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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8월 26일 토요일[(녹) 연중 제20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8월 26일 토요일[(녹) 연중 제20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시편 84(83),10-11 참조
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주님께서 그대에게 대를 이을 구원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셨다.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
▥ 룻기의 말씀입니다.2,1-3.8-11; 4,13-17
엘리멜렉의 아내 1 나오미에게는 남편 쪽으로 친족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엘리멜렉 가문으로 재산가였는데 이름은 보아즈였다.
2 모압 여자 룻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들로 나가,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 뒤에서 이삭을 주울까 합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그래 가거라, 내 딸아.” 하고 말하였다.
3 그래서 룻은 들로 나가 수확꾼들 뒤를 따르며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 가문인 보아즈의 밭에 이르게 되었다.
8 보아즈가 룻에게 말하였다.
“내 딸아, 들어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갈 것 없다.
여기에서 멀리 가지 말고 내 여종들 곁에 있어라.
9 수확하는 밭에서 눈을 떼지 말고 있다가 여종들 뒤를 따라가거라.
내가 종들에게 너를 건드리지 말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였다.
목이 마르거든 그릇 있는 데로 가서 종들이 길어다 놓은 물을 마셔라.”
10 그러자 룻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말하였다.
“저는 이방인인데,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고 생각해 주시니 어찌 된 영문입니까?”
11 보아즈가 대답하였다.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내가 다 잘 들었다.”
4,13 이렇게 보아즈가 룻을 맞이하여 룻은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가 룻과 한자리에 드니, 주님께서 점지해 주시어 룻이 아들을 낳았다.
14 그러자 아낙네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오늘 그대에게 대를 이을 구원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기려지기를 바랍니다.
15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에게는 아들 일곱보다 더 나은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이 아기가 그대의 생기를 북돋우고 그대의 노후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16 나오미는 아기를 받아 품에 안았다.
나오미가 그 아기의 양육자가 된 것이다.
17 이웃 아낙네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이름은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28(127),1-2.3.4-5(◎ 4 참조)
◎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네 손으로 벌어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 ◎
○ 너의 집 안방에 있는 아내는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너의 밥상에 둘러앉은 아들들은 올리브 나무 햇순 같구나. ◎
○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

복음 환호송

마태 23,9.10 참조
◎ 알렐루야.
○ 너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시고 너희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 알렐루야.

복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놀라운 교환의 신비를 이루시어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치는 저희가 주님을 합당히 모시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30(129),7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또는>

요한 6,5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인자하신 주님,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니
저희가 세상에서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늘에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미국에서 5년간 교포사목을 마치고 한국을 귀국하는 신부님의 송별회식이 있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함께 보냈기에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함께 캠핑가고, 자전거 타고, 여행을 다녔습니다. 이렇게 한분 한분 귀국하는 신부님들을 보내고 보니 이제 저의 차례도 멀지 않았습니다. 송별의 자리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있으니 입니다. 며칠 전에 술에 관련된 단어를 읽었습니다. ‘수작(酬酌)과 짐작(斟酌)’입니다. 한국의 음주문화에서는 상대방에게 술잔을 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권하고, 손님이 술을 마신 후에 술을 권하는 것을 수작(酬酌)이고 합니다.

 

그런데 이 수작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흑심을 품고 상대방에게 접근하는 것을 수작 부린다고 합니다. 더 부정적인 말로 표현할 때는 그 앞에 라는 단어가 붙기도 합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것저것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 수작 부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제가 성무에는 관심이 없고 취미활동에만 전념하면 이 또한 수작 부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의 물을 말씀하시는 것은 진정어린 수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전에는 술잔이 투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술잔이 비었는지 살펴보고 따라주는 것을 짐작(斟酌)’이라고 합니다. 저도 술자리에서는 짐작을 잘 하는 편입니다. 상대방의 술잔이 비워지면 바로 채워주곤 합니다. 성격이 급한 것도 제가 짐작을 잘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짐작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고 관심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짐작의 달인이십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도 미리 방을 예약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식사를 못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성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나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짐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포도주를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짐작 못한 적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는데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시는데 제자들은 영광의 날이 오면 높은 자리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짐작도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짐작도 못한 대사제와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저 자신 술자리에서 짐작은 잘하지만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에는 짐작도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롯과 보아즈는 따뜻한 마음으로 수작하였고, 배려와 관심으로 짐작하였습니다. 롯은 홀로된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셨습니다. 보아즈는 그런 롯이 밭에서 곡식을 얻을 수 있도록 짐작하였습니다. 수작과 짐작이 만나서 롯과 보아즈는 결혼하였고, 이 가정을 통해서 다윗이 태어났고, 다윗의 가문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수작을 하지 못하고 수작을 부리는 바리사이를 비판하셨습니다. 짐작하지 못하고 허세를 부리는 바리사이를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마태오 23,1-12

 

목숨 걸고 막지 못한 우리 역시 역사 앞에 대죄인입니다!

 

따지고 보니 이웃 복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우리나라입니다.

이 세상 수많은 나라들 가운데, 상호 존중하며, 이웃 간의 평화를 지향하는 기품있고 양식 있는 나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국격은 바닥인 데다, 천박하고 폭력적이며, 기본적인 양심도 없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이다지 가까이 있는지?

 

언제는 군사력을 동원해서 이웃들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될 침략과 약탈, 폭력과 살상을

밥 먹듯이 자행하던 일본이었습니다.

그들의 야수 같은 폭력성으로 인해 주변 국가들이 입은 피해는 천년 만 년 동안 싹싹 빌어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오염수 방류를 통한 또 다른 폭력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일본이라는 나라는 인류 역사 안에 대대손손 가장 자신들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집단,

민폐의 끝판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가 아니라 유치원 정도만 다녀도 이건 아니라는 것을 다 아는 사실인데, 백주대낮에

너무나도 당당히 지구촌 마을의 공동 우물인 바다에, 자기 집에서 발생한 냄새 진동하는 폐수를 퍼부은 일본은

인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대죄인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저자들의 머릿속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이 없는지?

대체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는 것인지?

자신들에게 가장 큰 독이 될 오염수를 자신들의 영역에다 자랑스럽게 퍼붓는 꼴은,

마치 열 명이 먹기 위해 라면을 끓인 큰 냄비에 바보 얼간이 같은 한 사람이 침을 뱉은 형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장 먼저, 가장 큰 규모의 피해를 입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입니다.

지구상 수많은 나라들 가운데 가장 앞장서서 방류를 막고자 애를 써야 했습니다.

따지고 보니 합심해서 목숨 걸고 막지 못한 우리 역시 역사 앞에 대죄인입니다.

 

그런데 방류 저지를 위해 제일 선두에서 깃발을 들어올려야 할 사람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경천동지할 노릇입니다.

우리 수산업 종사자들은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며 울부짖고 있는데도, 아무런 생각도 없는 그들은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안심하라는 홍보 동영상을 만들어 널리 유포하고 있습니다.

일본 수상 입장에서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다시 또 있을까요?

 

자기들이 싸질러놓은 오물, 자기들 영토에 묻어 놓던지, 저장해 놓던지, 하는 것은

강아지나 고양이들도 다 하는 행동인데, 그것조차 못하는 사람들이니,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이젠 늦었다고, 이젠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해서는 안 될 사안 같습니다.

어떻게든 인류 공동 우물인 바다를 악의 무리요 인류의 적인 그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 할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말이지 신랄한 표현을 다 사용하시면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이중성을 강하게 질타하십니다.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의 뼈 때리는 표현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 5-7)

 

일본이라는 나라도 똑같은 것 같습니다.

나름 지구촌 사람들 앞에서 G7 회원국, 선진국이라며 어깨에 힘 딱 주고 꼴값을 떨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평화, 자유를 외치지만, 뒤꽁무니로는 군사력 증강을 위해 기를 쓰고 있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저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요즘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저들의 부끄러운 행동으로 인해 곤경에 처한 인류를 굽어보시어,

좋은 해결책을 선물로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825.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한데 묶으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참 사랑을 가져오며, 반면에 아버지의 아들, 딸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

사실, 이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한 생명’이 있을 뿐이며,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회문헌 <새 천년기>(43항)에서 친교의 영성에 대해서 다루면서, 바로 이러한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친교의 영성은 삼위일체의 심오한 신비체 안에서, 타인을 “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하고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비로소 이웃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의 일부가 되고,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암수동형처럼 섞여 혼합되어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의 일부로써 각각의 지체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곧 생물할적인 한 몸을 이루거나 철학적이거나 관념상의 한 몸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의 인격적인 한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인격 안에서 ‘한 몸’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이 됩니다. 그리하여 형제 사랑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 되고, 그 사랑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한 생명을 이룹니다. 곧 사랑의 인격체를 이루게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사고와 인식의 틀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 새로운 인격체인 자기에로의 전환입니다. 곧 남인 이웃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이며, ‘남’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곧 인격체로서 전환이요, 존재론적인 전환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집니다. 이를 요한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1요한 4,12).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내 삶의 스토리는? 내 삶의 콘텐츠는?”

-사랑이신 하느님 중심의 삶-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시편146,1ㄴ)

 

오늘 화답송 후렴처럼 끊임없는, 한결같은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 각자 삶의 아름다운 스토리(story)와 콘텐츠(contents)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줍니다. 일어나서 맨먼저 강론 쓰기전 일별해 보는 인터넷 메인 뉴스입니다. 미사시 청원기도를 위한 준비이기도 합니다. 역시 메인 뉴스는 어제부터 방류한 일본의 핵 오염수였습니다.

 

“일본, 오염수 결국 바다로 쏟아냈다. 올해만 3만t 방류 예정; 2011년 3월 원전 폭발 사고로 인해 발생한 방사능 오염수 134만t을 30년 이상 바다로 흘러 보내는 것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여파로 한,일 양국 모두에서 수산물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관련 소비가 급격히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태평양 침공, 1200일 지나면 남해에 삼중수소 영향”

 

이런 메인 뉴스에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우려와 탄식, 규탄으로 가득한 뉴스였습니다. 참으로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하거나 묵과할 수 없는 일이 국가에 의해 공공연히 자행되는 현실입니다. 참으로 인류의 생존을 위해 앞으로 전개되는 활동에도 예의 주시하여 기도와 동시에 행동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스토리와 콘텐츠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엊그제 어느 교구 사제의 무심코 한 말, “스토리가 있어 재미있어 지루한 줄 모르고 들었습니다.”라는 말마디중 ‘스토리’가 마음에 꽃쳤고 이어 연상되는 ‘콘텐츠’ 말마디와 더불어 어제는 하루 종일 두 말마디를 묵상했습니다. 영어 스토리는 ‘일정한 줄거리를 담고 있는 말이나 글’을, 콘텐츠는 ‘담고 있는 내용물’을 뜻합니다. 번역보다는 스토리와 콘텐츠가 마음에 와닿아 영문자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정말 현대판 예언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언론입니다. 크고 작은 공동체는 물론 정치 지도자들의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여과없이 소개하여 공동체 성원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사실 지금까지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보면 미래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짜 예언자들처럼 가짜 언론, 가짜 뉴스가 얼마나 큰 범죄인지 드러납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내 삶의 스토리는? 내 삶의 콘텐츠는?-사랑이신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몸의 건강에는 최대 관심을 쏟습니다. 이런 몸의 건강에 관심을 기울이듯 하루하루 날마다 내영혼, 내정신, 내마음의 건강에도, 특히 내 삶의 스트리와 콘텐츠에도 최고의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모든 것을 보고 배웁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윗 사람이나 이웃의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은 예외없이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가 좋습니다. 아름답고 고운 꽃이 색깔이나 크기, 모양이나 향기가 다 다르듯 사람도 그러합니다. 세상에 똑같은 성인이나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성인들이나 위인들의 평전을 보면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는 다 다르지만 한결같이 아름답고 품위있고 향기롭습니다.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삶의 중심입니다. 삶의 중심이 좋고 살아 있어 또렷하고 분명해야 스토리도 콘텐츠도 좋습니다. 삶의 중심이 없으면 스토리도 콘텐츠도 없어 겉은 사람이지만 속은 괴물이요 악마요 야수요 폐인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영양가 없는, 공해가 되는, 좋은 스토리와 콘텐츠가 결핍된 영화나 책, 삶은 얼마나 많은지요! 사랑의 스토리와 콘텐츠가 결핍된 식탁은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습니다.

 

어제 주간지에 나온 글 제목도 잊지 못합니다. “인격보다 상품 앞세우는 한국 교육”, 올바른 인생관, 가치관을 통해 스토리와 콘텐츠 좋은 참사람을 우선하는 교육이 아니라 상품을 만들듯 유용성을 잣대로 교육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수한 철부지 괴물을 양산하는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됨의 요소에 “철학, 실력, 용기”중 가치관의 철학이 결핍된 교육인 것입니다. 

 

이런면에서 가톨릭교회의 매일미사는 얼마나 고맙고 중요한지요! 하느님께서 날마다 주시는 최고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하나하나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주면서 주님을 닮은 참 좋은 진선미眞善美와 신망애信望愛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형성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저는 피정 강론중 매일미사는 못하더라도 매일 미사전례문을 꼭 영적독서하듯 선택-훈련-습관의 수행을 강조합니다. 참으로 좋은 스토리와 콘텐츠를 위해 좋은 영적 선택과 훈련, 습관은 너무 중요합니다.

 

이런 참 좋은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위한 결정적인 답을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주십니다. 답은 오직 이 하나뿐입니다. 구약의 613개 율법을 둘로 요약한 경천애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율법교사의 “가장 큰 계명이 뭐냐?”는 불순한 질문에 개의치 않고 주님은 정면돌파의 답변을 주십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서와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

 

작금의 기후재난으로 인해 이웃 사랑은 공동의 집인 지구사랑, 자연사랑으로 확대되야 하는 절체절명의 현실입니다. 구별할 수는 있어도 분리할 수 없는 하나로 연결된 사랑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면 그 피조물인 이웃인 형제들과 자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사랑을 통해 하느님 사랑의 진위가 검증됩니다.

 

오늘부터 룻기의 시작입니다. 성인마다 다 다른 그 고유의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이삭, 모세, 다윗의 스토리와 콘텐츠가 다 다릅니다. 그러니 누구의 삶의 스토리나 콘텐츠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하느님 중심의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풀꽃 시인 나태주의 풀꽃시를 기억할 것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바로 룻기의 룻이 풀꽃같은 성녀입니다. 끝까지 시어머니 나오미와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일편단심 사랑의 고백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로 녹아 있습니다. 참으로 작은 풀꽃처럼 그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도 곱고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제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룻으로 부터 마침내 다윗이 나오고 우리 구원자 예수님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하느님 앞에 갔을 때 하느님은 우리 각자 삶의 스토리를, 콘텐츠를 참으로 살았느냐, 즉 각자 고유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랑의 스토리를, 콘텐츠를 살았는가 점검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 주님의 거룩한 미사시간 최후심판에 앞서 우리 모두 제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점검해 보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시편25;4.5 참조). 아멘.


[8/26(토)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수작을 하지 못하고 수작을 부리는 바리사이를 비판하셨습니다. 짐작하지 못하고 허세를 부리는 바리사이를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조재형 신부)

 

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말이지 신랄한 표현을 다 사용하시면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이중성을 강하게 질타하십니다.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의 뼈 때리는 표현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 5-7)(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서와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이수철 신부)

 

 

[8/26(토)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제 245일 기도]

 

복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위선과 이중성으로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바리사이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외 아무나 '선생님'하며 아부하지 않게 하소서.

세속적으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남 위에 군림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게 하소서. 

낮추는 사람,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8월26일(토) 6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