적 걱정을 합니다. 제대로 경청하지 않고 기억하지 못하는 완고한 영혼들입니다.
창세기의 악한 사람들이나 복음의 완고한 제자들 대동소이 무지의 악에서, 무지의 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입니다. 참 고질적 인간 마음의 질병이 무지입니다. 무지의 완고함, 탐욕, 질투등 온갖 악의 원천이 무지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 동방영성에서 참 많이 강조하는 무지입니다. 무지의 인간, 인간의 부정적 정의입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무지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이어 5천명을 먹이신 기적, 4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상기시키며, 다시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로 끝맺습니다. 망각은 영성생활의 적입니다. 기억없이는 영성생활도 없습니다. 영성생활은 기억입니다. 주님 은혜 잊지 말고 기억하라 얼마나 많이 강조합니까?
기억하여 현재화하여 살기 위해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 기도를 바치는 수도자들입니다. 말그대로 기억의 훈련입니다. 이래서 본의 아니게 맞이하는 치매가 영성생활에 얼마나 큰 재앙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비관할 것도, 좌절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 포크레인으로 뽑아놓은 거대한 배나무 뿌리들을 보며 장구한 세월, 침묵중에 묵묵히, 살기위해, 뿌리내리기 위해, 하루하루 날마다 얼마나 분투의 노력을 다한 치열한 배나무들이었는지 생각하며 제 믿음의 뿌리를 연상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뿌리를 상징하는 거대한 배나무 뿌리들은 참 좋은 희망의 표지가 되어 우리의 분발의 의욕을 북돋아 줍니다. 다음 시편 말씀과 찬미가의 기도도 참 좋은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40,9)
“진리여 사랑이여 목적이시여, 우리의 다함없는 행복이시여.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바라며, 주님께 도달하게 하여 주소서.”(월요일 3시경)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들이요, 우리 마음 안에 심어주신 하느님 향한 믿음과 희망,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목적없는 여정이 아니라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무지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의 여정, 회개의 여정,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여정에 따라 주님을 닮아감으로 무지에서 해방되어 겸손하고 지혜롭고 순수하고 의로운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성인들입니다. 오늘은 슬라브인의 사도들이라 칭하는 데살로니카 출신 메테디오 주교와 치릴로 수도자 형제의 기념일입니다. 9세기 성인 형제들로 이들의 평생 분투의 노력도 감동적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기존의 서방 수도회의 아버지 누르시아의 베네딕토외에 슬라브의 사도들인 치릴과 메토디우스의 두 수도자와 함께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다 성녀와 스웨덴의 브리지따 성녀, 그리고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함으로 모두 6명 성인이 유럽 대륙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늘 생각하는바 성인들의 공통적 특징은 평생 휴식이 없었다는 것, 평생 고통이 따랐다는 것, 고통중에도 내적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제 읽은 어느 베네딕도회 아빠스의 묵상글도 좋은 힘이, 격려가 되었습니다.
“영성생활은 경주와 같습니다. 아픔에도 불구하고 달리는 것입니다. 결국 아픔도 사라집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 인생경주에서 우리의 사고방식입니다. 내가 다리의 고통을 느낄 때 동료 경주자들도 똑같이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느긋해지고자 하는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통은 느긋하라(slow down)는 신호가 아니라 더욱 힘차게 달리라(speed up)는 신호입니다. 평범함과 위대함은 이런 순간들에 의해 결정됩니다."
영성생활은 경주와 같습니다. 유혹의 순간은 위기이자 기회입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우리는 편안함을(for comfort)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위대함(for greatness)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는 복음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이것이 의로움(righteousness)이요, 이것이 아름답습니다(beautiful).” 프란치스코 교황도 신자들에게 “믿음은 최소한도(minimum)의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최대한도(maximum) 열망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안락함에서 벗어나 부단히 위대함을 추구하는 것, 바로 이것이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의로운 삶이요 아름다운 삶이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의롭고 아름다운 깨달음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끝으로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시 한연을 나눕니다. 죽는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평생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시종여일始終如一 살아가는 삶이 아름답고 위대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2/5(수)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빛이 입자와 파동의 속성을 가진 것처럼 사람의 마음은 밀과 가라지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가라지의 모습일지라도 뉘우치고 회개하면 밀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밀의 모습일지라도 악의 유혹에 빠지면 가라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기다리는 10처녀의 비유를 통해서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등잔에 기름을 채워서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조재형 신부)
2. 매일의 우리 삶 안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모든 상황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이 소중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 우리가 희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 것들도 다 하느님께서 내게 필요하니 주시겠지, 하는 넓은 사고방식이 중요합니다.(양승국 신부)
3. 우리가 지녀야 할 누룩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씀’이 아니고서야 무엇일까요? 비록 씨앗으로 뿌려지지만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을 그 ‘말씀의 누룩’ 말입니다. (이영근 신부)
4. 오늘은 슬라브인의 사도들이라 칭하는 데살로니카 출신 메테디오 주교와 치릴로 수도자 형제의 기념일입니다. 9세기 성인 형제들로 이들의 평생 분투의 노력도 감동적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기존의 서방 수도회의 아버지 누르시아의 베네딕토외에 슬라브의 사도들인 치릴과 메토디우스의 두 수도자와 함께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다 성녀와 스웨덴의 브리지따 성녀, 그리고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함으로 모두 6명 성인이 유럽 대륙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이수철 신부)
[2/5(수)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제 53일 기도]
하느님!
늘 깨어 있게 하소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길이라 알게 하소서.
매사 언제 어디서나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2월15일(수) 6시3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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