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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문인

윤대녕산문집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윤대녕산문집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사람의 소리 -

나는 소음에 무척 예민해서 조그만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도 신경이 이내 곤두선다. 글을 쓰면서 얻은 직업병일 수도 있겠고 성마른 체질 탓이기도 할 것이다. 휴대폰 벨소리도 귀에 거슬려 늘 진동으로 해놓으며 통화도 가능한 짧게 한다. 그리고 소설을 시작할 때가 되면 주로 깊은 산사에 찿아가 머물곤 한다. 말하자면 작가가 된 후로 여기저기 소음을 피해 다니며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도시는 그 자체가 거대한 소음 덩어리다.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소리, 자동차소리, 택시나 버스를 타면 승객의 의사와 상관없이 틀어놓은 방송, 아파트 위층에서 아이들이 쿵쿵거리며 뛰어다니는 소리, 예고없이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 이러한 온갖 소음들에 마침내 노이로제 증상이 생겨 급기야 정신과 의사를 찿아가 자문을 구했더니, 고전음악을 들어보라고 했다. 소리에서 얻는 병이니 소리로써 치유해보라는 얘기였다. 이는 마치 사랑때문에 얻은 병은 사랑으로만 치유가 가능하다는 동종요법과 비슷했다.

 

과연 음악치료법은 효과가 있었다. 방문을 닫아 걸고 심지어는 불까지 꺼놓고 혼자 소파에 앉아 아름다운 선율에 취해 있노라면 어느덧 마음이 산속의 호수처럼 고요해지고 뜻밖에 소설적 영감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10여년 클래식 음악에 심취해 사는 동안 나는 오디오 전문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수준으로 귀가 더욱 예민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고독의 기쁨은 결혼과 함께 마침내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허구한 날 방에 틀어 박혀 혼자 음악을 듣고 있는 남편을 아내가 좋아할리 없었다. 그녀는 오디오 보다는 텔레비젼을, 고전음악 보다는 팝송과 가요를, 그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려 노래방에 가서 마이크 잡고 노래부르기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알고보니 나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던 것 이었다.

내가 밤마다 방안에서 음악을 듣고 있는 동안 그녀는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젼을 지켜보다 잠이 들곤 했다. 아무리 부부라도 취향이 다른 걸 어쩌겠는가.

 

어느 날 식탁에서 아내가 나의 소음 노이로제를 거론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주 작정을 한 듯 했다. 우리가 귀로 듣는 모든 소리는 결국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겠냐고 그녀는 말했다. 물론 그럴 터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소리가 그토록 귀에 거슬린다면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 가겠어요, 또 사람에 대한 애정없이 소설을 쓰는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거죠?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내심 충격을 받았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라도 사람들 얘기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됐으면 해요. 그럼 지금과는 세상이 달라 보일 줄도 모르잖아요. 그것은 곧 마음을 다시 여는 일이었다. 더불어 마음이 열려야만 귀가 열리는 법이었다.

 

몇년전 부터 고전음악 듣기는 더 이상 내 일상의 취미가 아니다. 아내의 배려로 오디오를 작업실로 옮겨 놓았지만 어쩌다 그저 한번씩 듣는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혼자 음악을 듣는 일이 전처럼 그렇게 즐겁지가 않다. 그대신 나는 음악보다 더 많은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뜨였다. 이를테면 주방에서 아내가 설거지하는 소리, 물기가 마른 그릇을 찬장속에 하나씩 쌓는 소리, 베란다에서 빨래의 주름을 펴기위해 옷을 터는 소리, 그때 그녀의 입에서 나직이 흘러나오는 노래소리, 누군가 전화통화를 하여 조용히 웃는 소리, 밤이면 아이에게 다분다분 동화책을 읽어주는 소리를 들을 때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마음의 평화가 온몸에 따뜻하게 깃들곤 한다. 그것은 혼자 어두운 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막연히 자아도취적 감정에 빠져 있을 때와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보다 구체적인 삶의 평화이다.

 

요즘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나는 눈을 감고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나누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곤 한다. 그리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많은 일들을 낯선 그들의 입을 통해 엿듣게 된다. 그러면서 가끔은 속으로 안타까워 하고 빙그레 웃기도 하고 혹은 부러워 한다. 또 어떤 때는 슬그머니 놀라기도 한다. 내가 사는 것과 남들이 사는 것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부모 자식 걱정, 집 걱정, 돈 걱정, 아내와 남편의 건강 걱정, 이를테면 누구나 똑 같은 걱정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얘기들이 우리가 날마다 공유하고 사는 인생의 거룩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윤대녕(尹大寧 1962년 5월 1일 충남 예산군 ~ ) 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단국대학교 불어불문학을 전공했으며 198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원(圓)〉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90년〈어머니의 숲〉과 〈사막에서〉로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았다..1995년 소설집 『은어낚시통신』이 큰 반향을 일으키며 대표적인 90년대 작가로 분류됐다.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한 무관심 도시적 감수성 수공업적 정성이 느껴지는 미문(美文) 등이 돋보인다는 평가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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