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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박물관·사당

서울역사박물관~경희궁~경교장~경향신문사~중화기독교한성교회

 

경희궁과 금천교 안내문

 

금천교

 

서울역사박물관1

 

서울역사박물관2

 

서울역사박물관개관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앞 종로네거리종루 주춧돌 전시 1

 

서울역사박물관 앞 종로네거리종루 주춧돌 전시 2

 

서울역사박물관 앞 종로네거리종루 주춧돌 전시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이준용묘소 문인석

 

서울역사박물관 이준용묘소 문인석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철거 광화문 주요부재 전시 1

 

서울역사박물관 철거 광화문 주요부재 전시 2

 

철거 광화문 주요부재 전시 안내문

 

철거 광화문 부재별 위치 안내문

 

철거 광화문 부재별 위치 안내도

 

서울역사박물관 전차 1

 

조각 작품명 <전차와 지각생> 

 

서울역사박물관 전차 2

 

서울역사박물관 전차 3

 

서울역사박물관 전차 4

 

서울역사박물관 전차 1안내문

 

역사박물관 건너편 흥국생명 빌딩 앞 조각품- 망치든 사람

 

새문길 뮤지엄거리 안내문

 

흥선대원군 조부 은신군의 신도비 등 안내문~ 가운데 은신군신도비, 왼쪽 은신군묘표, 오른쪽 낙천군묘표

 은신군 진(1755~1771)은 정조의 동생으로 17세 사망했다. 정조가 글을 짓고 손수 글을 썼다.

낙천군묘표는 낙천군 온(1720~1737)의 묘비이다. 17세 사망했다. 계보상 은신군의 부친이 된다

 

가운데 은신군신도비, 왼쪽 은신군묘표, 오른쪽 낙천군묘표~ 은신군신도비는 정조가 글을 짓고 손수 글을 썼다.

은신군은 정조의 동생으로 계보상 흥선대원군의 조부가 된다

 

가운데 은신군신도비, 왼쪽 은신군묘표, 오른쪽 낙천군묘표~ 은신군신도비는 정조가 글을 짓고 손수 글을 썼다.

은신군은 정조의 동생으로 계보상 흥선대원군의 조부가 된다

 

은신군신도비~ 정조가 글을 짓고 손수 글을 썼다. 정조의 문장솜씨와 글씨를 감상할수 있다

은신군은 정조의 동생으로 계보상 흥선대원군의 조부가 된다

 

은신군묘표~ 은신군은 정조의 동생으로 계보상 흥선대원군의 조부가 된다

 

낙천군묘표~ 낙천군 온(1720~1737)의 묘비이다. 17세 사망했다. 본래 채의 아들인데 계보상으로는 연령군의 아들이자 은신군의 부친이 된다

 

흥선대원군 아들 흥친왕의 신도비~ 고종의 형으로 흥선대원군 장남, 처음 이름 이재면(1845~1912) 67세 사망

 

흥선대원군 아들 흥친왕의 신도비~ 고종의 형으로 흥선대원군 장남, 처음 이름 이재면(1845~1912) 67세 사망

 

흥선대원군 손자 영선군의 신도비, 이우의 신도비 등 안내문~ 가장 큰것이 영선군신도비,이문용묘갈, 글씨 없는것 이우신도비,가장 작은것 이종묘갈

영선군은 흥선대원군의 손자이자 흥친왕의 아들이다. 처음이름은 이준용(1870~1917) 47세 사망.

이문용묘갈은 이준용 동생 이문용(1882~ 1901) 의 묘비이다.19세 사망했다.

 이우신도비는 흥선대원군 증손 우(1912~ 1945)의 백비이다. 30세 사망했다.

이종묘갈은 이우의 둘째아들 이종(1940~1966)의 묘비이다. 26세 사망.

 

흥선대원군 손자 영선군의 신도비, 이우의 신도비 등 안내문~ 가장 큰것이 영선군신도비,이문용묘갈, 글씨 없는것 이우신도비,가장 작은것 이종묘갈

 

 

경희궁(慶熙宮)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이었다.

1617년(광해군 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하였다.

경희궁의 처음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를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경희궁에 머물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전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수난의 역사를 맞이하였다.

1910년 일본인 학교였던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궁궐 건물이 헐려 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어 궁궐의 모습을 잃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경희궁지에 대한 발굴을 거쳐 숭정전 등 정전 지역을 복원하여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사적 제 271호(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길 60)]

 

경희궁 흥화문 1

 

경희궁 흥화문 2

 

흥화문(興化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19호.

경희궁의 정문.

원래는 현재의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제가 1932년 흥화문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떼어갔던 것을 서울시에서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경희궁지 안내문

 

경희궁 궁궐도

 

경희궁 흥화문 안내문

 

경희궁 흥화문 현판

 

경희궁지 서울중고등학교터 안내문

 

서울 시립 경희궁 미술관 안내문

 

서울 시립 경희궁 미술관

 

경희궁 숭전문 1

 

경희궁 숭전문 2

 

경희궁 숭전문 3

 

경희궁 숭전문 4

숭정전(崇政殿)

경희궁의 정전(政殿)

경희궁 창건 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경에 건립되었다.

국왕들이 신들과 조회(朝會)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졌던 곳이다. 특히 경종 · 정조 · 현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숭정전 건물을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曹谿寺)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正覺院)으로 남아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복원된 것이다.

 

경희궁 숭전문 주변 산책길 1

 

경희궁 숭전문 주변 산책길 2

 

경희궁 숭전문 주변 산책길 3

 

흥화문에서 경희궁 시립미술관 길

 

경희궁지 안내문

 

경희궁 숭정전 1

 

경희궁 숭정전과 서행각

 

경희궁 숭정전과 동행각

 

경희궁 숭정전 안내문

 

경희궁 숭정전 2

 

경희궁 자정전 1

 

경희궁 자정전 2

 

경희궁 태령전 1

 

경희궁 태령전 2

 

경희궁 태령전 잡상

 

경희궁 태령전 3

 

경희궁 태령전 4

 

 

 

경교장 원형복원공사 안내문

 

경교장 안내문~ 백범 김구선생의 거처로 사용하던 곳

 

경교장

 

경향신문사(구 MBC 사옥)

 

중화기독교한성교회 안내문

 

중화기독교한성교회

 

사진 : 니콜라이, 수산나

글    : 수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