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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4월 23일 수요일[(백)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4월 23일 수요일[(백)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마태 25,34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알렐루야.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해마다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기뻐하게 하시니
저희가 이 세상에서 지내는 축제로
영원한 파스카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3,1-10
그 무렵 1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3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5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6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8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9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5(104),1-2.3-4.6-7.8-9(◎ 3ㄴ)
◎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높이 불러라. 그분 업적 민족들에게 알려라. 그분께 노래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그 모든 기적 이야기하여라. ◎
○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
○ 그분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그분이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 그분은 주 우리 하느님, 그분의 판결이 온 세상에 미치네. ◎
○ 명령하신 말씀 천대에 이르도록,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시니,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이며, 이사악에게 내리신 맹세라네. ◎

부속가

<자유로이 할 수 있다.>
파스카 희생제물 우리모두 찬미하세.
그리스도 죄인들을 아버지께 화해시켜
무죄하신 어린양이 양떼들을 구하셨네
죽음생명 싸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신
불사불멸 용사께서 다시살아 다스리네.
마리아 말하여라 무엇을 보았는지.
살아나신 주님무덤 부활하신 주님영광
목격자 천사들과 수의염포 난보았네.
그리스도 나의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너희보다 먼저앞서 갈릴래아 가시리라.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굳게 믿사오니
승리하신 임금님 자비를 베푸소서.

복음 환호송

시편 118(117),24
◎ 알렐루야.
○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 알렐루야.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인류를 위하여 바치는 이 속량의 제물을 받아들이시어
저희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이루어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루카 24,35 참조
빵을 나눌 때, 제자들은 주 예수님을 알아보았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성자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한 저희가
옛 죄를 깨끗이 씻고 새사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파견

<부제 또는 사제가 백성을 향하여 말한다.>
╋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 하느님, 감사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톨스토이는 말했습니다. “인생은 사랑하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오늘 그 사랑을, ‘말씀을 나누고, 빵을 떼고, 함께 걷는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도 엠마오 제자들처럼 눈이 열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절망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던 그들에게, 한 사람이 다가와 조용히 함께 걸어주십니다. 말씀을 나누고, 빵을 떼는 그 순간 그들이 눈을 뜨고 알아본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저는 우리 달라스 성당의 새 신자 분과가 떠올랐습니다. 우리 본당에도 매달 새로운 교우들이 찾아옵니다. 한국에서, 혹은 다른 주에서 처음 오셔서, 낯선 곳에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립니다. 어떤 가족은 아버지가 주재원이 되어서 왔고, 어떤 분은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서 왔고, 어떤 가족은 새로운 사업을 찾아서 왔습니다. 그분들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조금은 외롭고, 조금은 낯설고, “이곳에서 다시 믿음을 살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오셨을 겁니다.

 

그럴 때, 누가 그분들의 옆에 조용히 다가가 동행해 주고 계십니까? 바로 새 신자 분과입니다. 한 달 동안, 미사 후 식사 자리에서 새 신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눕니다. 음식은 단순한 밥상이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아주 따뜻합니다. 그 자리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웃고, 신앙의 첫걸음을 함께 내딛습니다. 본당 홍보 책자도 나눠드리고, 한 달에 한 번은 공동체 미사 중에 새 신자분들을 소개합니다. 그때 모든 신자가 따뜻한 박수로 환영해 주십니다. 그 순간,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걷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체험했던 방식 아닐까요? 말씀을 듣고, 같이 걷고, 빵을 나누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게 예수님을 만납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삶입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옆에 조용히 앉아주는 것이고, 따뜻한 밥 한 끼를 함께 나누는 것이고,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 주고, 환영해 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천사가 되어준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교회의 공동체는 가진 것을 모두 기쁘게 나누었습니다. 부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 건강한 사람, 아픈 사람의 차별이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이미 부활의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한 번의 설교로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고, 신자가 3천 명 이상 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걸인에게 금이나 은을 주는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걷지 못하는 걸인에게 베드로 사도는 천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함께 길을 걷던 나그네를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 나그네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천사의 모습으로 나그네를 집으로 모실 수 있다면, 우리가 천사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엠마오 제자처럼 ,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셨구나!” 하고 눈을 뜨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누구의 길에 동행해 주고 있는가? 나는 지금, 이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따뜻함이 되어주고 있는가?” 그리고 또 이렇게 희망을 품어봅니다. “내가 받은 이 따뜻한 환대를, 나도 누군가에게 전해줄 수 있기를.” 엠마오로 가는 길은 친교실의 식탁 옆에도 있고, 미사 후 작은 대화 속에도 있습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고, 또 예수님을 전하는 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복음루카 24,13-35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부활 예수님!

 

부활 대축일을 지낸 사제나 수도자들은 엠마오 소풍을 떠납니다.

저희 공동체도 엠마오 소풍 중입니다.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던 제자들처럼 길을 걸으면서, 낚싯대를 드리우면서, 은혜롭고 감동적인 루카 복음

엠마오 사건을 묵상합니다.

 

첫 장면은 꽤 우울하고 가라앉는 분위기입니다.

두 제자가 자신들의 고향 엠마오로 낙향하고 있는데, 어깨가 축 쳐져있습니다.

발걸음에도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얼굴 표정은 좌절과 상심으로 가득합니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분위기입니다.

이유는?

두 제자가 자신들의 청춘, 인생, 목숨까지 걸며 추종했던 스승님, 한때 그리도 위풍당당 잘 나가던 스승님께서,

무기력하게 사형 판결을 받으셨고, 비참하게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미래가 사라져버린 두 제자는 장밋빛 꿈을 접고 귀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스승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한 상처와 트라우마가 워낙 컸기에 두 제자는 걸어가면서 두런두런 서로를 위로하며

십자가 사건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물론 최근 떠도는 루머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안식일 다음날 신새벽에 여인들이 스승님 무덤에 달려갔었는데, 무덤 속에 안계셨다는데!

그럼 스승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일까?

설마 그럴 리가 없지! 아마 희망 사항이겠지?’

 

그 어색하고 난감한 순간, 누군가가 두 제자 사이에 끼어드십니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두 사람의 어깨를 툭 치며 인사를 건네십니다.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침통한 표정의 두 제자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넌지시 질문을 던지십니다.

“길을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심각하게 주고받느냐?” “대체 무슨 일이냐?” 예수님의 질문에 어이도 없고

살짝 빈정도 상한 클레오파스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입니다.

 

“아니,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 모른다는 말입니까?

지금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 하면서 그간 자신들이 겪은 체험담을 늘어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나란히 계속 걸어가면서 아주 천천히, 또한 부드럽게, 때로 질책하면서,

때로 격려도 하면서, 하나 하나 자상하게 가르침을 건네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있고 명확한 가르침 앞에 제자들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기도 하고,

또한 깨달음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자들은 스승님임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으로 인해 부옇던 시야가 조금씩 맑아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둘만 걸었을 때는 그리도 지루하고 힘겨웠는데, 예수님과 함께 걸으니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 엠마오에 도착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풍기는 매력과 아우라에 흠뻑 빠진 두 제자는 예수님의 팔을 잡습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집에 들어서신 예수님께서는 식탁에 앉으십니다.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그제야 두 제자는 눈이 열려 스승님을 알아뵙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셨습니다.

 

그날 오후 두 제자가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던지 이렇게 외쳤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보십시오! 예수님 부재시 제자들의 모습과 예수님께서 동행하실 때 제자들의 모습의 차이를!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현존하시고 동행하심으로 인해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사랑의 불로 활활 타올랐습니다.

주님과 한 식탁에 앉음으로 인해 제자들 영적인 눈이 활짝 열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심으로 인해 우리 마음도 그분 사랑의 불로 활활 타오를 수 있습니다.

매일의 성찬례에 정성껏 참례함을 통해 우리의 영적인 눈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에 끼어 들어오셔서 함께 걸어주신다면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행으로 인해 우리는 죽음의 골짜기를 지난다 할지라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힘이요, 생명, 희망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출처 - 살레시오회 내리피정 센터이야기


3. 이영근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할 때>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 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버린 적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참조).

그들의 희망과 믿음은 변화되고 깊어지고 정화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루카 24,17) 

 

“무슨 일이냐?”

(루카 24,19)

그들은 먼저 그분에게서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사실 실망과 절망에 빠질 때가 가장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실망하고 절망에 빠지고 슬퍼질 때, 바로 그때가 우리의 희망을 내려놓아야 하고, 우리의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로 이때가 우리의 뜻과 생각이 변해야 할 때입니다.

바로 이때가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때요,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요한 20,25)

그렇습니다. 

알아야 할 바를 제대로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주시고,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빵을 떼실 때에'(루카 24,35)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떼어내다’는 ‘분리하다’, ‘파괴하다’, 글자 그대로는 ‘으스러뜨리다’라는 의미의 동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눈, 곧 신비를 보는 눈은 ‘떼어냄’, ‘부수어짐’, ‘으스러뜨림’에서 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부술 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보았다.'

(루카 24,31)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그분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는 일일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

(콜로 3,1-3)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루카 24,16)

 

주님!

곁에 함께 걸으시건만, 당신을 알아 뵙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건만, 곁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음을 용서하소서!

뼈 속 깊이 계시고, 입술에 가까이 계시고, 발등에 등불이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제 안에서 숨 쉬시며, 함께 걸으시는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4.22.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사도2,36-41 요한20,11-18

                                                                부활하신 예수님

                                                         “만남의 기쁨, 신록의 기쁨”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시편33,5)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의 계절, 4월21일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어제 아침 7시 33분

우리가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89세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제 엠마오 산보일에 교황님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러 ‘영원한 엠마오 산보길’에 오르셨습니다.

처음에는 슬픔이었지만 축제같은 죽음에 기쁨이 물밀 듯이 밀려 왔습니다.

얼마전 두봉 주교님에 이어 참 좋은 죽음의 선물을 남기시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신 교황님입니다.

 

이렇듯 잘 사셨던 분들은 많은 이들에게 ‘회개와 평화와 일치의 선물’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십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떠남이요, 살아계실 때 못지 않게 돌아가신 다음 끊임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일하심을

우리는 목도할 것입니다.

교황님이 1936년생으로 1949년생인 저보다 13세 연상이니 저의 남은 생애도 13년 안팎이란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며 내심 다짐했습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대로, 13년 안팎 남은 생애,

사랑의 성령의 바람따라, 내 살고 싶은 대로,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명품인생을 살리라.”

 

마침 어제 주문해 받은,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라는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단련된 마음의 근육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말씀도, 제가 늘 염두에 두고 있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성 베네딕도의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이래야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환상이나 허영, 탐욕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삶을

살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마침 오늘 읽은 옛 현자의 가르침도 좋았습니다. 

 

“가난해도 도道를 터득한 사람과 지혜롭게 재산을 늘린 사람은 가는 방향은 제각각일지 몰라도

모두 좋아하는 것을 이루었다.”<다산>

“안연은 거의 도道를 터득했지만, 자주 쌀통이 빌 정도로 가난했다.

자공은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재산을 늘렸는데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논어>

 

새삼 관상의 마리아나 안연으로 살든 활동의 마르타나 자공으로 살든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요,

모두 똑같이 주님의 사랑을 받는 몸이니 제 색깔의 사랑으로 살아야 함을 배우고 깨닫습니다.

우열관계가 아닌 상호보완관계로 봄이 옳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을 사랑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요 프란치스꼬 신부인 저입니다.

 

어제 읽은 성 프란치스코 기사도 나누고 싶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화두는 ‘예수’였다.

그는 마음에도 예수를, 입에도 예수를, 귀에도 예수를, 눈에도 예수를, 나머지 다른 지체에도,

자나깨나 늘 예수를 모시고 다녔다(1첼라노,115).

그는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먹을 때나 마실 때나, 늘 기도에 몰두하였기 때문에(1첼라노,71),

보면서도 보지를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를 못했다(1첼라노,115).

그에게 있어서 예수는 사랑의 화신이요 삶의 모델이었다.

그는 ‘내 사랑하는 하느님이여, 당신은 나의 주님, 나의 전부시여!’ 고백하기에 이른다.”

 

어제는 파스카의 봄꽃들과 신록의 아름다움이 너무 잘 어울려 참 많은 분들에게

수도원 배밭 풍경 사진을 선물로 나눈 하루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의 기쁨은 그대로 신록의 기쁨처럼 참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선종하시자마자 주님 부활에 합류하신 교황님의 죽음이 참으로 신선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사랑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답이 없습니다.

참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는 일입니다.

두봉주교, 프란치스코 교황에 앞선 사랑의 대선배가 오늘 복음의 마리아 막달레나,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아름다움의 극치입니다.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고 찾았기에 주님이 응답해 마리아 막달레나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사랑과 만남, 회개가 동시에 발생합니다. 마침내 에덴동산의 동산지기이자 생명나무인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목자의 음성에 응답하듯 전광석화, 마리아는 돌아서서 “라뿌니! 스승님!” 부르며

화답하니, 사랑과 만남과 회개가 동시에 발생합니다.

 

그 어느 사도들도 두분간의 사랑을 능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비움의 절정인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있던 분도 성모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애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사랑-만남-회개로 끝이 아니라 ‘선포’로서 완성입니다. 

 

사랑의 기쁨, 만남의 기쁨, 회개의 기쁨, 선포의 기쁨이요, 핵심은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이야말로 파스카의 기쁨을 상징하는 신록의 기쁨입니다.

다음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에 더한층 신록의 기쁨으로 빛났을 마리아 막달레나의 영혼입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예수님의 사랑과 배려에 감사와 감격, 감동으로 가득 찬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도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 역시 사랑-만남-회개-선포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체험했기에 성령 충만한 열화와 같은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감동하여 회개한 사람들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묻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이에 화답하여 삼천명 가량 세례를 받았다 합니다.

세례 받았으나 냉담한 이들! 정말 회개가 절실합니다.

회개와 용서, 성령을 받는 일은 평생 여정에 속합니다.

 

바로 평생성사인 성체성사, 고백성사를 통해 주님을 만나 회개와 더불어 용서와 성령을 받을 때

늘 신록의 기쁨으로 빛나는 영혼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성체성사 미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여

늘 ‘사랑-만남-회개-선포’의 여정과 더불어 신록의 기쁨으로 빛나는 참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시편33,18).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4/23(수) [(백)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누구의 길에 동행해 주고 있는가? 나는 지금, 이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따뜻함이 되어주고 있는가?” 그리고 또 이렇게 희망을 품어봅니다. “내가 받은 이 따뜻한 환대를, 나도 누군가에게 전해줄 수 있기를.” 엠마오로 가는 길은 친교실의 식탁 옆에도 있고, 미사 후 작은 대화 속에도 있습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고, 또 예수님을 전하는 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조재형 신부)

 

2.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보십시오! 예수님 부재시 제자들의 모습과 예수님께서 동행하실 때 제자들의 모습의 차이를!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현존하시고 동행하심으로 인해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사랑의 불로 활활 타올랐습니다.

주님과 한 식탁에 앉음으로 인해 제자들 영적인 눈이 활짝 열렸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루카 24,16)

 

주님!

곁에 함께 걸으시건만, 당신을 알아 뵙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건만, 곁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음을 용서하소서!

뼈 속 깊이 계시고, 입술에 가까이 계시고, 발등에 등불이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제 안에서 숨 쉬시며, 함께 걸으시는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대로, 13년 안팎 남은 생애,

사랑의 성령의 바람따라, 내 살고 싶은 대로,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명품인생을 살리라.”

 

마침 어제 주문해 받은,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라는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단련된 마음의 근육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말씀도, 제가 늘 염두에 두고 있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성 베네딕도의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이래야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환상이나 허영, 탐욕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삶을

살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이수철 신부)

 

4/23(수) [(백)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루카 24,16)

 

주님!

곁에 함께 걸으시건만, 당신을 알아 뵙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건만, 곁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음을 용서하소서!

뼈 속 깊이 계시고, 입술에 가까이 계시고, 발등에 등불이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제 안에서 숨 쉬시며, 함께 걸으시는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4월23일(수) 7시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