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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상식

[스크랩] 달마의 의발은 어대로 갔나

달마의 의발은 어디로 갔나..

달마대사는 중국남북조 시대의 선승으로 생멸연대는 -528로 정확하지 않다. 서천 28조의 제28조이며 중국 선종의 초조다. 달마대사에 대해서는 전설 같은 일이 많이 언급돼 있지만 확실한 사실(史實)로서 알려진 것은 드물다.

그 중 가장 믿을 만한 자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파사국 또는 향리국 국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시호(諡號)는 원각대사(圓覺大師)이다. 대승에 뜻을 두고 명상했으며 외국에 포교하기 위해서 남중국에 왔다. 그 후 북쪽의 위나라로 가서 일이 잘되어 여러 가지 선(禪)의 가르침을 폈다.

특히 나이 어린 도육(道育)과 혜가(慧可)라는 두 사람의 승려가 그를 받들면서 4-5년에 걸쳐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수행은 벽관(壁觀 ; 벽을 향해서 좌선하는 것)으로 마음이 본래부터 깨끗한 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한다. 여러 곳을 걸어 다니면서 교화했는데 그의 최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의 거의 전부이다.

그가 낙양의 동남쪽 50km 정도 떨어진 숭산의 소림사에서 면벽하고 9년 동안 좌선했다는 일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달마대사와 양무제와의 회견은 후대의 문헌에서야 비로소 등장하기 때문에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때 무제가 묻고 달마대사가 대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절대적인 진리의 궁극은 어떠한 것입니까(如何是聖諦第一義).

텅비어서 성스러움도 없습니다(廓然無聖).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對朕者誰).

알지 못합니다(不識).

이 대화에서 달마대사는 무제가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양자강을 건너 위나라로 갔다고 한다.

또 무제가 자신이 절을 짓고 경전을 사경하고 스님을 제도한 공적을 들며 공덕이 어느 정도 되느냐는 물음에, 고작해야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을 정도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또 선종 계통에서는 혜가스님이 달마대사로부터 법을 배우기 위해 한쪽 팔을 잘라 바쳤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아무튼 달마대사로부터 혜가(慧可)에게 전해진 선(禪)의 가르침이 당나라시대 특히 7세기경에 선종으로 꽃피웠고, 여러 뛰어난 선승들을 배출해 한국.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달마대사의 고약한 인상

남천축국(또는 향리국) 향지왕의 셋째 왕자 보리다라(달마대사)는 불심이 깊어 반야다라 조사에게 40년간 사사받아 대법을 전수 받았다. 보리다라의 스승인 반야다라는 보리다라의 이름을 통달하고 크다는 뜻의 "달라"라 하게 하고, 진단(중국)으로가서 불법을 전파토록 하였다.

스승은 중국에 가서 불법을 전하되 오래는 머물지 말라고 이야기 하며,아래의 게송을 읊으니 모두가 불교의 앞날을 예언한 것이었다.

가다가 물을 건너

다시 양을 만나니

혼자서 쓸쓸히 강을 건넌다

두 마리 상마는

한 낮에 애처로운데

한그루 계수나무

오랜만에 무성하지...

달마대사는 스승 사후에 중국으로의 불법 전파의 인연이 있음을 알고 동쪽으로 향했다. 바다를 건너 남해 광주에 닿았고, 육로를 걸어 내륙으로 향하였다.

어느날도 큰 들판을 걷고 있는데 논밭은 있으나 씨 뿌린 흔적은 없고, 인가는 있으나 사람마저 살지 않았다. 그리고 갈수록 고약한 냄새가 풍겨 숨쉬기도 어려웠다. 그제야 달마대사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달마대사는 신통력이 있어 견딜 수 있었지만 보통 사라은 그 냄새로 코의 기능이 마비되고 심하면 뇌의 기능이 마비될 지경이라 4~50리는 인적이 끊어 졌던 것이다.

냄새가 심한 들판의 가운데 가보니 길이가 백여자나 되는 대망(뱀)이 죽어 썩느라고 악취를 뿜고 있는 것이었다. 달마대사는 자신의 육신을 근처 풀밭에 벗어 놓고 영혼은 대망의 몸속으로 들어가 움직여 근처 바다에 버리고 다시 들판으로 들어오니 자신이 벗어 놓은 육신이 사라지고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육체가 잇던 근처에 멀쩡한 시체가 있었으나 모습이 무척이나 추하였다.(달마대사의 원래 모습은 무척 미남이었다고 한다). 달마대사는 이 추한 육신의 주인이 자신의 육체를 가지고 갔음을 알고 이 추한 육신의 주인을 찾으려 다녔다.

어느 마을에서 달마대사는 노인으로부터 이 추한 모습의 주인이 "곤륜산 신선"임을 알게되어 신통력으로 곤륜산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보름을 찾아 헤메이다 우연히 한곳에 이르니 만년설 덮인 산에 굴이 보여 들어가 보니 별천지의 세상이 나타났다.

그 굴에서 달마대사는 본래 자신의 육신을 보고 자신의 육신을 가지고 간 신선을 꾸짖었다.

"너는 이 좋은 몸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냐?"

"탐욕한 인간들이 부귀공명에만 눈이 어두워 온갖 죄악을 저지르니 그들에게 신선의 도를 가르쳐서 착하게 살도록 하겠나이다"

"그것도 좋지만 너 자신 불법을 닦아 생사를 해탈할 생각은 없느냐?"

"이미 800세를 산몸 이제 더 살기를 바라리까. 그저 닦은 신선의 도나 펼까 하나이다"

"음 그만하면 4천선(4선정을 닦아서 나는 색계의 4 하늘)은 낚을만하다. 그렇다면 내가 몸을 바꿔지니기로 하지"

이렇게 곤륜산 신선에게 쾌히 자신의 육신을 준 달마대사는 흉측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죽은지 3년만에 나타난 달마대사

곤륜산 신선에게 자신의 육신을 주고 흉측한 모습으로 하산한 때가 양나라 무제. 대통원년으로 서기 527년이 된다.

당시 중국은 불교가 들어온지 약 5백년이라 교학이 발달해 있었다. 더욱기 양무제는 "불심천자"라는 칭송을 들을만큼 불교 발전을 위해 헌신한 왕으로 수 많은 절을 세웠으며 불탑도 쌓고 승려도 양성해 가히 보살의 화신이란 말을 들었다.

이러한 양무제인지라 그는 늘 법의를 걸치고 채식만 하며 도 높은 스님이 계신다면 곧 청하여 법문 듣기를 즐겨 했다. 양무제는 달마대사가 중국에 들어온 것을 알고 법문을 청해듣기 위해 궁중으로 불렀다.

왕은 자기의 공덕이 크게 자랑스러워 달마대사에게 물었다. "짐이 즉위한 이래 천 곳에 절을 짓고 천개의 탑을 쌓았으며 10만의 스님을 길러 냈소이다. 과연 이 공덕이 얼마나 되겠소?"

이에 달마대사는 " 아예 공덕이랄 것도 없소이다."라고 답하였다.

이제까지 왕이 만나본 고승대덕들은 한결 같이 최고의 찬사를 했건만, 이 흉측하게 생긴 중은 무뚝뚝하게 공덕이 없다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달마대사는 양무제에게 " 참 공덕은 절과 탑을 쌓았다는 그 생각을 잊어 버려야 하는 것이 외다. 즉, 선한 일을 하고도 마음에 두지 않는 무(無)의 경지에 다다라야 합니다."라고 조언하였으나, 양무제는 달마대사의 말을 도통 이해 할 수 가 없었다.

양무제는 이러한 달마대사에게 앙심을 품고 무사들을 시켜 암살한 후 급서했다고 발표하고 탑을 세워 시신을 봉안하였다. 백성들은 달마대사의 입적을 심히 애도하였지만 왕이 죽인 사실은 까맣게 몰랐다.

어느날 남방을 시찰하고 도읍으로 가던 "송운"이란 대신이 수레를 타고 고갯길을 내려 오다가 갑자기 수레를 세우더니 부리나케 뛰어내려 마주 오는 스님에게 달려가 절을 하였다.

"큰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너의 대왕이 불법의 참뜻을 모르기에 그냥 떠나는 길이다."

"우리 대왕은 세상 사람들이 불심천자라고 칭송하는 독실한 불자이온데 불법의 참 뜻을 모르다니오?"

"불심천자가 다 뭐냐? 세간의 복을 약간 가지고 큰 공덕을 쌓은 양 우쭐대는 꼬락서닌 걸... 너의 대왕에게 전하라. 그 따위 복 짓는 건 결국 아무것도 없다고..."

"그럼 어디로 가시렵니까 ?"

"서쪽"

이렇게 달마는 서쪽을 가르키며 휭하니 가버렸다.

강을 건너는 달마대사

남방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대신은 양무제에게 달마대사가 서쪽으로 가고 있음을 아렸다. 왕에게 "상에 머물며 복을 짓는 것은 천상낙이나 받지만 결국에는 악취에 떨어진다"라는 달마대사의 말을 전한다.

달마대사를 살해한 양무제는 이에 놀라 달마대사를 안치한 탑을 열어보니 과연 달마대산의 시신은 없고 짚신 한짝만 있을 뿐이었다.

이에 화가난 양무제는 군사를 보내어 달마대사를 쫒게 만들었다. 양자강 나루터에서 양무제의 군사들이 몰려오는 것을 본 달마대사는 나루터에 있는 갈대를 꺽어 타고 유유히 강을 건너 갔다, 이것을 "절로도강"이라 하며, 짚신 한짝을 지팡이에 꿰고 맨발로 걸어가는 "수휴척리"리 한다

면벽하는 달마대사, 그리고 혜가대사와의 만남

양자강을 건넌 달마대사는 숭산 소림사에 이르러 뒷산 천연동굴에 들어가 벽을 향해 앉아 세상의 온갖 인연을 내 던졌다.

아무도 그를 아는 이 없어 사람들은 "벽만 바라보는 바라문"이라 했다. 바닥엔 마른 풀을 깐채 눕는 법 없는 생활 9년. 조석끼니는 아침에만 한번 마을에 내려가 걸식하지만 입을 떼지 않아 사람들은 벙어리인줄 알고 말을 시키지도 않았다.

낮이나 밤이나 바위처럼 우뚝 앉아 지내니 피로에 지칠대로 지쳐 몰골은 말이 아니고 늘어져 내려온 눈꺼풀은 눈을 덮어 앞도 볼 수 없었다.(하루는 눈꺼풀을 도려내여 밖으로 던져 버렸는데 그곳엔 파랗고 싱싱한 나무가 자라니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차(茶)라는 설화도 있다.) 그의 수도하는 모습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은 음식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

달마대사가 벽면수련을 하던 추운 겨울 어느날 신광이라는 젊은 중이 찾아와 제자가 되길 청하였다. 신광은 천하들 돌며 큰 스님을 찾던중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엄동설한에 견디기 힘들었지만 오직 법을 구하기 위한 일념으로 버틴지 사흘. 바위처럼 앉았던 달마대사는 신광에게 " 네가 정말 간절히 법을 구하는지 어디 내게 신(信)을 보이게. 믿음 없는 놈은 천년가여 헛 수고 뿐이지.." 말하였다. 이에 신광은 허리의 칼을 뽑아 왼팔을 싹둑 짤라 바쳤다.

달마대사는 신광을 제자로 삼고 "혜가"란 법명을 지어 주었다. 그날부터 혜가대사는 마늘에 내려가 걸식/탁발을 해가며 스승을 섬기고 선정을 익혔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혜가대사는 좀처럼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없었다.

"스님 저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자비를 베푸사 편안케 하여 주소서"

"편안치 못한 너의 마음을 꺼내 놓아라 내가 편안케 하리라."

혜가대사는 편안치 못한 마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찾아도 찾아도 어디 있는지 모르겟습니다"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하였느니라"

"어떻게 공부하여야 도를 얻나이까"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의 헐떡 거림이 없어 장벽 같아야만 도에 드느니라"

이 말에 혜가대사는 깨어침을 얻었다.

달마대사는 효명제가 세차례에 거쳐 뵙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소림사를 떠나지 않았고, 이에 황제는 가사 두벌, 금발우, 은병, 비단 등을 하사하였으나 돌려 보내기를 몇 번.. 나중에야 받아 들였다.

9년이 더 지나 달마대사는 서쪽의 천축으로 돌아갈 생각에 제자들을 불러 말하였다.

"때가 되었다. 너희가 얻은 바를 말해보라"

제자 도부는 "문자에 집착 말되 포기하지 않으며 그걸 구도의 도를 삼는 것입니다. 라고 답하였으며, 이에 달마대사는 " 네가 얻은 것은 나의 가죽이다 "

총지비구니는 " 아난이 부처님 나라를 한번 기쁘게 보고는 다시 안본 같습니다."라고 답하자, 달마대사는 "너는 나의 살을 얻었을 뿐이다"

제자 도육이 " 모두가 공이요 텅빈 것이니 제가 보기엔 어디에도 법이 존재치 않습니다." 라고 답하자, 달마대사는 " 너는 나의 뼈를 얻었도다."

끝으로 혜가대사의 차례가 되자 그는 예만 행한체 꼼짝 않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에 달마대사는 크게 웃으며 "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다" 라고 답하며 혜가를 선종의 제2대 조사로 삼고 중생을 제도하는 큰 임무를 맡겼다.

달마대사는 헤가대사에게 의발을 전하며

" 과거 여래불께서 의발을 가섭대사에게 넘겨주신 후 28대로 내게 이르렀다. 내 오늘 이것을 넘겨주며 이르노니 후대인들이 어찌 동방에서 불법을 받았는지 의심커든 이 의발과 불법을 보여라. 그럼 어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내 입멸 후 2백년에 이르러서는 의발 전수가 그치게 되리. 그때는 두루 도를 밝히는 이가 많아 지리라." 하였다

과연 예언대로 2백년 후 의발전수는 6조 혜능에 이르러 그쳤다.

그후 달마대사가 어디서 어떻게 생애를 마쳤는지 아무도 모른다. 사막을 거쳐 다시 천축(인도)로 갔다고도 하고, 독살 당했다고도 하나 사실을 알수 없다. 다만 그가 매우 오래 살아서 150세까지 산 것은 사실이라 한다.

 

출처 : 여래사
글쓴이 : 혜담스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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