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6월 24일 월요일[(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다.
<대영광송>
본기도
복된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하느님 백성이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도록 준비하게 하셨으니
저희에게 영신의 기쁨을 주시고
모든 신자의 마음을 구원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9,1-6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2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4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앉으나 서나 당신은 저를 아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 알아차리시나이다.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헤아리시니, 당신은 저의 길 모두 아시나이다. ◎
○ 당신은 제 오장육부를 만드시고, 어미 배 속에서 저를 엮으셨나이다.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당신 작품들은 놀랍기만 하옵니다. ◎
○ 제 영혼이 잘 아나이다. 제가 남몰래 만들어질 때, 땅속 깊은 곳에서 짜일 때, 제 뼛속까지 당신께 드러났나이다. ◎
제2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3,22-26
그 무렵 바오로가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조상들에게 22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 되어 주님에 앞서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예물기도
복된 세례자 요한이 구세주께서 오시리라 예고하고
이미 와 계심을 증언하였으니
저희가 그의 탄생을 기뻐하며 바치는 이 제사를 너그러이 받아들이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에서
복된 요한을 뽑으시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특별한 영예를 주셨으니
그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 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 주었나이다.
또한 그는
흐르는 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세례의 제정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며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능품천사들과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위엄을 찬미하며 끝없이 외치나이다.
영성체송
우리 하느님이 크신 자비를 베푸시니, 떠오르는 태양이 높은 데서 우리를 찾아오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어린양의 잔치로 기운을 되찾고 비오니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복된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뻐하는 저희가
세례의 제정자이신 그리스도를 알아 모시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다른 성인의 축일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지요? 그렇습니다. 다른 성인들은 세상을 떠난 날을 축일로 지냅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공덕을 쌓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가경자, 복자, 성인’의 순서를 거쳐야 합니다. 증인이 있어야 하고, 성인의 전구를 통해서 ‘표징’이 드러나야 합니다. 한국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103위의 성인과 124위의 복자를 신앙의 증거자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성인과는 달리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는 분은 성모님과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는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도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도 성령에 의해서 마리아에게 주어졌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름도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서 엘리사벳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세례자 요한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에 따라서 속죄의 예식을 거치고, 제물을 바쳐야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데, 요한은 세례를 받으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획기적인 죄의 사함을 받는 예식이었습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갔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역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였고, 달릴 길을 충실히 달린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나는 오셔야 할 그분이 아닙니다. 나는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목소리 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겸손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을 지내면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충실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고 합니다. 남의 떡을 부러워하기 보다는 나에게 주어지는 사명에 충실하면 좋겠습니다.
‘나 중심의 생각을 상대방 중심의 생각’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철저하게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도 그런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은 여름이 긴 하지에 가깝습니다. 하지가 지나면 여름은 점차 짧아집니다. 예수님의 축일은 겨울이 가장 긴 동지에 가깝습니다. 동지가 지나면 낮은 점점 길어집니다. ‘성소 후원회’ 임원 연수 때입니다. 강사 신부님은 제가 예전에 본당 신부님으로 모시던 분입니다. 저는 신부님을 소개해 드리면서 ‘제가 신부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제가 그런 말을 할 줄 알고 ‘끈 없는 신발을 신고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제 말을 유쾌한 유머로 받아 주시는 신부님은 역시 저보다는 한 차원 높으신 분이셨습니다.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한없이 슬플 수 있습니다. 구약을 마치고, 신약을 시작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는 가장 위대하다는 말을 들었던 세례자 요한은 ‘살로메’의 춤 값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 가장 위대한 세례자 요한을 기억하고 있으며, 사랑과 공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휴대폰 광고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할 때면 잠시 꺼 놓으셔도 좋습니다.’ 늘 켜져 있어야 하는 휴대폰도 소중한 사람과 있을 때면 꺼도 좋다는 광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지금 좀 서운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지금 좀 속이 상해도 웃을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무너질 때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성인 성녀들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셨고, 재물보다는 가난함을 택하셨고, 모욕과 멸시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예언자 되어, 주님에 앞서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라.”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루카 1,57-66.80
예언자로서의 삶, 어쩔 수 없이 고독합니다!
통상 가톨릭교회 안에서 성인(聖人)들의 축일은 하나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분들께서 돌아가신 날, 다시 말해서 천상 탄일을 축일로 정해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천상 탄일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탄생 축일을 경축합니다.
그에게는 축일이 두 개입니다. 탄생 대축일과 수난 기념일.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등급이 높은 성인인 것입니다.
그를 성인 중에서 대 성인으로 인정하며 각별한 공경과 예우를 갖추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0년 세월을 나자렛에서 조용히 지내셨듯이, 세례자 요한 역시 오랜 세월 광야에 머물면서
침묵과 기도 속에 내공을 닦았습니다.
마침내 그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 외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환호했고,
그는 일약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르단 강으로 그를 찾아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헤로데 조차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 사람들이 ‘혹시 이분이 왕이 아닐까?’ 기대했지만,
그럴 때 마다 세례자 요한은 정확하고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나는 왕이 아니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오.
나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 같은 존재, 한 줄기 연기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례자 요한을 성인 중의 성인으로 추앙하는 이유는 그가 지녔던 탁월한 겸손의 덕 때문입니다.
이토록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신원의식은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무리 없이 연착륙하실 수 있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제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 역시 때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너희는 누구냐?”라고 질문을 던질 때, 솔직하게 소개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주님 자비를 힘입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홀로 설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주님 크신 사랑으로 인해 오늘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저는 제 삶을 통해 주님을 증거합니다.
저는 이 세상 안에 주님께서 현존하심을 외치는 광야의 소리일 뿐입니다.”
예언자로서의 삶, 어쩔 수 없이 고독합니다.
원치도 않았는데,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예언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시는데, 때로 죽기보다 힘든 숙제입니다.
완전히 귀먹은 백성들을 향해, 이미 물 건너간 사람들을 향해, 다시 돌아오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합니다.
거듭되는 외침에도 사람들의 몰이해, 그로 인한 박해는 계속됩니다.
결국 외로운 투쟁을 거듭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과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 땅 위에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인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란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데,
예언자들이 흘린 피는 소중한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한 존재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 소멸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일이 이제 우리에게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 안에 생명의 불꽃을 간직한 사람들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비록 육체는 이 세상에서 자취가 사라지지만 영혼은 더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강론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탄생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습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탄생 이야기만큼 놀랍고 경이로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은 선물로 받은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아무렇게나 될 대로 막 살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생명에는 살아야 할 생명의 질서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이로움을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묘하게 지어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시 139,4)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이사 49,1-2)
"~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이사 49,5)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그냥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소명)을 지고 던져진(기투성의) 존재입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구원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과업(소명)을 짊어진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이 탄생 이야기 역시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줍니다.
엘리사벳은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불임의 여인으로 이미 늙었는데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사실 그들은 늙은 엘리사벳의 아기 잉태와 더불어 벙어리가 되어버린 즈카리아를 통해, 감추어진 무언가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명하게 되는 순간, 즈카리아의 묶였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그들은 하느님의 관여(개입)와 현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아기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그의 사명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내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사도 13,23-24)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밝혀줍니다.
만약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분리해 버린다면, 요한의 탄생 의미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루카 1,66)처럼, 우리에게도 역시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루카 1,66)
주님,
당신이 베푸신 자비를 봅니다.
감추어진 무언가가 제게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저의 가린 눈을 열고 당신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이 오늘도 저를 보살피고 계시오니, 당신 신비 안에 저 자신을 묻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구원과 사랑을 소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것이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6.23.연중 제12주일 욥38,1.8-11 2코린5,14-17 마르4,35-41
더불어(Together) 믿음의 여정, 믿음의 전사,
“변화, 사랑, 중심”
“광풍을 순풍으로 가라앉히사,
바다의 물결이 잠잠해지니,
잔잔해져 좋아라 날뛰는 그들을
희망의 포구로 이끄셨도다.”(시편107,29-30)
오늘 화답송 시편이 복음과 일치합니다.
몇가지 묵상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중국에 여행을 다녀온 봄비 자매가 정성 가득 담긴 선물을 들고 인사차 다녀갔고
밤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새삼 건강이나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순수한 열정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분입니다.
“불암산 바위같이 떡 버티고 계시는 아버지 신부님,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서 봄비는 영광이옵니다.
주님 안에 늘 건강하셔서 오래오래 강론 쓰셔야 해요.”
믿음의 여정에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참 좋은 선물, 도반같은 분입니다.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은 제 정주와 믿음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새삼 스럽게 떠오른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라는 자작 애송시입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늘 거기 그 자리
늘 푸르른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세월도 비켜가나 보다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은 산이다” <2006.6. >
인자요산(仁者樂山),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 합니다.
산을 좋아하나 거의 산에 가지 않는 저에 대해 어느 분의 “산에 자주 가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글도 생각납니다.
“산이
산을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깊은 산이예요.”
그대로 제 소망을 밝힌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중인 평생 믿음의 전사, 평생 믿음의 학인이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평생 믿음의 학인인 우리들에게 참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사람들은 노력에 한계를 두고서는 재능에서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다산>
평생 믿음의 학인으로서 다산의 불퇴전의 의지를 엿보게 합니다.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부칩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너는 지금 미리 선을 긋고 물러나 있다.”<논어>
평생 학인으로서 시공을 초월하여 다산과 막상막하의 도반인 공자입니다.
이렇듯 믿음이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깨달음을 얻고 믿음의 여정에 도움이 됩니다.
꼭 십년전 2014년,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참 많이 삶의 여정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의 여정을 하루로 압축하여 일일일생, 일년으로 압축하여 일년사계,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점검하며
하루하루 날마다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오늘은 연중 제12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믿음이 여정중 세 측면에 걸쳐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한계입니다.
한계가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이지만 참 많은 깨우침을 주는 말입니다.
믿음의 여정에도 한계를 깨달아 아는 한계의 훈련은 필수입니다.
자기의 한계를, 영역을 넘지 않는 것이며 서로 거리를 존중하며 서로의 영역을 존중함이 지혜이자 사랑입니다.
무한한 탐욕에 경계를 정해 한계의 훈련에 힘써야 합니다.
참된 자유도 제 분수를 분명히 인식하는 한계의 훈련의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지창조시 하신 우선적이 일도 카오스 혼돈에 세계에 코스모스, 질서를 잡고
한계를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이르기까지 일주간의 천지창조 프로그램이 각 영역마다 질서를 잡고 한계를 정하는 일이었고,
그리하여 조화로운 아름다운 세계가 된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욥기의 저자도 이런 하느님의 지혜에 정통한 분임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폭풍 속에서 욥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내가 그 위에다 경계를 긋고, 빗장과 대문을 세우며,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할 때의 말이다.”
한계의 영성, 한계의 지혜, 한계의 사랑, 한계의 생명, 한계의 훈련입니다.
무절제한 탐욕에 한계를 정하여 한계내에 충실함이 지구를 살리는 일이요 평화로운 상생 조화의 길입니다.
이래서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베네딕도의 정주 서원 역시 바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을 다하며 살아내기 위한
한계의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믿음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늘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한계내의 삶에도 늘 새로울 수 있음은 그리스도의 사랑 덕분입니다.
참으로 깊이의 내적여정에 참 좋은 사랑의 도반이 그리스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심금을 울립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 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늘 우리 모두 새로운 존재로 살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믿음이 여정이 늘 새로울 수있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늘 우리를 다그치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나오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저에게는 그리스도 당신이 생의 전부입니다.
당신은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의 일들은 모두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품 안에서 살아가는 인생은, 믿음의 여정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이 깨달음에서 모든 성인이 일치합니다.
수십년전 세수하다 대야 바닥에 투명히 드러난, “Life is Beautifual!(인생은 아름다워라!)이란 말마디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지금은 타계한, 언젠가 꽃을 들고 온 자매에게 준 다음 선물시(膳物詩)는 생각할 때 마다 늘 유쾌해집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영혼이요 인생입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셋째, 중심입니다.
오늘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주제의 복음을 묵상하던중 반갑게 떠오른 말마디가 중심입니다.
내 삶의 살아 있는 중심이, 내 공동체 살아 있는 중심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임을 깨닫게 하는 복음입니다.
오늘 호수 한복판 거센 돌풍에 시련중인 제자들의 배는 바로 인생항해여정중의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주목할 바 혼자 믿음의 여정이 아니라 주님과 그리고 제자들과 더불어(Together) 믿음의 여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거센 돌풍 한가운데 예수님은 태평무사한 모습으로 고물에서 배개를 베고 주무시니
말 그대로 믿음의 대가이자 달인이십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역시 믿음 부족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제자들의 부르짖음과 예수님의 답변에 고요해지는 주변 환경이 참 통쾌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예수님께서 깨어 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명령하시니, 바람은 멎고 고요해집니다.
밖의 풍랑은 물론 마음 호수의 풍랑도 멎고 고요해졌을 것입니다.
주변이 혼란스럽고 마음의 풍랑이 심할 때 조용히 멈추어 주님의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주고 받는 말씀도 평생 화두가 됩니다.
“왜 겁을 먹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그대로 주님과 우리와의 문답같습니다.
조금도 부끄러워할 것 없습니다.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 주님의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믿음의 여정은 그대로 배움의 여정이 됩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이 믿음의 체험이 믿음의 여정중에 결정적 도움의 체험이 됐을 것입니다.
삶의 중심이신 주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도 한층 깊어졌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인생 항해 여정에 늘 삶의 중심에, 공동체의 중심에 살아 계신,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이자
도반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이 얼마나 결정적이요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믿음의 여정에 결정적 좋은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자비하심을
중생에게 베푸신 그 기적들을.”(시편107,31). 아멘.
6/24(월)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되새김 구절
1.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나는 오셔야 할 그분이 아닙니다. 나는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목소리 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조재형 신부)
2.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주님 자비를 힘입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홀로 설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주님 크신 사랑으로 인해 오늘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저는 제 삶을 통해 주님을 증거합니다.
저는 이 세상 안에 주님께서 현존하심을 외치는 광야의 소리일 뿐입니다.”
한 존재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 소멸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일이 이제 우리에게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 안에 생명의 불꽃을 간직한 사람들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비록 육체는 이 세상에서 자취가 사라지지만 영혼은 더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루카 1,66)
주님,
당신이 베푸신 자비를 봅니다.
감추어진 무언가가 제게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저의 가린 눈을 열고 당신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이 오늘도 저를 보살피고 계시오니, 당신 신비 안에 저 자신을 묻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구원과 사랑을 소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것이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왜 겁을 먹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그대로 주님과 우리와의 문답같습니다.
조금도 부끄러워할 것 없습니다.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 주님의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믿음의 여정은 그대로 배움의 여정이 됩니다.(이수철 신부)
6/24(월)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548(178)일 기도
복음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오늘의 말·샘 기도>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루카 1,66)
주님,
당신이 베푸신 자비를 봅니다.
감추어진 무언가가 제게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저의 가린 눈을 열고 당신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이 오늘도 저를 보살피고 계시오니, 당신 신비 안에 저 자신을 묻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구원과 사랑을 소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것이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6월24일(월) 7시20분...수산나 -
성 세례자 요한 John the Baptist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 요한 3,30 )
성경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0
요한은 예수님의 사촌으로 그의 아버지는 즈카르야로 사제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성모님의 친척인 엘리사벳입니다.
요한은 은수자가 되어 광야에서 살았고,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인 예수님을 만나 그분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요한은 메시아가 오기를 고대하는 신약 시대를 열었고, 자신을 일컬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위한 수단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메시아가 오기 전에 죄에서 돌아서기를 바라며
극기와 고행을 삶을 살다가 헤로데에 의해 참수되었습니다.
요한 낙타 털옷을 입고 아기 예수님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 자주 그려졌습니다.
글씨 :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수원교구)
그림 : 홍승례 아스테리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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