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5월 3일 토요일[(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성경에 나오는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과 알패오의 아들이 있는데, 오늘 기념하는 야고보 사도는 알패오의 아들이다. ‘소 야고보’라 불리기도 하는 그는 신약 성경의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였다. 예수님의 형제라는 야고보(마태 13,55 참조)와 같은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입당송
<대영광송>
본기도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어
저희가 성자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히 하느님을 뵈옵는 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5,1-8
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3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4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5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또는
◎ 알렐루야.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
○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필립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알렐루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6-14
그때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6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에 드리는 이 제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티 없이 깨끗한 믿음을 간직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도들을 기초로 삼아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어,
지상에서 주님의 거룩하고 영원한 표지가 되게 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와 영원히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소서.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리이다. 필립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내 아버지를 뵌 것이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도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와 함께
성자를 통하여 주님을 뵈옵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오늘은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고,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친 사도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사도는 처음부터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어설프고, 이해도 부족하고, 때론 두려워 도망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을까요? 그건 바로 ‘복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자주 ‘복음을 전합시다’, ‘복음적으로 삽시다’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묵상하는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복음(εὐαγγέλιον, good news)은 단순히 착하게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예수님의 첫 번째 선포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억눌린 자가 자유를 얻고, 원수가 형제가 되며, 상처가 치유되고,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는 나라입니다. 복음은 바로 그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나의 삶 안에서 시작된다는 선포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그 복음을 믿고 내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며칠 전 선배 신부님께 들은 한 어르신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동네에 사납고, 잘 다투기로 유명한 어르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르신은 신부님에게서도 꼬투리를 잡으려고 성당을 찾아와서 강론을 들었다고 합니다. 어르신은 강론을 들으면서 신부님의 인품에 반하였고,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어르신은 미사를 마치고 나오면 ‘안수’를 청했습니다. 그러면 며칠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궁금해서 어르신에게 물었습니다. ‘안수를 받으시면 어째 며칠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어르신은 ‘제가 살면서 잘못한 일이 많았습니다. 제가 잘못한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제게 잘못한 사람은 기꺼이 용서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고 부끄러웠습니다. 강론 중에 용서를 이야기하면서도 신부님은 정작 용서하는 데 인색했습니다. 어느 날 어르신은 미사가 끝났는데 ‘안수’를 청하지 않고 사무실로 갔습니다. 신부님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오늘은 어째 그냥 가시나요?’ 어르신은 대답했습니다. ‘제가 그동안 잘못했던 사람은 모두 찾아가서 용서받았습니다. 이제 그동안 밀린 교무금을 내려고 왔습니다.’ 어르신의 환한 웃음을 기억하며 사제관으로 왔는데 경찰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병원 응급실인데, 어르신의 목에 스카플라가 있는데, 그 뒤에 신부님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신부님에게 연락하라.’라는 글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병원에 가서 어르신을 위해 병자성사를 드렸고, 어르신은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신부님은 한편으로 놀랐고, 한편으로 부러웠다고 합니다. 사제로 살면서 늘 ‘죽음’을 이야기했지만, 정작 신부님은 죽음을 준비하는 데 인색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은 삶이 달라집니다” 이 어르신은 사도가 아니었지만, 복음을 듣고 믿고, 그 믿음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진짜 사도처럼 살아가신 분입니다. 우리는 종종 복음은 멀리 있는 거로 생각합니다. 사도의 삶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이야기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복음은 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내 일상에, 내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어르신처럼, 복음을 믿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며, 끝까지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삶이 바로 사도적인 삶 아닐까요? 오늘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를 기억하면서, 우리도 묻습니다. 나는 복음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가? 나는 내 삶에서 복음의 기쁨을 살아내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아닌가?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평화롭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 복음은 삶을 바꾸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살아가는 사람이 곧 오늘의 사도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모두 복음을 믿고, 복음을 살아내는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어 저희도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와 함께 성자를 통하여 주님을 뵈옵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2. 전삼용 요셉 신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코린토 1서 15,1-8 요한 14,6-14
우리는 “나를 본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청합니다.
이는 “저는 사랑을 아직 모릅니다.”라고 고백하는 말과 같습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닮는 이유는 사랑하면 서로의 존재를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저도 어떤 자매가 다른 사람이 눈치챌 정도로 저의 말투를 따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저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기분 좋았던 적이 있습니다.
인간도 그럴진대 하느님은 그 완전한 자기 교환으로 아버지가 아드님을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를 보면 아드님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랑하면 닮아가고 그 닮은 사람을 드러내는 것이 상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김동인의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는 닮음이 얼마나 관계에서 중요한지 잘 표현해줍니다.
M은 노총각으로서 회사 월급으로 문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자신이 생식능력을 잃은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의사를 찾아옵니다.
의사는 생식능력이 사라졌음을 알았지만, 희망을 주기 위해 가능한 것처럼 말해줍니다.
그렇게 M은 혼인하게 됩니다.
혼인 후 아내가 임신하였습니다. 그러자 M은 다시 의심에 빠져듭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의사를 찾아왔지만
주저하다 검사를 받지 못합니다.
며칠 후 M은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더니 이상이 없다고 하면서 의사에게 와서 말합니다.
고민에 빠져있던 의사는 짐을 벗은 느낌입니다. 물론 의사는 M이 검사를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생식능력을 잃은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후일에 M은 아기가 아파서 다시 그 의사를 찾아옵니다.
M은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아들과 자기가 닮은 데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가운뎃발가락이 긴데 아들의 가운데 발가락도 길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아이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고는 얼굴도 닮은 것 같다고 말해줍니다.
M이 아들을 사랑하기 위해 해야 했던 일은 첫 번째로 자신에게 생식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했고,
두 번째로 아들이 자신과 닮았다는 것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사랑하면 닮아간다는 말이 곧 생식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녀가 자신을 닮았다면 그것 자체가 자신에게 영광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 안에서 당신과 닮은 것을 하나라도 발견하려고 우리를 살펴볼 것입니다.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서 부자 아빠는 기요사키가 따른 친구의 아버지를 말합니다.
로버트 기요사키는 가난한 아버지를 닮지 않고 친구의 부자 아빠를 닮았음을 이 책에서 스스로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고 기뻐할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바로 로버트 기요사키가 닮고자 했던
부자 친구의 아빠일 것입니다.
그리고 로버트 기요사키는 “나를 본 것이 곧 부자 아빠를 본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나를 본 것이 곧 누구를 본 것인가?”라고 생각할 때 나는 내가 닮으려는 사람,
곧 내가 영광을 주려고 하는 이를 위해 사는 것이 드러납니다. 나 자신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나를 본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되지 않더라도 그렇다고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이 비록 아직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분의 자녀라고
자신이 여긴다면 당당히 “내가 곧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만큼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릴 말은 없습니다.
내가 그분의 자녀임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계시이고 선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도 “나를 보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보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녀를 나를 향하여 나아오게 한 것이지 그리스도를 향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표지판이 자신을 향하여 차가 달려오게 만든다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웃는 미소는 아버지를 닮았고 우리의 성격은 어머니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닮은 누군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고 우리를 보는 것이 곧 하느님을 보는 것이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고백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고백할 수 있다면 “나를 보는 것이 곧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고, 그분 뜻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3. 이영근 신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코린토 1서 15,1-8 요한 14,6-14
<‘하느님을 본다’는 것>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 라는 필립보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듣기 전에, 먼저 이 질문이 ‘하느님을 아는 것’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맥락 안에서 나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가르침 다음에,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라고 말씀하시자,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라고 필립보가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어떻게 하느님을 보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먼저 ‘보는 것’의 한계를 일깨워주십니다. 곧 필립보에게 그가 오랜 동안 당신을 보았음에도 당신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 1,3)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께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뵙고 하느님을 뵐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에서 ‘참된 앎’이 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한 11,40) 결국 하느님을 보는 것의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 것에 귀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것은 곧 당신께서 하신 말과 일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는 단순히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신 말과 일이 참이라는 인식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요한 14,12)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고 하시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셋째는 오늘 복음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으로 ‘계명을 지키는 일’, 곧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요, 넷째는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힘을 입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진정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길에 밟히며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도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도 형제들에게 져줌으로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씹히고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도 형제들 안에서 부서지고 씹혀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5.2.금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295-373) 기념일 사도5,34-42 요한6,1-15 모든 덕의 어머니 “분별력의 지혜”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옛 현자 <다산>의 지혜로운 가르침입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애틋하게 여기고, 익숙한 사이일수록 어려워하라.” “수양의 근본은 효우孝友이니, 여기에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학식이 높고 글재주가 좋더라도 흙담에 색칠하는 것이다.” 예나 이제나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무엇이 되기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진리입니다. 참 어른이나 스승은 학식보다는 탁월한 삶의 지혜,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분들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라 일컫는 분별력의 지혜는 사막교부들이 늘 강조해온 지혜였고 베네딕도 성인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성인은 아빠스의 기본적 자질도 분별력의 지혜임을 그의 규칙서에서 가르칩니다.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죽어 버릴 것이다’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성규64;18,19) 오늘은 성 아타나시오 주교학자 기념일입니다. ‘죽지않는, 불멸’의 아타나시오 이름 뜻대로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였습니다. 성 바실리오,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더불어 동방의 사대교부에 속하는 분으로, 참 치열한 산전수전을 통과한 삶이었습니다. 성인은 알렉산드레아 주교로 45년(328-373)동안 재직하면서 아리안 이단과 치열한 전투중 5차례나 유배로 주교직을 박탈당하고 고통을 겪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사제 아리안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안 이단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죄된 후에도 널리 퍼져있었고, 성인은 아리안 이단에 맞서 시종일관 참 하느님이시면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심을 믿고 고백하고 선포했습니다. 신약성서 27권 체제의 목록을 최초로 작성한 분도 성 아타나시오 주교학자입니다. 이집트 유배중 만났던 안토니오 성인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성인이 쓴 ‘성 안토니의 전기’는 후대 수도자들에게는 교과서와도 같았습니다. 인명은 재천입니다. 이런 시련과 고난으로 점철된 와중에도 성인은 78세 천수를 누렸으니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성인의 뛰어난 분별력의 지혜도 큰 몫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물론 사도행전의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교사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 역시 뛰어난 분별력의 지혜를 지녔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는 예수님의 분별력의 지혜가 빛을 발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사람들이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직감하시자 즉시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노자의 지혜대로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공을 세워도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의 정신으로, 군중의 환호나 인기에 편승하지 않고 즉시 물러나 아버지 안에 머물러 제자리를 찾으니 예수님의 분별력의 지혜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제1독서 사도행전의 가말리엘 역시 탁월한 분별력의 지혜의 스승임이 드러납니다. 사도들의 처리문제로 혼란이 극도에 달하자 가말리엘은 테우다스와 유다의 예를 들면서 사도들을 두둔하며 상황을 말끔히 정리하니 가말리엘의 분별력의 지혜가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 분명한 판단이 어려울 때는 건들이지 말고 기도와 침묵중 그냥 내버려 두고 기다리며 상황을 잘 지켜보는 것도 참 좋은 분별력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건들이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결코 방관이나 방치가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주님을 날로 사랑하여 닮아갈 때 깊고 넓은 내적 시야에 선사되는 분별력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
5/3(토)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되새김 구절
1. 복음은 삶을 바꾸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살아가는 사람이 곧 오늘의 사도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모두 복음을 믿고, 복음을 살아내는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어 저희도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와 함께 성자를 통하여 주님을 뵈옵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조재형 신부)
2.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고 우리를 보는 것이 곧 하느님을 보는 것이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고백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고백할 수 있다면 “나를 보는 것이 곧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고, 그분 뜻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게 됩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길에 밟히며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도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도 형제들에게 져줌으로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씹히고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도 형제들 안에서 부서지고 씹혀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제1독서 사도행전의 가말리엘 역시 탁월한 분별력의 지혜의 스승임이 드러납니다.
사도들의 처리문제로 혼란이 극도에 달하자 가말리엘은 테우다스와 유다의 예를 들면서 사도들을 두둔하며
상황을 말끔히 정리하니 가말리엘의 분별력의 지혜가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 분명한 판단이 어려울 때는 건들이지 말고 기도와 침묵중 그냥 내버려 두고 기다리며
상황을 잘 지켜보는 것도 참 좋은 분별력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이수철 신부)
5/3(토)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오늘의 기도
복음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길에 밟히며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도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도 형제들에게 져줌으로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씹히고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도 형제들 안에서 부서지고 씹혀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5월3일(토) 5시50분 -
'매일미사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묵]2025년 5월 5일 월요일[(백) 부활 제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0) | 2025.05.05 |
---|---|
[매묵]2025년 5월 4일 주일[(백) 부활 제3주일(생명 주일)]/신부님 강론 4개 (1) | 2025.05.04 |
[매묵]2025년 5월 2일 금요일[(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2) | 2025.05.02 |
[매묵]2025년 5월 1일 목요일[(백) 부활 제2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1) | 2025.05.01 |
[매묵]2025년 4월 30일 수요일[(백) 부활 제2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4) | 2025.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