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0일(월) 맑음
명동성당 - 명동예술극장 - 명동파출소 - 환구단 - 한국은행 본관 - 옛 제일은행 본점 - 포스트 타워
명동성당(사적 제258호)
한국 최초의 본당이자 사울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인 명동성당의 건립공사는 1887년에 시작하여 1892년 5월 8일에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이 때 당시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건축공사에 참여했거나 헌금한 조선인 신자 1,000여명과 조선에서 사목한 선교사 명단도 성당의 머릿돌과 함께 묻었다.
1898년 5월 29일에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를 수호성인으로 하여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부지 14,421㎡에 지어진 명동성당은 연건평이 1,498㎡에 달하먀 길이 69m, 너비 28m, 높이 23m이다. 종탑의 높이는 46.7m이다.
고 의선(E. J. G Coste, 1842~1896) 신부가 설계한 이 간물은 한국의 카톨릭 성당 건축사 뿐만 아니라 19세기 한국 근대 건축사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고딕식 건축물이다.
언덕 위에 위치한 성당 건물은 건립 당시에는 서울 사대문 안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었다.
100여 년에 걸쳐 박해로 점철되었던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명동성당과 함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이 후 사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인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 되었다.
처음 명칭은 종현성당이었으나, 해방 이후 명동성당으로 바뀌었다.
1977년 11월 22일에는 한국의 제258호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출처 : 명동성당 안내문]
명동성당 종합계획[1단계] 신축공사 개요
명동성당 종합계획[1단계] 신축공사 개요도
이재명의사 의거터
이재명 [ 李在明 ]
유형 : 인물
시대 : 근대
출생-사망 : 1890년(고종 27) ~ 1910년
성격 : 독립운동가, 국가유공자
출신지 : 평안북도 선천
성별 : 남
관련사건 : 이완용피습사건
정의 : 1890(고종 27)∼1910. 조선 말기의 독립운동가.
개설 :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8세 때 평양 아청리(衙聽里)로 이사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
1904년 미국노동이민사(美國勞動移民社) 모집으로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제1·2차 한일협약이 강제체결되자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1907년 10월 동경·나가사키(長崎)를 거쳐 귀국하였다. 그리고 1909년 1월 전 통감 이토(伊藤博文)가 순종과 함께 평양을 순행하기로 되었을 때, 이토를 암살하고자 동지 몇 사람과 평양역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창호(安昌浩)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산을 거쳐 연해주로 갔다. 그 뒤 안중근(安重根)에 의해 하얼빈역에서 이토가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친일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 등을 먼저 없애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 생각하고, 여러 동지와 야학당에 모여 이완용은 이재명이, 이용구는 김정익(金貞益)이, 송병준은 이동수(李東秀)가 담당하여 죽이기로 계획하였다.
그 해 9월 상경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12월 22일 서울 종현천주교회당(鐘峴天主敎會堂)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그달 17일 사망)의 추도식에 이완용 등 매국노들이 참석한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군밤장수로 변장한 뒤 교회당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11시 30분경 이완용이 식장에서 나와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려는 것을 칼로 허리와 어깨 등을 세번이나 찔러 쓰러뜨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경찰에 왼쪽 넓적다리를 찔려 중상을 입고 잡혔다. 이 때 운집한 구경꾼들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또한 서울지방재판소에서 방청석을 향해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라.”고 열변을 토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재판장이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하고 묻자, 눈을 부릅뜨고 “야만 섬나라의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만 알았지 의자는 모르느냐.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 라고 고함을 치기도 하였다.
그 뒤 재판장이 또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라고 물었을 때, “2000만 민족이다.”라고 대답하자, 창밖에서 “옳다!” 하는 소리와 함께 흥분한 방청객들이 유리창을 부수었다.
또, 재판장에게 호령하며, “야만 왜종들은 퇴청시켜라. 그리고 창밖에 나열한 한국인을 모두 입장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하고 노기를 띠었다.
사형이 선고되어 공소하였으나 형이 확정되자, “왜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있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재판장을 꾸짖었다.
의거에 공모한 조창호(趙昌鎬)·이동수·김정익 등은 징역 15년, 김태선(金泰善)·김병록(金炳祿)·김용문(金龍文) 등은 징역 10년, 박태은(朴泰殷)은 징역 7년, 김이걸(金履杰)·이응삼(李應三)·김동현(金東鉉) 등은 징역 5년, 이연수(李年遂)는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으며, 이동수는 도피하였다가 그 뒤 잡혔다.
상훈과 추모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기려수필(騎驢隨筆)』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국가보훈처, 1997)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김후경·신재홍, 한국민족운동연구소, 1971)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1(국사편찬위원회, 1965)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애국동지원호회, 1956)
『독립혈사(獨立血史)』(대한문화정보사, 1956)
「이재명의 행적」(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76)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0, 한국학중앙연구원]
명동예술극장 연혁
O 명치좌
1934년 4월 : 타마타 키즈지 설계로 영화관으로 신축됨(지하 1층, 지상 5층)
1936년 10월 8일 ~ 1945년 : 주로 일본영화 상영
O 국제극장
1946년 1월 ~ 1947년 11월 : 미군정하에 국내외 영화 및 공연 사연
O 시공관
1947년 12월 ~ 1957년 6월 : 서울시의 공관(公館)으로 사용
1956년 5월 3일 : 『시립극장』으로 개칭
O 시공관 + 중앙국립극장
1957년 6월 ~ 1961년 11월 : 피란시절 대구 키네마극장에 상주하던 국립극장이 서울 환도후 서울시공관에 자리잡게 되면서 국
립극장과 건물 공동사용
O 국립극장
1961년 11월 ~ 1973년 9월 : 서울시공관이 시민회관으로 이전함에 따라 건물은 온전히 국립극장 소유가 됨
O 예술극장
1973년 10월 ~ 1975년 : 국립극장이 장충동 신축부지로 이전하면서 본 건물은 국립극장 산하 『예술극장』으로 사용됨
1975년 11월 27일 : 장충동 국립극장 건물신축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정부가 본 건물을 대한투자금융에 매각
O 극장 되찾기 운동
2003년 12월 5일 : 문화예술단체, 명동상가번영회, 예술계 인사들의 ‘명동국립극장되찾기’ 발원과 노력으로 마침내 문화
광광부에서 재매입 결정
O 옛 국립극장 복원 사업
2004년 5월 31일 : 문화관광부, 부지매입 완료
2004년 12월 20일 : 삼우설계의 ‘예술의 빛과 시간의 산책’을 복원 건축 설계안으로 최종 선정
2005년 : 공사 착수
O 명동예술극장 개관
2008년 6월 18일 : (재)명동 ∙ 정동극장 통합 운영 정관 개정
2008년 11월 17일 : 구자홍 명동 ∙ 정동극장 극장장 취임
2009년 6월 5일 : 명동예술극장 개관
2010년 2월 26일 : 2극장장(명동예술극장, 정동극장) 책임운영제 직제 개정
[출처 : 명동예술극장 / www.mdtheater.or.kr]
70년대 공포의 명동파출소 / 장발, 미니스커트 단속
명동파출소는 대지 54.90㎡(16평), 연면적 152.34㎡(46평) 규모의 3층 건물로 지난 1965년 10월 1일 신축.
2010년 2월 18일 리모델링공사 완료.
외벽은 명동을 대표하는 건물인 명동성당의 외형과 같이 붉은 벽돌로 치장했고 건물 꼭대기는 삼각형 모양의 지붕으로 장식.
환구단 정문 1
환구단 정문 2
환구단 정문 안내문
환구단 정문
지정번호 : 비지정 / 시대 : 1897년경(2009년 이건) / 소재비 :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97-3
이 문은 대한제국(1897~1910) 초기 환구단 시설을 건설하면서 그 정문으로 지은 것이다.
환구단은 황제가 히늘에 제사를 올리는 시설로서,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당시의 황궁인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의 맞은편 남별궁터에 세웠다.
환구단의 전체시설은 제를 올리는 환구단과 천신의 위패를 모시는 황궁우, 그리고 그 부ㅕㄴ 시설로 어재실, 향대청, 석고각 등을 갖추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황궁우와 석고각 안에 있었던 돌북 뿐이다.
환구단 정문은 원래 황궁우의 남쪽 지금의 조선호텔 출입구가 있는 소공로변에 위하였는데, 1960년대말 철거된 이후 오랫동안 소재를 알지 못하였다.
2007년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 호텔을 재개밣하는 과정에서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던 문이 원래 환구단의 정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정문의 이전 복원을 논의하게 되었다.
여러 후보지 가운데 환구단 시민광장으로 자리를 정한 것은 서울광장 및 덕수궁과 마주보고 있어서 보다 많은 시민이 환구단의 존재를 인식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삼문이고, 가운데 칸이 특별히 넓고 양 측칸을 좁게 조정하였다.
기둥 위에는 출목을 갖춘 이익공식 공포를 사용하였고,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이었던 오얏꽃 문양과 봉황문 등을 장식으로 사용한 점도 특별하다.
[출처 : 환구단 정문 안내문]
환구단 황궁우 1
환구단 황궁우 2
환구단 협문
환구단 삼문
환구단 안내문
환구단(圜丘壇)
지정번호 : 사적 제157호 / 시대 : 1897년(광무 원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87-1번지
환구단(圜丘壇)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황단(皇壇) 또는 원구단(圜丘壇, 圓丘壇), 원단(圜壇, 圓壇)이라고도 한다.
이 자리에는 조산 후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이 있었는데, 고종(高宗 : 1852~1919)이 1897년 황제에 즉의하면서 제국의 예법에 맞추어 환구단을 건설하였다.
1897년(광무 원년) 10월에 완공된 환구단은 당시 왕실 최고의 도편수였던 심의석(沈宜碩 : 1854~1924)이 설계를 하였다.
환구단은 제사를 지내는 3층의 원형 제단과 하늘신의 위패를 모시는 3층 팔가그건물 황궁우(皇穹宇), 돌로 만든 북[石鼓]과 문 등으로 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선총독부가 황궁우, 돌로 만든 북, 삼문, 협문 등을 제외한 환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지었다.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는 상징적 시설로서 당시 고종 황제가 머물던 황궁(현재의 덕수궁)과 마주 보는 자리에 지어졌다.
[출초 : 환구단 안내문]
환구단 석고
환구단 석고 안내문
저경궁터 안내문
대소인원개하마비(大小人䏍皆下馬 : 누구든지 이곳 앞에서는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오라)
한국은행 본관
지정번호 : 사적 제280호 / 시대 : 1912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3가 110번지
이 건물은 일본인 건축가 다쓰노 깅코(辰野金吾)가 살계한 조선은행(1911년 8월 설립)의 본점 건물로 1907년에 착공하여 1912년에 완공되었다.
1950년 6월 대한민국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설립되어 본점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철근콘크리트와 조적의 혼합구조로 지어졌다.
건물의 외벽에는 화강석을 다듬어 붙였고 지붕에는 철골조의 동판을 씌웠다.
이 건물은 좌우대칭을 이루는 H자형 평면으로 만들어졌다.
양쪽 모서리에는 원형의 돔을 얹어 프랑스 성관풍(城館風)의 르네상스식 외관을 보여 준다.
6.25전쟁 때 내부가 불타 버린 것을 1958년에 복구하였고, 1987년 한국은행 신관을 세우면서 1989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2001년 내부를 개조하여 현재 화폐금융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출처 : 한국은행 본관 안내문]
옛 제일은행 본점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1호 / 시대 : 1935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 1가 53-1번지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저축은행(朝鮮貯蓄銀行)으로 세워진 것이다.
건물의 설계안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현상공모를 통해 마련되었는데, 1932년 일본인 히라바야시 킹코(平林 金吾)의 설계안이 채택되었다.
이 설계안을 당시 조선식산은행 영선과에 재직하고 있던 나카무라 마코토(中村 誠)가 일부 수정하였다.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5층의 철근, 철골구조다.
전형적인 네오 바로크(Neo baroque) 양식을 채택하여 은행으로서 신뢰감이 있게 하였다.
정면의 기둥머리는 도릭 오더(Doric order)로 장식하고 출입구에는 높은 계단을 두지 않아 보도와 같은 높이로 만들었다.
내부 영업장 천장에 있는 꽃모양 석고부조(石膏浮彫)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근대건축물 장식 중에 가장 수려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1층에는 영업장, 2층과 3층에는 각 업무 공간, 4층에는 대강당과 각종 회의실이 있다.
5층에는 직원식당을 두어 남산의 전경과 옥상정원을 감상할 수 있게 하였는데 1944년 건물을 크게 고치면서 그 형태가 많이 바뀌었다.
이 건물은 원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우리나라 금융사의 기념비적 건물이다.
1987년 제일은행이 본점을 종로구 공평동으로 옮기면서 현재 스탠다드 차타드 제일지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울중앙우체국 포스트타워(일명 마징가Z)
서울중앙우체국 포스트타워(일명 마징가Z)
서울중앙우체국
1884년 11월 18일 우정총국 설치(종로구 견지동, 현 체신기념관)
1884년 12월 06일 갑신정변으로 업무 중단
1895년 07월 22일 한성우체사(종로구 세종로 위치)설치로 업무 재개
1905년 07월 01일 경성우편국으로 개칭(현위치)
1939년 10월 01일 경성중앙우편국으로 개칭
1949년 08월 13일 서울중앙우체국으로 개칭
1959년 03월 01일 야간창구 업무 개시
2003년 07월 21일 청사개축 및 임시청사 분리사용(야간창구 업무 : 서울중앙->광화문)
2007년 09월 17일 신축청사(포스트타워)에서 업무 개시(야간창구 업무 : 광화문->서울중앙)
2010년 07월 01일 휴일(09:00 ~ 13:00) 및 야간(평일 18:00 ~ 20:00) 우편창구 운영 폐지
포스트타워는 건물의 외관 때문에 ‘마징가Z’라라고도 부르는데,
[출처 : 서울중앙우체국 / www.koreapost.go.kr]
포스트타워는 건물의 외관 때문에 ‘마징가Z’라고도 부르는데, 우체국의 상징인 제비의 날개를 형상화하였다고 한다.
제비는 옛날부터 (흥부와 놀부 이야기 에도 나옴) 우리에게 좋은 소식을 알려주는 새로 알려져 친숙하며 장거리를 여행하며 매우 빠른 새입니다.
제비 마크는 제비 세마리가 겹쳐져 있는 모양으로 "신속, 정확, 친절" 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이 마크는 1984년 부터 현재까지 우체통이나 표지판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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