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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글·자녀교육·시사

[230623 글/시]삼일수심 천재보(三日修心 千載寶)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정채봉)

[2023년 6월23일(금) 오늘의 글/시]

 

삼일수심 천재보
       (三日修心 千載寶) 

소년은 15살 이었습니다. 

하루는 마을 근처에 있는 
절에 놀러 갔습니다.

​거기서 동자승을 만났습니다. 

동자승은 그에게 명구(名句) 하나를 읊었습니다.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塵)이다."

​뜻을 풀면 이렇습니다. 

사흘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 탐한 재물은 
하루 아침의 티끌이다.

​소년은 상당히 조숙했었나 
봅니다. 

그는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았고, 큰 감동도 받았으며, 
자신이 갈 길이 바로 
이 길임을 직감했습니다.

​소년은 그 길로 몰래 집을 
나와 출가를 하는데, 
15살 소년의 자발적 
출가였습니다.

​그 소년이 누구냐고요?

불교계에서 강백(講伯)으로 이름이 높은 무비(無比) 스님입니다. 

15살 소년은 이제 79살의 
노승이 되었지요.

잠시 카톨릭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예전에 카톨릭에서 주관한 '죽음체험 피정'을 취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줄지어 선 참석자들은 
자기 차례가 되자, 
관 속에 들어가 누웠습니다. 

잠시 후 관 뚜껑이 닫히고 
그 속에서 5분 가량 있다가 다시 나왔습니다. 

그런데 관에서 나온 사람마다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그걸 쭉 지켜보던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저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

저들은 왜 눈물을 흘리는 
걸까?

​저는 취재수첩과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고 줄을 섰지요. 

제 차례가 왔고, 
저도 관 속으로 들어가 
누웠는데 곧이어 관 뚜껑이 닫혔습니다.

​관 뚜껑과 관, 
그 사이로 실처럼 가느다란 빛이 들어왔기에 아주 캄캄한 어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관 뚜껑 위로 천이 
덮였습니다. 

그러자 빛이 하나도 없는 
완전한 어둠 속에 제가 누워 있었습니다.

​'아~, 여기가 무덤이구나!'

​공간은 철저하게 분리돼 
있었고, 
관 속과 관 바깥은 달라도 
아주 달랐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관 바깥 세상에 있는 어떠한  
 것도 이 안으로 가지고 
 올 수가 없구나."

​관 바깥에는 많은 것들이 
있지요.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내가 하는 일, 
내가 늘 보고 읽는 책, 
내가 아끼는 이런저런 물건들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물건도, 
관 속으로 가지고 들어올 순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무엇이 남는 걸까? 

관 속에 누워있는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이 물음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그때 비로소 알겠더군요.

​"아! 마음이구나.

죽어서 관 속에 누운 나에게 남는 것은 마음이고, 
이 관 속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 것도 마음 뿐이구나~~​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거지?

잘 살아야지, 
마음을 잘 가꾸며 살아야지."

​무비 스님의 출가담을 
들으면서, 
저는 관 속에 누웠던 
'죽음체험 피정' 이 떠올라서 몇 자 올려 봤습니다.

​사흘 닦은 마음이 천년의 
보배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구절에 무척 공감이 갔습니다.

왜냐고요?

죽은 뒤에 내가 가져가는 건 마음 뿐이라는 걸 절감
했으니까요.

​아무리 빛나는 보석과 
좋은 자동차도, 
좋은 집도 가지고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오직 하나, 
나의 마음만 가지고 갈 뿐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무비 스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습니다.

​"불교는 마음 닦는 종교 
 즉,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하는데, 

깨닫기 前과 깨달은 後는 
무엇이 달라질까요?"​

무비 스님은 이렇게 
답 했습니다.

​"달라지는 건 없다. 

다만 인간의 삶에서 맛봐야 하는 굉장한 기쁨, 
엄청난 절망, 
잊지 못할 고통 앞에서는 
그 차이가 확 달라진다."

​어떻게 달라지는지 다시 
여쭈었습니다.

"도인일수록 폼 잡지 않는다. 
정말 명경지수(明鏡止水,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의 
마음을 가진 도인은 더 
인간적이다.​

더 슬퍼하고,
더 기뻐하지만, 
그 슬픔과 기쁨에 젖지 
않을 뿐이고, 
기뻐하되 기쁨에 물들지 
않고, 
절망하되 절망에 물들지 
않는다.

​물론 불의를 보면 분노한다. 

그런데 그 분노에 물들지 
않는다.

​그러면 어찌 되겠나. 
슬픔과 고통과 절망 속에 
있어도 '나[我]'가 상(傷)하는 일이 없다."

​'그런 삶은 어떤 삶일까?'를 다시 여쭈었습니다.

​가뿐한 삶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살기가 아주 수월한 삶이 
되며, 
삶도 가뿐하고 죽음까지도 
가뿐하게 느껴진다고 
하셨습니다.

​생사 해탈이 대단한 것이 
아니며, 
그게 바로 생사 해탈이라고 하셨습니다.

삶이 뭔가?
​인 따라 세상에 관광 왔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면, 
당연히 돌아가는 것이다.

​무비 스님은 자신이 입적할 때 다비식도 않겠다고 
했습니다. 

괜히 산 사람들 번거롭게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몸은 그동안 입었던 옷이니, 
그냥 벗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이미 시신기증 서약까지 
해 놓았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비 스님에게 '가뿐한 삶' '물들지 않는 삶'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무비 스님은 바둑에 빗대서 答을 내려주셨습니다.

​"하수들이 바둑을 둘 때 
고수의 눈에는 다 보인다.
어디에 두면 죽고, 
어디에 두면 사는지 말이다."

​곧 죽을 자리인데도 돌을 
놓는 것이 빤히 보인다는 
말씀이시다.

​사람들은 자기 바둑을 둘 때는 수를 놓칠 때가 많지만,
반면에 남의 바둑에 훈수를 둘 때는 수가 잘 보인다. 

훈수 둘 때는 2급 이상 바둑 실력이 더 높아진다고 하지 않던가.

​왜 그렇겠나. 
바둑에 '나'가 없기 때문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에 '나'가 없으면 지혜가 
생기고, 
그래서 인생에서도 고수(高手)가 되는 것이다.

​사흘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라고 했는데, 
무비 스님은 그런 마음을 
어떤 식으로 닦아야 하는지 중요한 힌트를 주셨습니다.

​남의 바둑에 훈수 두듯이, 
한 발 뚝 떨어져서 나의 바둑을 바라보는 여유와 거기서 나오는 지혜로 나의 바둑을 풀어가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 발짝 또 한 발짝 
가다 보면, 
우리의 삶도 가뿐해지고,
수월해질 것이며, 
물들지 않는 삶이 되지 
않을까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말입니다... ​

- 중앙일보(백성호 종교전문.  
                              기자) -

 

인동초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정채봉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