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7월 22일 월요일[(백)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말씀하셨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여라.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대영광송>
본기도
외아드님께서 가장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부활의 기쁨을 전하라 하셨으니
그의 전구로 저희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영광 속에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 뵈옵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 아가의 말씀입니다.3,1-4ㄴ
신부가 이렇게 말한다.
1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2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3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이제는 더 이상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5,14-17
형제 여러분,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우리가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
○ 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고, 성소에서 당신을 바라보나이다. 당신 자애가 생명보다 낫기에, 제 입술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
○ 이렇듯 제 한평생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 부르며 두 손 높이 올리오리다. 제 영혼이 기름진 음식으로 배불러, 제 입술이 환호하며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
○ 정녕 당신은 저를 도우셨으니, 당신 날개 그늘에서 환호하나이다. 제 영혼 당신께 매달리오면,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드나이다. ◎
복음 환호송
○ 말하여라, 마리아, 길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무덤, 부활하신 그분 영광 나는 보았네.
◎ 알렐루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1-2.11-18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복된 마리아 막달레나의 극진한 사랑과 헌신을
외아드님께서 인자로이 받아들이셨듯이
그를 기리며 바치는 저희의 예물도 기꺼이 받아들이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감사송
전능하신 아버지,권능이 넘치시고 더욱 자비로우시니,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일에서 아버지를 찬미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하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찾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경배하였나이다. 주님께서는 동산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사도들 앞에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영성체송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치네. 살아 있는 우리가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셨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신비로운 천상 양식을 저희가 거룩히 받아 모셨으니
일찍이 복된 마리아 막달레나가
스승이신 주 그리스도께 드린 한결같은 사랑으로
저희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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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의 ‘인생예찬’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슬픈 사연으로 내게 말하지 말아라./ 인생은 한갓 헛된 꿈에 불과하다고!/ 잠자는 영혼은 죽은 것이어니/ 만물의 외양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인생은 진실이다! 인생은 진지하다!/ 무덤이 그 종말이 될 수는 없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 말은 영혼에 대해 한 말은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 또한 가는 길은/ 향락도 아니요 슬픔도 아니다./ 저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행동하는 그것이 목적이요 길이다./ 예술은 길고 세월은 빨리 간다./ 우리의 심정은 튼튼하고 용감하나/ 싸맨 북소리처럼 둔탁하게/ 무덤 향한 장송곡으로 치고 있으니./ 이 세상 넓고 넓은 싸움터에서/ 인생의 노영 안에서/ 발 없이 쫓기는 짐승처럼 되지 말고/ 싸움에 이기는 영웅이 되라./ 아무리 즐거워도 ‘미래’를 믿지 말라!/ 죽은 ‘과거’는 죽은 채 매장하라!/ 활동하라, 살아있는 ‘현재’에 활동하라!/ 안에는 마음이, 위에는 하느님이 있다!/ 위인들의 생애는 우리를 깨우치느니,/ 우리도 장엄한 삶을 이룰 수 있고,/ 우리가 떠나간 시간의 모래 위에/ 발자취를 남길 수가 있느니라./ 그 발자취는 뒷날에 다른 사람이,/ 장엄한 인생의 바다를 건너가다가/ 파선되어 버려진 형제가 보고/ 다시금 용기를 얻게 될지니./ 우리 모두 일어나 일하지 않으려나./ 어떤 운명인들 이겨낼 용기를 지니고,/ 끊임없이 성취하고 계속 추구하면서/ 일하며 기다림을 배우지 않으려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멋진 글입니다. 롱펠로우의 삶은 그가 예찬한 것처럼 멋지고, 아름답지만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부인은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외롭게 숨졌습니다. 두 번째 부인은 부엌에서 화재가 발생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롱펠로우의 시는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임종을 앞둔 롱펠로우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숱한 역경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당신의 작품에는 진한 인생의 향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롱펠로우는 마당의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나무는 매우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단맛을 내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그것은 늙은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기 때문입니다.’ 롱펠로우에게 힘을 준 것은 바로 부정이 아닌 긍정의 마인드였습니다. 인생은 환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을 고목(古木)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고목의 새순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생각이 바로 인생의 새순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새로운 감정이 생깁니다. 우울한 생각을 하면 우울한 감정이 생깁니다. 감사의 생각을 품으면 감사할 일들이 계속 생깁니다.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모두가 포기했을 때, 모두가 두려워 숨어 있을 때에도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가서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하여라. 나는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오라고 전하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전하였습니다.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하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찾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경배하였나이다. 주님께서는 동산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사도들 앞에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을 위한 사도’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옛것의 기준은 시간의 순서가 아닙니다. 옛것의 기준은 나이가 아닙니다. 옛것의 기준은 부정과 불평 그리고 불만입니다. 새것의 기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고난의 순간에도, 역경의 순간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새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모두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되면 좋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복음: 요한 20,1-2.11-18
오늘 나는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고 있습니까?
누군가를 깊이, 그리고 극진히,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생기게 되는 현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너와 나 사이의 경계와 장벽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연결되며, 일상의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됩니다.
결국 그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되고 그의 슬픔이 내 눈물이 됩니다.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이요, 그의 행복이 곧 내 행복이 됩니다.
일곱 마귀의 횡포로 인해 죽음 일보 직전까지 걸어갔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그런 진한 사랑 체험을 하게 됩니다.
내 인생이 이쯤에서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삶에서 그런 사랑, 그런 축복이라곤 꿈도 꾸지 못했는데,
그분의 등장으로 인해 뜻밖의 기적이 찾아온 것입니다.
한때 일곱 마귀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더이상 고통스러울수 없는 큰 고통과 병고의 표현이 일곱입니다.
완전히 무너져 내려 더 이상 부서질 것 없는 폐허가 곧 일곱입니다.
그런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마치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듯 자신을 바라봤었는데, 더이상 부드러울 수 없는
세상 자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습니다.
따뜻한 손을 내미시며 나를 죽음의 구렁에서 빼내주셨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만나기 전에는 삭막하고 혹독한 겨울 같은 인생이었는데, 그분으로 인해 하루하루가
화사한 봄날로 급변했습니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이제 그녀에게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예수님은 삶의 유일한 의미요 기쁨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그녀는 열두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녀는 열두 사도 못지않은 여사도로 거듭난 것입니다.
오늘 나는 과연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새 삶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너무나 힘겨운 고통에 바닥에 퍼질러 앉아 울고 있다가도 내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금 힘을 얻고 일어서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강론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 뵌 분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전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가리켜 ‘사도 중의 사도’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는 여성의 활동을 사도적 수준으로 재평가한 것으로, 이러한 관점은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이 예수의 동등한 제자로서 활동할 수 있게 합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곧 새로운 각도에서 '복음'이 바뀐 것에 해당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복음’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파견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 시대의 '복음'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이시다.’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이렇게 사도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요한 20,17) 이는 당신께서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신 것입니다. 곧 당신이 가시는 곳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당신의 아버지이시면서 동시에 바로 제자들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증언하는 진리요, 부활이 가져온 선물입니다. 곧 우리가 성자의 반열에 들게 되었고, 우리가 아빠 아버지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요한 20,15)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사실 우리가 지척에서 말씀을 건네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함은 우리 마음의 귀와 눈이 닫혀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곧 “마리아야!”(요한 20,16)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자신의 생각과 편견에 빠져있던 마리아를 빠져나오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요한 20,17) 이 ‘말씀은 더 이상은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모르는 낮선 분’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늘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늘 사랑하는 일에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7.21.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예레23,1-6 에페2,13-18 마르6,30-34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착한 목자 파스카 예수님 영성 살기
“정의, 평화, 연민”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오늘 7월21일 연중 제16주일 화답송 후렴 시편은 늘 들어도 위로와 힘이 됩니다.
말마디를 바꾸어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할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걱정할 것 없어라.” 바꿔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자 빛이신 주님을, 희망이자 기쁨이신 주님을 잊어 뿌리없이 표류하는 삶이요
어둠 속에 방황하는 혼란한 삶입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신 착한 목자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런 착한목자 주님을 잊고 살기에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김수환 추기경의 묘비명이기도 합니다.
아주 예전 어느 분이 돌아간 아내의 묘비명을 청하기에 주저없이 이 시편 성구를 추천한 적도 생각납니다.
이어지는 시편 가사도 마음에 평화와 위안을 줍니다.
“파아란 풀밭에 이몸 뉘어주시고,
고이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 주시니,
내 영혼 싱싱하게 생기 돋아라.”
참 감사하게도 착한 목자 주님은 우리를 생명의 잔치, 이 거룩한 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해 미사잔치 참석하고 있는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생명의 미사잔치를 선택한 여러분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연중 제16주일은 제29회 농민주일이기도 합니다.
한국천주교회는 1995년 추계정기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농민주일을 맞이할 때 마다 생각나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요한복음 15장 1절,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는 참 멋진 고백입니다.
어떤 직업보다도 농업에 종사하는 농부들은 하느님을 가장 닮은 분들임을 깨닫습니다.
농사의 80%는 하느님께 달렸다 고백하는 농부들을 보면 하느님을 닮은 수도승같다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오늘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인 박현동 아빠스의 담화문 내용 일부를 소개합니다.
“농민주일은 농민을 위한 날이자 농민들의 열정과 노력의 결과를 소비하는 도시 생활인을 위한
날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회복하고 생태적 회개의 삶을 살아가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갑시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마침 어제 수도원에 피정 온 청년들이 청했던 강의 제목입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삶을 위해 평생 노력해야 함을 참 많이 강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삶’은 바로 우리 삶을 평가하는 잣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삶의 영원한 모델이 바로 착한 목자 예수님이요,
오늘은 착한목자 영성에 대해 세 측면에 걸쳐 나눕니다.
첫째, 정의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은 정의로운 분입니다. 구약에서 특히 강조된 정의와 공정입니다.
시편이 노래하는 하느님은 공정과 정의의 주님입니다.
“주님께서는 정의를 실천하시고 억눌린 이들에게 공정을 베푸신다”(시편103,6),
“그분은 정의와 공정을 사랑하시는 분, 주님의 자애가 땅에 가득하다”(시편33,5),
“빛처럼 정의를 떠오르게 하시며, 대낮처럼 공정을 밝히신다”(시편37,6),
“그가 당신의 백성을 정의로,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통치하게 하소서”(시편72,2).
“행복하여라. 공정을 지키는 이들,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시편106,3),
끝없이 이어지는 강조되는 정의와 공정의 삶입니다.
정의와 공정, 오늘 우리 사회를 비춰주는 거울같은 말마디입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정의와 공정이 무너짐에서 시작됨을 봅니다.
힘없는 백성이 하느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지도자들에게 바라는바 정의와 공정이었고,
이는 만민이 지켜야 하는 도리요 실행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현자들은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잠언21,3)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사야 예언자는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흘림이 웬말이고,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말이냐?”(이사5.7) 탄식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서 역시 일치합니다.
미래의 임금 메시아를 통해 공정과 정의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바로 오늘이 바로 그날이요 그분은 우리의 착한 목자 예수님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바로 주님의 우리의 정의라고 명명되는 분이 바로 착한 목자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이런 공정과 정의가 없는 사랑과 평화는 얼마나 공허하겠는지요!
애당초 불가능한 가짜 사랑, 가짜 평화입니다.
둘째, 평화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는 정의”에 이어 “주님은 우리의 평화”입니다.
정의와 평화는 한 세트입니다.
그래서 교구마다 ‘정의평화위원회’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분이 우리의 착한 목자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산상설교중 참행복에 관한 다음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랄 불릴 것이다.”(마태5,9)
전쟁과 평화입니다. 평화를 원하는데 역설적으로 계속되는 전쟁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영적전쟁을 수행하는 우리 믿는 이들, 특히 수도자들은 주님의 전사,
평화의 전사라 부릅니다.
후대 예수님의 제자들은 착한목자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의 참 평화이심을 깊이 깨달았고
우리는 바오로의 고백을 통해 배웁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셨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싱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평화이신 주님은 우리 모두 착한 목자 주님을 닮은 평화와 화해, 일치의 새인간으로,
참으로 자유로운 새인간으로 창조하셨고,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새롭게 깨닫는 진리입니다.
셋째, 연민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계시되는 착한 목자 예수님은 연민의 사랑을 지니신 분입니다.
불교용어로 대자대비하신 착한목자 예수님입니다.
힘겹게 복음 선포 활동을 하다 돌아와 보고를 받으신 주님은 지친 사도들에게 휴식을 명하십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외딴곳에서 가서 좀 쉬어라.”
참으로 착한 목자 주님의 배려하는 연민의 사랑이 빛납니다.
쉬지 못하는 활동 중독의 활동주의도 병입니다.
지친 심신의 힐링의 치유와 충전을 위해 때로 외딴곳의 쉼터에서 휴식은 필수요 외딴곳에서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 보다 더 좋은 힐링은 없습니다.
영육의 휴식의 쉼터가 되고, 주님의 생명수로 갈증을 해소하는 샘터가 되며,
주님의 진리 말씀을 배우는 배움터가 되는 미사전례보다 더 좋은 치유의 안식처는 없습니다.
연민의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외딴곳에 도착했을 때 기다린 것은 쉼터가 아니라 일터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먼저 와서 예수님 일행을 기다리고 있으니 참 반갑지 않은 손님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는 빛났습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면모가 약연하니 쉼이 아니라 가엾은 군중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심각한 상태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착한목자 예수님이 계십니다.
가엾이 여기는, 불쌍히 여기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연민의 사랑이 착한목자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목자없는 군중을 만나서 우선하신 일이 무지를 깨우치는 말씀 공부였음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미사의 말씀전례에 이은 성찬전례를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무지를 깨우치는 진리의 말씀 공부가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만악의, 만병의 근원이 무지의 탐욕, 교만, 질투, 분노, 어리석음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착한 목자 주님을 알아가고 참나를 알아가는 말씀공부를 통해 비로소 치유되는
무지의 병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보시시에 참 좋은 삶을 원하십니까?
착한 목자 예수님의 영성을 배워 닮으십시오.
평생공부입니다.
정의를 실천하는 삶, 평화를 실천하는 삶, 연민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착한 목자 주님을 닮는 지름길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5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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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한 봄날로 급변했습니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이제 그녀에게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예수님은 삶의 유일한 의미요 기쁨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그녀는 열두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녀는 열두 사도 못지않은 여사도로 거듭난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늘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늘 사랑하는 일에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삶을 원하십니까?
착한 목자 예수님의 영성을 배워 닮으십시오.
평생공부입니다.
정의를 실천하는 삶, 평화를 실천하는 삶, 연민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늘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늘 사랑하는 일에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7월22일(월) 6시3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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