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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1월 4일 토요일[(백)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1월 4일 토요일[(백)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성인은 1538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의 아로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신심 깊은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쌓는 데 힘썼다. 1560년 외삼촌인 비오 4세 교황이 평신도인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자, 뒤늦게 성직자 교육을 받고 1563년에 사제가 되었다. 그는 밀라노의 대주교로서 교회 개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1584년에 선종한 그를 1610년 바오로 5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입당송

에제 34,11.23-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 떼를 찾아서, 그들을 먹일 목자를 세우리라. 나 주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또는>
루카 12,42 참조
이 사람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다. 주님이 그를 세우시어, 당신 가족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어 주게 하셨다.

본기도

주님,
복된 가롤로 주교에게 심어 주신 굳센 정신을
주님의 백성에게 부어 주시어
교회가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저희도 그리스도를 닮아
그분의 참모습을 세상에 보여 주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유다인들이 배척을 받아 세상이 화해를 얻었다면 그들이 받아들여질 때에는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11,1ㄴ-2ㄱ.11-12.25-29
형제 여러분, 1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물리치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벤야민 지파 사람입니다.
2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당신의 백성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11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그들은 걸려 비틀거리다가 끝내 쓰러지고 말았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으로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이 다른 민족들을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12 그런데 그들의 잘못으로 세상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의 실패로 다른 민족들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이 모두 믿게 될 때에는 얼마나 더 풍요롭겠습니까?
25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를 알아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신비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마음이 완고해진 상태는
다른 민족들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어지고
26 그다음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시온에서 구원자가 오시어 야곱에게서 불경함을 치우시리라.
27 이것이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 그들과 맺어 줄 나의 계약이다.”
28 그들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
29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4(93),12와 13ㄴ.14-15.17-18(◎ 14ㄱ)
◎ 주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
○ 주님, 행복하옵니다, 당신이 깨우쳐 주시고, 당신 법으로 가르치시는 사람! 불행의 날에도 평온을 주시나이다. ◎
○ 주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 소유를 저버리지 않으신다. 재판이 정의로 돌아오리니, 마음 바른 이 모두 그 뒤를 따르리라. ◎
○ 주님이 나를 돕지 않으셨다면, 내 영혼은 침묵의 땅속에 누웠으리라. “내 다리가 휘청거린다.” 생각하였을 때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받쳐 주셨나이다. ◎

복음 환호송

마태 11,29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 알렐루야.

복음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7-11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로마 12,3-13)와 복음(요한 10,11-16)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목자의 열성과 뛰어난 덕행으로 복된 가롤로 주교를 들어 높이셨으니
그를 기념하여 주님 제대에 바치는 예물을 굽어보시고
이 제사의 힘으로 저희도 복음을 실천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요한 15,1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또는>
루카 12,36-37 참조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깨어 있는 종!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고 비오니
저희에게 굳센 정신을 심어 주시어
저희가 복된 가롤로처럼 형제들을 충실히 섬기며
온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지난 휴가 때에 한국에서 동창 신부님들과 지인들을 만났습니다. 만나면 비슷한 질문을 받곤 합니다. ‘언제 한국에 다시 오느냐?’라는 질문입니다. 태어나서 55년을 살았으니 한국에 제게는 조국이고, 모든 것이 익숙한 땅입니다. 가족들이 있고, 함께 사제서품을 받은 동창 신부들이 있고, 언어가 통하고, 모든 것이 편한 곳입니다. 동창 신부님의 사제관에 며칠 머물면서 그 익숙함이 편안함으로 다가왔습니다. 깨끗하고, 정갈하고, 대접받는 느낌입니다. 뉴욕에서 5년 째 살면서 들에 핀 꽃 같다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온실에서 자란 꽃은 안전하고, 아름답고, 풍요롭습니다. 들에 핀 꽃은 비와 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야 합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에는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주 신문을 만들면서 보람이 있지만 늘 긴장이 함께 합니다. 구독자의 감소로 신문사 운영에 대한 부담도 어깨에 짊어져야 합니다. 청소, 세탁, 식사도 혼자 해야 합니다. 뉴욕에서의 삶에서는 들에 핀 꽃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와 충만함이 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라는 삶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삶의 태도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성서의 땅,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땅을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이천년 동안 나라 없이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70년 전에 다시금 정착한 땅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했던 땅입니다. 신앙인들은 그 땅을 성지(聖地)’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들어오기 전에 그 땅에는 팔레스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지붕 두 가족이 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신념과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평화와 자비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삶의 지침과 이정표로 여기는 쿠란과 토라는 이웃을 사랑하고, 이방인을 따뜻하게 돌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평화 땅에서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라는 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라는 을 먼저 생각한다면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입니다. ‘라는 원인을 찾기 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배려와 포용을 선택한다면 그곳은 평화의 도시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참된 평화와 자유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참된 행복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심수봉 씨가 불렀던 젊은 태양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햇빛 쏟는 거리에선 그대/ 고독을 느껴보았나 그대/ 우리는 너나 없는 이방인/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종소리 바람소리 고이고이 잠들던 날/ 먼 하늘에 저 태양이 웃는다./ 모진 바람 거센 파도 가슴속에 몰아쳐도/ 먼 하늘에 저 태양이 웃는다.” ‘우리는 너나 없는 이방인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라는 가사가 마음에 남습니다. 수천 년을 그 땅에서 살아왔던 팔레스타인도, 이스라엘도 결국은 모두 이방인인 것을 왜 서로를 사랑할 수 없는지 안타깝습니다. 18년 전 캐나다에서 지낼 때입니다. 저는 빅터라는 분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였습니다. 친구가 찾아와서 함께 지내다보니 시간이 늦어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빅터에게 양해를 구하고 친구를 집으로 데려왔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빅터는 낯선 손님 때문에 당황을 했고, 저에게 분명한 어조로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존중하니, 당신도 나를 존중하면 좋겠습니다.’ 짧은 말이지만 제게는 깊은 울림을 주는 말이었습니다. 가장 사랑하고, 존중해야 하는 부부도 그렇게 하지 못해서 서로 다투고, 헤어지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우리사회에도 그와 같은 존중과 배려가 없기 때문에 갈등과 분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소유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내려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겸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달인 10월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11월에게 자리를 내 줍니다. 아름다운 색으로 멋을 내던 나뭇잎도 바람이 불면 떨어져 땅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 시작은 겸손입니다. 겸손의 다른 이름은 존중과 배려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들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민족들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이 모두 믿게 될 때에는 얼마나 더 풍요롭겠습니까?”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이런 공동체!>

 

돌아보니 나름 꽤 오랜 시간 윗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입으로는 절대 그렇게 처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외쳤지만, 속으로는 내가 이런 사람이야 하는 마음에 은근슬쩍 교만해지기도 했었습니다.

 

어디가서 혹시라도 홀대받는다고 여겨지면 속이 상했습니다. 큰 행사장이라도 가면 내가 앉을 자리는 어디 쯤인가 고민하느라 뒷골이 다 땡겼습니다.

 

따지고보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질타 당하고 있는 위선자들과 크게 다를바가 없었다는 생각에 잠을 자다가도 이불킥을 하곤 합니다.

 

요즘 저희 피정센터를 찾는 교우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씀입니다.

 

여기오면 세상에 살때와는 다른 특별한 무엇가를 느낍니다. 그것은 세상에서와는 다른 역설의 진리입니다. 높은 사람이 결코 높지 않은, 높은 사람은 낮은 곳에서 섬기는 사람이요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확인하고 갑니다.

 

아마도 저희 형제들이 오시는 교우들에게 기쁘게 봉사하는 소탈하고 진실된 모습이 그렇게 좋아보이는가 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윗사람은 섬기는 사람, 봉사하는 사람, 더 많이 움직이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세상의 논리를 뒤집는 장소, 아랫 사람이 더 존중받고, 더 귀히 여겨지며, 더 사랑받는 장소! 그 장소가 세상 모든 그리스도 공동체의 모습이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합니다.

 

더 이상 지도자들이 내가 누군줄 알아? 하고 외치지 않는 공동체, 윗사람이라고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지 않는 공동체, 윗사람이라고 멋드러진 옷만 걸쳐입고 높은 곳에 앉아 이래라저래라 명령하지 않는 공동체.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103.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루카 14,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바리사이 지도자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하시게 되었는데, 수종을 앓는 사람이 그분 앞에 있었고,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루카 14,1). 이는 마치 꼬투리를 잡아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동원된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사실, 이전에도 이런 일은 있었습니다. 곧 ‘손 오그라든 환자를 치유하신 장면’(루카 6,6-11)과 ‘허리 굽은 여인을 치유하신 장면’(루카 13,10-17)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유하시는 것을 올가미에 걸어 체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으로 몰아넣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루카 14,3)
 
그러자, “그들은 잠자코 있었습니다.”(루카 14,4). 왜냐하면, 이 치유를 인정하면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에 대한 전통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고, 인정하지 않으면 이웃의 불행에도 자비와 선행을 베풀지 않는 비정함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도 하시지 않으시고, “수종을 앓는 이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셨습니다.”(루카 14,4).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 14,5)

그렇지만, 여전히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습니다.”(루카 14,5).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오히려 자신들이 말려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실, 율법에 따라 일을 맡은 관리인들은 안식일에도 정해진 희생제물을 잡고 모든 의식을 행할 수 있도록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또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경우에는 안식일 법규를 지키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안식법의 본질이 생명을 살리는 데 있음을 밝히고, 병을 고쳐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음은 결국 죽이는 것과 같고, 할 수 있는데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결국 해치는 일과 같음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한편, 요한복음사가는 ‘벳자타의 병자를 치유하신 장면’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렛날에 완결된 창조활동과 동시에 완성을 위한 끊임없는 구원활동을 지속하심을 말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이 말씀은 ‘주일’이라 해서, 마냥 게으르기 쉬운 우리에게도 경각심을 심어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루카 14,3)
 
주님!
당신은 결코 사랑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안식일 율법 앞에서도, 올가미를 씌우려 지켜보고 있는 이들 앞에서도,
당신은 결코 사랑을 멈추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합당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합당한 까닭입니다.
사랑스러워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사랑스러운 까닭입니다.
당신은 늘 살아계시기에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듯,
늘 사랑하시기에 사랑이시며 사랑을 베푸십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더불어 사랑의 여정

“사랑의 깊이는 하느님의 깊이”

-내 사랑의 깊이는?-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51,12)

 

새벽 성무일도 독서중 지혜서 마지막 대목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하느님께서 주지 않으시면 달리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지혜가 누구의 선물인지 아는 것이 현명의 표시이다.” 거룩함뿐 아니라 지혜 역시 하느님의 선물이며 이 선물을 살아내는 것이 우리의 평생과제이겠습니다. 악에 대한 처방은 거룩함이요, 무지에 대한 처방은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together) 사랑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랑의 깊이는 하느님의 깊이입니다. 과연 내 사랑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요.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를 생각하면서 언뜻 떠오른 제목입니다. 얼마전 더불어 사랑의 여정에 대해 나눴습니다. 진정한 내적성장은 사랑의 성장이겠고 육신의 성장은 멈춰도 영혼의 성장, 사랑의 성장은 계속되어야 하겠는데 사랑의 성장에는 여전히 초보자처럼 느껴지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사랑의 깊이는 하느님의 깊이를 반영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사랑의 깊이는,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는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태평양 깊이의 사랑도 있겠고, 시냇물 깊이의 사랑도 있을 것입니다. 살아갈수록 깊어지는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11월은 위령성월이자 교황님을 위해 기도하는 달이기도 하며, 어제 제가 명명한 “성인성월(聖人聖月)”이기도 합니다. 어제 인용했던 교황님의 고백을 통해 교황님이 얼마나 사랑의 노력을 기울이는 분인지 깨닫게 됩니다. 88세 노령에도 그 한결같은 열정이 놀랍습니다. 아마도 교황님의 사랑의 깊이 역시 한없이 깊을 것입니다. 다시 교황님 말씀을 인용합니다.

 

“교황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a process)’으로, 그는 목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가게 된다. 이런 과정중에 그는 더욱 사랑이 많아지고, 더욱 자비로워지고, 그리고 무엇보다, 매우 인내하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처럼, 더욱 인내하게 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교황님의 고백은 믿는 모든 이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거룩함은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참내가, 성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받은 거룩함의 선물을 실현시켜가는 하나의 과정이며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을 요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에 소개되는 바오로 사도의 이스라엘 동족에 대한 사랑의 깊이는 얼마나 깊은지요! 복음의 예수님 다음으로 거의 하느님 사랑의 깊이까지 도달한 느낌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진정성 가득 느껴지는 하느님 사랑의 깊이까지 도달한 바오로 사도같습니다. 진정성 가득 느껴지는 하느님 사랑의 깊이까지 도달한 바오로 사도같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런 극진한 동족 사랑의 뿌리에는 다음 고백에서 보다시피 하느님 사랑이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이어 “영혼의 자서전”에서 읽은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가, 그리고 “침묵의 산”에서 읽은 성 그레고리오 동방교부의 고백이, 불교의 지장보살이 연상되었습니다.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제가 어찌 천국을 즐기겠습니까. 주여, 저주받은 자들을 불쌍히 여겨 천국으로 들여보내든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 고통받은 자들을 위로할 질서를 세우겠나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없다면, 저는 지옥에 남아 그들과 고통을 나누겠습니다.”

 

이어 동방의 성 그레고리오에 대한 소개입니다.

 

“그의 사상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선과 사랑의 확신에 기초한다. 하느님은 절대적인 사랑과 절대적인 연민으로 우리를 심판할 것이다. 지옥의 고통은 유일한 목적으로서 ‘영혼의 치유’에 있다. 고통은 영원하지 않다. 치유는 불을 통해서 이뤄지는데 그 불은 감각적 불이 아니라 도덕적 성격의 불이다. 

정화후에 영혼들은 영원으로 돌아간다. 어떤 이들은 지상생활 동안 정화에 도달하고 어떤 이들은 내세동안 성취된다.... 마지막으로 ‘악의 발명자(the inventor of evil)’ 까지 비슷한 방법으로 치유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원래의 상태로 회복될 때 온창조계에 울려퍼지는 찬미는 하느님께로 들어 높여질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지옥까지 미치는 하느님 사랑임을 보여주는 동방 교부들의 사랑의 깊이는 얼마나 깊은지요! 놀라운 것은 위대한 고대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영원한 지옥의 개념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분들과 유사한 불교 지장보살에 대한 소개입니다.

 

“지장보살은 육도 중생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건져내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끝까지 지옥에 남겠다는 대원력을 세우신 보살이다. 대자비로써 중생들을 구제하시고 계시는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멸하신 후로부터 미래세에 미륵보살이 나타나실 때까지의 무불시대(無佛時代)에 계시며 중생제도를 부촉받은 보살이다. 

사바세계 일체중생들에게는 고맙기 그지없는 보살이다. 마지막 한 명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영원히 보살로 남겠다는 지장보살은 가히 대원본존(大願本尊)의 보살이라 할만하다. 뿐만 아니라 지옥 중생을 제도코자 지옥 문전에서 대비(大悲)의 눈물로써 중생을 교화하고 있는 보살이다.”

 

흡사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교의 지장보살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사랑의 깊이에서 하느님 경지 까지 이른 분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자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거침이 없고 추호의 두려움도 없습니다. 이런 용기와 확신은 그대로 하느님 경지에 까지 이른 사랑에서만 가능합니다.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들 앞에서 추호의 주저함 없이 말씀하신후 수종을 앓는 이를 안식일에도 불구하고 손을 잡고 병을 고쳐주신다음 돌려보내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 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안식일 잣대가 아닌 하느님 사랑의 잣대로 보면 답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이미 물음 안에 답이 있기에 이들은 아무 대답도 못합니다. 예수님 사랑의 깊이는 하느님 사랑의 깊이까지 도달해 있음을 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하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이 세 스타일, “친밀함(closeness), 연민(compassion), 부드러움(tenderness)”입니다.

 

문득 어제 복음 말씀중 주님께서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주님과 무관한 사랑의 관계였다는 청천벽력같은 말씀입니다. 평생 주님을 섬겼는데 이런 나만의 이런 일방적 짝사랑의 관계였다면 그 착각이 너무 허망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너나할 것 없이 “더불어 사랑의 여정”중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사랑의 여정, 앎의 관계가 될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주 내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를 사슴처럼 달리게 하시고,

 산 봉우리로 나를 걷게 하시나이다.”(하박3,19). 아멘.


 

11/4(토)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어디에 있느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라는 삶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삶의 태도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한 지붕 두 가족이 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신념과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평화와 자비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삶의 지침과 이정표로 여기는 쿠란과 토라는 이웃을 사랑하고, 이방인을 따뜻하게 돌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평화 땅에서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라는 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라는 을 먼저 생각한다면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입니다. ‘라는 원인을 찾기 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배려와 포용을 선택한다면 그곳은 평화의 도시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참된 평화와 자유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참된 행복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조재형 신부)

 

2. 요즘 저희 피정센터를 찾는 교우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씀입니다.

여기오면 세상에 살때와는 다른 특별한 무엇가를 느낍니다. 그것은 세상에서와는 다른 역설의 진리입니다. 높은 사람이 결코 높지 않은, 높은 사람은 낮은 곳에서 섬기는 사람이요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확인하고 갑니다.

아마도 저희 형제들이 오시는 교우들에게 기쁘게 봉사하는 소탈하고 진실된 모습이 그렇게 좋아보이는가 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윗사람은 섬기는 사람, 봉사하는 사람, 더 많이 움직이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세상의 논리를 뒤집는 장소, 아랫 사람이 더 존중받고, 더 귀히 여겨지며, 더 사랑받는 장소! 그 장소가 세상 모든 그리스도 공동체의 모습이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합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루카 14,3)
 
주님!
당신은 결코 사랑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안식일 율법 앞에서도, 올가미를 씌우려 지켜보고 있는 이들 앞에서도,
당신은 결코 사랑을 멈추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합당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합당한 까닭입니다.
사랑스러워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사랑스러운 까닭입니다.
당신은 늘 살아계시기에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듯,
늘 사랑하시기에 사랑이시며 사랑을 베푸십니다. 아멘.

 

4.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 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안식일 잣대가 아닌 하느님 사랑의 잣대로 보면 답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이미 물음 안에 답이 있기에 이들은 아무 대답도 못합니다. 예수님 사랑의 깊이는 하느님 사랑의 깊이까지 도달해 있음을 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하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이 세 스타일, “친밀함(closeness), 연민(compassion), 부드러움(tenderness)”입니다.(이수철 신부)

 

 

11/4(토)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제315일 기도 

 

복음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어디에 있느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라는 삶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삶의 태도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라는 원인을 찾기 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배려와 포용을 선택하게 하소서.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참된 평화와 자유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참된 행복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 2023년 11월4일(토) 7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