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남문화원·문화해설사·인문학

성남문화해설사 양성교육과정 - 제10강 경기지역 石碑의 이해 - 손환일 박사

2012년 7월 18(수) 성남문화해설사 양성교육과정

제10강 경기지역 石碑의 이해

손환일 박사(경기대학교 전통문화콘텐츠 연구소 연구교수)

 

[교재]

교재 표지

 

 [강의내용]

 강의내용 1

 

 강의내용 2

 참고사항~ 곽주부부의 편지...^-^

 

▶ 400년 전의 편지, 발견되다!

지난 1989년 4월 5일,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한 무덤에서 미라 상태의 시신이 발견됐다. 또한 손톱, 머리카락과 함께 172통의 편지도 발견됐는데...이렇게 많은 편지가 한꺼번에 발견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함께 묻혀있는 손톱과 머리카락은 누구의 것이며 왜 시신과 함께 묻힌 것일까? 그리고 수많은 편지들에는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


▶ 곽주 부부는 왜 떨어져 살아야만 했나?

편지를 쓴 남편 곽주는 현풍 곽씨 집안의 사람으로, 편지를 통해 아내 하씨와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부부인 두 사람이 왜 굳이 편지를 써야만 했을까? 곽주는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둘째 부인인 하씨와 비슷한 또래였다. 가정의 화목을 위해 곽주는 따로 집을 지어 부인과 떨어져 살았고, 편지로나마 서로의 소식을 전하게 된 것이었다.


▶ 시대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172통의 편지

172통의 편지에는 사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손님을 맞이할 때의 상차림과 옷차림을 통해 당시 양반가의 접대 문화에 대해서도 엿볼 수 있다. 또한 무덤에서는 하씨부인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유물들이 나왔는데, 무덤 속에서 나온 옷을 통해 하씨부인 생전의 모습을 복원해본다.


▶ 조선 선비의 삶

그렇다면 곽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가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보낸 편지에는 아버지의 병환을 걱정하는 효심 지극한 아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또 집안 대소사까지 일일이 챙기는 가장의 모습을 비롯해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자상한 면모도 보여주고 있는데...편지들은 더 나아가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 자네 몸이 편하면 되지 아들은 관계치마소.

모두 4남 5녀를 뒀던 곽주 부부. 부인이 산고를 겪는 중에 곽주가 보낸 편지들에는 남편의 초조함이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 자신이 직접 약을 달여 주겠다는 부분, 그리고 또 딸을 낳을까 노심초사하는 부인에게 오히려 위로를 건네는 곽주의 모습에서, 부인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극진한가를 알 수 있다. 편지를 통해 나타난 조선 양반가의 자녀 교육 방식이 어떠했는가도 살펴본다.


 

대구박물관 '곽주부부…'전, 400년전 부부·가족 일상 담겨

"무슨 일로 집안이 조용한 때가 없는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자네의 마른 성질에 어찌 견디는고. 자네가 '한데 살기 편치 아니하다'고 말하면 다음 달로 제각기 들어갈 집을 짓고 제각각 살기로 하세."

400년 전 조선시대 부부들도 갈등 끝에 '별거'를 결정했다. 편지의 발신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유명한 곽재우의 종질(從姪·사촌형제의 아들)인 곽주(郭澍·1569~1617). 첫째 부인과 사별 후 진주 하씨(晉州 河氏·1580~1652 이후 추정)와 재혼한 그는 부인 하씨가 전처 아들과 계속 갈등을 빚자 "따로 살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무덤에서 출토된 한글 편지들을 통해 17세기 조선시대 가족의 일상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이색 전시회가 마련됐다. 국립대구박물관(관장 함순섭)이 21일부터 9월 18일까지 진주 하씨 무덤에서 출토된 편지와 복식을 공개하는 특별전 '400년 전 편지로 보는 일상-곽주 부부와 가족 이야기'다.

진주 하씨 무덤에서 출토된 한글 편지. 남편 곽주가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로, '죽엽주 만드는 법'이 적혀 있다. /국립대구박물관 제공
1989년 현풍곽씨 후손들이 12대 조모(祖母)인 진주 하씨의 무덤을 이장하던 중 하씨의 관 속에서 의복류 81점과 함께 한글 편지 172점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곽주가 부인 하씨에게 보낸 편지가 105점으로 가장 많았고 시집간 딸이 하씨에게 쓴 편지 42점, 하씨가 곽주에게 쓴 편지 6점, 친정어머니가 보내온 편지 등이 있었다. 후손들은 중요민속자료 229호로 지정된 이 유물들을 2006년 국립대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편지 100여점과 무명 솜장옷 등 복식 10여점을 선보인다.

편지를 통해 부부의 일상생활과 내면까지 읽을 수 있어 흥미롭다. 곽주가 과거 시험을 보러 서울로 가던 중 보낸 편지들에는 아이들과 아내를 걱정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담겼다. "아기들 데리고 어찌 계신가. 기별을 몰라 걱정하네." "정녜, 정녈이(두 딸) 절대로 밖에 나가 사내아이들하고 한데서 못 놀게 하소. 외딴 집에 낮이라도 절대로 혼자 계시지 말고 조심조심하여 계시오."

부인 하씨가 겪었던 시댁과의 갈등, 어머니로서 느끼는 삶의 애환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곽주가 결혼 초기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에는 "자네 팔자가 남의 불평을 들으라고 타고났으니 삼년은 눈을 감고 귀를 재우고 견디소"라고 써있다. 하지만 하씨가 전처 아들과 계속 갈등을 빚자 "자네에게 많이 서럽게 아니하거든 삼년은 견디고…"라며 달래다가 급기야 아내 뜻을 받아들여 별거를 결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둘은 떨어져 살면서도 편지로 왕래하며 많은 사연을 주고받았다. 출산을 앞둔 아내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산기가 시작하거든 즉시 사람을 보내소. 밤중에 와도 즉시 갈 것이니"라고 걱정하는가 하면, 딸아이를 할머니 댁에 데려갈 때 연초록 물든 저고리, 보라색으로 물들인 무명 바지를 해 입히라고 당부하는 세심한 모습도 보인다.

민보라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선시대 여성들은 엄격한 유교적 규범에 의해 자기감정을 내색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곽주의 편지에 비친 부인 하씨는 자기감정과 의견을 솔직히 표현하고 거처까지 옮긴 적극적인 여성이었다"고 해석했다.

대기근과 전염병이 만연했던 당대 사회상도 읽을 수 있다. 곽주의 편지에서는 아이들의 병치레에 대해 걱정하는 내용이 자주 보인다. "종기에는 소주가 가장 좋으니 꿀 위에 소주를 가득 넣어 보내소"라거나 석웅황, 생강 등 음식을 이용한 다양한 치료법이 등장한다. 죽엽주·포도주 만드는 법, 집에서 수확한 면화를 노비들에게 분배한 기록, 시집간 딸이 "이젠 다시는 친정에 못 갈 것"이라며 눈물로 보낸 편지도 눈길을 끈다. (053)768-6052

 


 

소례댁에게

 

 

 

언상이가 오거늘 장모님하고 모두 편히 계시다 하니 기뻐하네.

정렬이는 앞으로 엎어져 몹시 상하여 있다 하니 어찌 엎어졌는고.

놀랍게 여기네.

이 달이 다 저물어 가되 지금까지 아기를 낳지 아니하니 정녕 달을 그릇 헤아렸는가 하네.

오늘 기별이 올까 내일 기별이 올까 기다리다가 불의(不意)에 언상이 다다르니

내 놀란 뜻을 자네가 어찌 다 알꼬.

부디 (산기가) 시작하면서 사람을 즉시 보내소.

비록 쉽게 낳을지라도 부디 사람을 보내소.

남자 (종이) 없을지라도 여자 종을 보내나마 즉시 즉시 보내소. 기다리고 있겠네.

종이에 싼 약은 내가 가서 달여 쓸 것이니 내가 아니 가서는 자시지 마소.

비록 딸을 낳아도 절대로 마음에 서운히 여기지 마소.

자네 몸이 편하면 되지 아들은 관계치 마소

바빠 이만. 즉일(卽日).

 

 

 

- 조선 광해군(光海君) 시절의 선비 곽주(郭澍, 1569-1617)가

별거중인 아내 河氏의 출산을 걱정하며 보낸 400년 전의 한글 편지다.

편지 원본은 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강의내용 3

.오류~ 농산집요: 행촌 이암이 '명나라'에서 가져 온 책→ '원나라'에서 가져 온 책

▶ 농업-역대의 왕들이 모두 장려하고 공민왕때는 이암이 원의 농서 농산집요를 간행했다.

콜미[카테고리] 역사이야기→ "고려후기의 사회와 문화 /이암이 원의 농서 농산집요를 간행" 참조

 

 강의내용 4

오류~ '최병창' 신도비 기생묘...'최병창'→'최경창'/ '안성'으로 이장→ '파주'로 이장

 

기생 홍랑과 최병창의 사랑| ◈故言名言 역사문화◈
一切唯心造 | 조회 32 |추천 0 | 2010.08.30. 11:22

★기생 홍랑의 지독한 사랑★

조선 선조 때의 함경남도 홍원 출신의 이름난 예기(藝妓)이자 재색을 겸비한 여류시인이었던 홍랑(洪娘)은 기생으로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위치까지 올라갔던 인물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가라고 할 수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그녀의 무덤과 비석이 버젓이 있으며, 그 문중에서는 지금까지도 해마다 시제와 제사를 홍랑에게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기생으로는 유일하게 사대부의 족보에까지 올라간 홍랑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유교적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시대적 질곡을 뛰어넘어 천민의 신분으로 양반집 선산에 그의 유골이 묻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파주에 있는 해주 최씨 문중 산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홍랑의 이 무덤을 근거로 그녀의 애틋한 삶을 추적해 들어가 보면 역사속의 엄연한 현실로 각인된 한 여인의 지고한 사랑과 정신을 만날 수 있어서 그 감동은 더욱 커진다.


함남 홍원 출신인 홍랑은 경성(鏡城) 관아의 관기였다. 기생의 출신으로 비록 신분은 비천했으나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던 홍랑은 누구나 다 꺾을 수 있는 노류장화로 머물지 않았다.

홍랑과 최경창의 묘소를 함께 찍은 사진, 화면 위가 최경창의 묘소

교방(敎坊)에서 각종 악기와 가무를 단련하면서도 문장과 서화 등의 기예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홍랑은 관아의 연회장에서 흥을 돋우고 미색을 흘리는 여느 기생과는 그 품성과 재주가 남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문학적 소양과 재주는 이미 양반 사대부나 유명한 시인가객들에 뒤지지 않았으며, 일부종사를 맹목으로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기생이었지만 자신의 정절을 받쳐 사랑할 운명적 만남을 꿈꾸며 몸을 함부로 놀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남자들의 유혹은 도를 더해갔으나 홍랑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런 홍랑의 아름다운 재색과 지혜는 마침내 당시 삼당시인(三唐詩人) 또는 팔문장(八文章)으로 명성이 높았던 고죽(孤竹)최경창(崔慶昌)을 만나면서 세세생생에 변하지 않을 뜨거운 사랑으로 내뿜어지게 된다.

최경창 묘비

고죽 최경창은 탁월한 문장가인데다 음률을 잘 알고, 악기를 다루는 재주 또한 뛰어났던 인물인데, 과거에 합격한 5년 후인 1573년(선조 6년)에 함경북도 경성 지방의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하게 된다.


변방에 위치한 경성은 옛 부터 국방의 요지로 취급되는 대단히 중요한 군사 지역이었으므로 가족을 동반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경창은 이미 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부임하여 오지 중의 오지인 경성에 머물러야 했다.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던 고죽 최경창과 경성의 최고 기생이었던 홍랑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관기였기 때문에 관리와 만나는 일은 매우 자유로웠을 것인데, 홀로 생활을 하던 최경창에게 홍랑은 운명적 사랑에 불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농밀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더욱 뜨거워져 한 몸처럼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결국 홍랑은 최경창과 동행하여 군사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막중(幕中)에서 함께 기거하며 부부처럼 정을 쌓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 봄, 두 사람의 사랑에 이별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찾아온다.


임기가 끝난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노비와 비슷한 신분이었던 기생은 관아에 속해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법으로 강력히 구속당하고 있어서 해당 지역의 관청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뜻밖의 이별 앞에 선 홍랑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최경창의 상경은 홍랑에게 있어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이별을 눈앞에 둔 그녀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홍랑은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기 위하여 서울로 가는 최경창을 배웅하며 경성에서 부터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태산준령을 넘고 넘어서 며칠 길을 마다 않고 따라갔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두 사람의 발길은 이윽고 함관령(咸關嶺)고개에 이르렀고, 더 이상 경계를 넘을 수 없었던 홍랑은 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뒤로 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길 옆에 피어있는 산버들이었다.


울음을 삼키면서 버들가지에 다가간 홍랑은 그 가지를 꺾어 고죽에게 주며 구슬프게 시조 한 수를 읊었으니 우리가 지금도 외우고 있는 “묏버들 가려꺾어”이다. 이미 날은 저물고 비는 내리는데 피할 수 없는 이별 앞에서 홍랑도 최경창도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님에게 바치는 순정은 잎이 시들었다가도 심기만 하면 다시 싹을 틔우는 묏버들처럼 항상 그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한 이 연정가(戀情歌)처럼 그가 떠난 뒤 홍랑은 그리움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함관령에서 홍랑과 애끓는 이별을 뒤로 하고 떠나온 최경창 역시 서울에 돌아온 뒤 곧바로 병으로 자리에 누워 그해 봄부터 겨울까지 일 년 내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최경창이 아파서 누워있다는 소식은 바람에 바람을 타고 멀고 먼 경성의 홍랑에게도 들렸으니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곧바로 경성을 출발하여 서울을 향해 길을 나섰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7일 만에 서울에 이르렀고, 곧 바로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최경창을 찾아 갔다.


거의 2년만에 최경창을 다시 만난 홍랑은 그의 수척함에 마음이 아팠지만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조석으로 병수발을 들었다. 그 결과 최경창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차츰 회복되어 갔다.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두 사람의 재회는 뜻밖의 파란을 몰고 왔다.


홍랑과 최경창이 함께 산다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 까지 비화되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1576년(선조 9년) 봄에는 사헌부에서 양계(兩界)의 금(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의 파직을 상소하기에 이른다. 결국 최경창은 당쟁의 세력다툼이 치열한 당시 사회의 표적이 되어 파직 당했고, 홍랑은 나라의 법을 원망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경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양계의 금’이라고 하는 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서울 도성출입을 제한하는 제도를 말하는데, 함경남도의 홍원 출신인 홍랑이 서울에 들어와 있는 것을 문제로 삼은 것이었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때는 마침 명종 왕비인 인순왕후가 돌아가신지 1년이 채 안 된 국상 중이라 홍랑의 일은 결국 최경창을 파직까지 몰고 가는 불씨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두 연인의 애틋한 재회는 파직과 이별로 막을 내렸지만 최경창은 자신을 향한 홍랑의 지극한 사랑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는데, 안타깝고 가여운 자신의 마음을 ‘송별’이란 시에 담아 떠나는 홍랑에게 주었다고 한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리

함관령에 올라서 옛노래를 부르지마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옛날, 함관령에서 이별할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보내며 이 가지를 자신처럼 여겨 달라 했던 그녀의 시에 최경창은 난초 한포기를 건네는 것으로 화답하며 자신의 애끓는 심정과 쓸쓸한 홍랑의 마음을 위로했던 것이다.


아녀자의 몸으로 먼길을 걸어와 상경해 만난 지 7년 후 1582년 최경창은 다시 함경도로 부임했고 이듬해 선조로부터 성균관직강을 제수 받아 상경 중 객관에서 45세로 죽는다. 이때 홍랑은 고죽의 운구를 따라와 파주시 월롱면 영태리에 있는 묘소에서 삼년 간 시묘살이를 한다.


멀리 함경도 땅에서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홍랑에게 날아든 최경창의 사망소식은 그녀로 하여금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을 안겨주었다.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死者不可還生) 법이니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통한에 홍랑은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홍랑은 곧 바로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객사를 했으니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마땅히 없을 것이란 사실에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경창의 묘소와 묘비

최경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에 당도한 홍랑은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시묘살이를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 끝에 방법을 생각해낸 홍랑은 몸을 씻거나 꾸미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천하일색인 자신의 얼굴을 훼손하여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추녀로 만들었다.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홍랑은 또한 얼굴에 숯검정칠을하여 아무도 곁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 그녀가 시묘살이 하는 것에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그 덕분에 홍랑은 최경창의 삼년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3년간의 상을 마친 뒤에도 고죽의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그의 영혼 앞에서 살다가 죽으려 했던 홍랑이었지만 하늘은 그녀에게 그런 작은 행복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으니 바로 임진왜란의 발발이 그것이었다.

고죽과 홍랑의 묘소 전경

홍랑 한 몸이야 사랑하는 임의 곁에서 그 즉시 죽더라도 여한이 없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문장과 글씨들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최경창이 남긴 유품을 챙겨서 품에 품은 홍랑은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향했는데,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 그녀의 종적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전국토가 황폐화할 정도로 잔혹했던 전쟁 중에서도 오늘날까지 고죽 최경창의 시와 문장이 전해지게 된 것은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그것을 지켜온 홍랑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홍랑은 전쟁이 끝난 뒤 해주 최씨 문중에 최경창의 유작을 전한 후 그의 무덤 앞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으니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그녀의 무덤이 있다.


죽음조차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은 양반 사대부 문중까지도 감동시켰으니, 비록 천민의 신분이었지만 최경창의 묘소 바로 아래에 그녀를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숨 막히는 사랑과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절개로 홍랑이 지켜냈던 최경창의 유작은 그 후「고죽집」이라는 문집으로 만들어졌고, 그의 글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연을 지니고 있는 홍랑의 무덤 옆에는 1980년대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홍랑가비가 부끄러운 듯 다소곳이 서있는데, 그 시비가 매우 인상적이다. 돌로 만들어 세운 이 시비는 앞면이 고죽시비라 되어 있고, 뒷면이 홍랑가비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가비는 처음에는 마을 뒷편에 세워졌으나 나중에 묘역 옆으로 옮겨서 지금은 묘역 옆에 있다

이 비석은 살아서는 만남과 이별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사랑이 죽은 후에는 영원히 함께 있으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세운 사람의 정성과 재치를 느끼게 하는 노래비가 아닐 수 없다.

◆ 홍랑의 후손을 찾다. ◆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이야기를 소상히 적고있는 <회은집>에 따르면 유일자(有一子), 즉 아들 한 명을 두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는 누구일까? 취재진의 추적결과 최경창의 서자 최즙을 찾을 수 있었다. 그 후손은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서른 네살의 최경창이 홍랑을 만나 함께 지낸 것은 불과 6개월 남짓. 짧은 사랑이었지만 그 뜨거움은 400년의 세월에도 식지않고 후대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가람 이병기가 시조와 한시가 진품임을 확인한 글

 

 강의내용 5

오류~ "정종철"벼루→ "정철조"벼루

▶ 돌에 미쳐 자기의 호를 석치(石痴)라 했던 정철조(鄭喆祚)는 좋은 돌만 보면 절을 올리고 벼루를 만들었다던 18세기의 인물이다.

콜미 [카테고리] 역사이야기→ "선비의 仁을 이루는 벼루" 참조

 

 강의내용 6

 

 강의내용 7

 

강의내용 8

 

콜미[카테고리] 역사이야기→ "예학(禮學)의 종장(宗丈)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 고택" 참조...^-^

 

 [카테고리] 역사이야기→ "예학(禮學)의 종장(宗丈)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 제자 송시열 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