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남문화원·문화해설사·인문학

성남문화해설사 양성교육과정 - 제12강 고전문학 속의 성남 - 이웅재교수

2012년 7월 25(수) 성남문화해설사 양성교육과정

제12강 고전문학 속의 성남

이웅재(전 동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수필가)

 

[교재]

 교재 1

 

 교재 2

 

 교재 3

 

 교재 4

 

 교재 5

 

 교재 6

 

 교재 7

 

 교재 8

 

 교재 9

 

 교재 10

 

[강의내용]

 강의내용 1

 

 강의내용 2

 

잘풀어임경업:

 

본관 평택(). 자 영백(). 호 고송(). 시호 충민(). 충주() 출생. 철저한 친명배청파() 무장()이다.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 1620년 소농보권관(), 1622년 중추부첨지사를 거쳐 1624년(인조 2) 정충신() 휘하에서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그 후 우림위장() ·방답진첨절제사(使) 등을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좌영장()으로 강화에 갔으나 화의가 성립된 후였다. 1630년 평양중군()으로 검산성()과 용골성()을 수축하는 한편 가도(椵)에 주둔한 명나라 도독() 유흥치()의 군사를 감시, 그 준동을 막았다.

1633년 청북방어사 겸 영변부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으며, 공유덕() 등 명나라의 반도()를 토벌, 명나라로부터 총병() 벼슬을 받았다. 1634년 의주부윤으로 청북방어사를 겸임할 때 포로를 석방했다는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1636년 무혐의로 복직되었다. 같은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원병을 청했으나 김자점()의 방해로 결국 남한산성()까지 포위되었다. 그 후 청나라가 명나라 군대를 치기 위해 병력을 요청하자 수군장()으로 참전했으나 명나라와 내통, 피해를 줄이게 했다.

1640년 안주목사(使) 때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주사상장()으로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 다시 명군과 내통하여 청군에 대항하려다가 이 사실이 탐지되어 체포되었으나 금교역()에서 탈출했다. 1643년 명나라에 망명, 명군의 총병()이 되어 청나라를 공격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이 때 국내에서 좌의정 심기원()의 모반에 연루설이 나돌아 1646년 인조의 요청으로 청나라에서 송환되어 친국()을 받다가 김자점의 밀명을 받은 형리()에게 장살()되었다. 1697년(숙종 23) 복관(), 충주 충렬사() 등에 배향되었다. [출처]다음 지식

 

 

 강의내용 3

 

서오릉 장희빈 대빈묘

 

잘풀어임춘 [林椿]고려 문인 | 브리태니커

 

고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 고려 건국공신의 자손으로 할아버지 중간(仲幹)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충경(忠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버지 광비(光庇)와 큰아버지 종비(宗庇) 모두 한림원의 학사직을 지내 구귀족사회에서 일정한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큰아버지 종비 아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청년기부터 문명을 날리며 귀족자제다운 삶을 누렸다. 나이 20세를 전후한 1170년(의종 24)에 무인란이 일어나자 그의 삶은 일대 전환을 맞게 되었다. 1차 대살륙 때 일가가 화를 당하여 조상대대의 공음전(功蔭田)조차 일개 병사에게 빼앗겼다. 개경에서 5년 정도 숨어 지내면서 출사(出仕)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친지들로부터도 경원당하자 살아남은 가속을 이끌고 영남 상주의 개령으로 옮겨가 7년여의 유락생활(流落生活)을 했다. 남아 있는 그의 글 중 많은 부분이 이 당시에 씌어진 것인데 대부분 실의와 고뇌에 찬 생활고를 하소연하는 것들이다. 당시 정권에 참여한 아는 인사들을 통해 여러 번 자천(自薦)을 시도하여 정권에 편입하려 했다. 1180, 1183년에 절친한 친구였던 이인로와 오세재가 연이어 과거에 합격했는데 이때쯤 개경으로 다시 올라와 과거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뒤 경기도 장단(長湍)으로 내려가 실의와 곤궁 속에서 방황하다가 요절했다. 이인로가 그의 문집 서문에 쓴 것에 의하면 "청춘삼십 백의영몰"(靑春三十白衣永沒)이라 하여 30세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가 남긴 글 가운데 "나이 40에 양귀밑털이 다 희어졌다"는 말이 있어 1152년에 태어난 이인로와 동년배인 듯하다. 따라서 그는 30대 후반에 요절한 것으로 보인다. 이인로·오세재 등과 더불어 죽림고회(竹林高會)에 나가 술을 벗하며 문학을 논하여 고려 중기 문단을 대표하는 문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주기사상(主氣思想)을 바탕으로 하여 기질이나 개성을 중시하는 문장론을 주장했다. 고사를 많이 사용하여 문장을 아름답게 수식하는 변려문을 많이 남겼으나 속으로는 한유(韓愈)가 주장했던 고문운동(古文運動)에 찬동하여, 〈답영사서 答靈師書〉에서 명유(名儒)라고 했던 사람은 모두 당·송대의 고문가(古文家)였다. 김부식 이래로 소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당시 문풍(文風)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문집으로 〈서하집〉이 있으며, 한국 가전문학(假傳文學)의 선구적 작품인 〈국순전 麴醇傳〉·〈공방전 孔方傳〉을 남겼다.

 


임춘, <공방전(孔方傳)>

작품 해설1

전(傳)의 형식을 빌어 돈을 의인화한 것이다. ≪서하선생집 西河先生集≫ 권5와 ≪동문선≫ 권100에 실려 있다. 제목의 ?공방?은 엽전의 둥근 모양에서 공(孔)을, 구멍의 모난 모양에서 방(方)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임춘은 무신란을 만나 겨우 도망하여 목숨은 보전하였으나, 극도로 빈한한 처지에서 불우한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따라서 돈을 소재로 취한 것은 그의 곤궁했던 삶과 관련이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인간의 생활에 돈이 요구되어 만들어져 쓰이지만, 그 때문에 생긴 인간의 타락상을 돈의 속성과 관련이 있는 역대의 고사를 동원하여 결구(結構)하였다.

작자가 작품의 말미에서 사신(史臣)의 말을 빌려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이익을 좇는 자를 어찌 충신이라 이를 것인가. 공방이 때를 만나고 주인을 만나 적지 않은 사랑을 받았으니, 응당 이익을 일으키고 해가 됨을 덜어 그 은덕에 보답해야 할 것이거늘, 권세를 도맡아 부리고 사사로운 당(黨)을 만들었으니, 충신은 경외(境外)의 사귐이 없다는 것에 어그러진 자이다.?라고 한 평결(評結)은 이 글의 주제이다.

즉, 공방의 존재가 삶의 문제를 그릇되게 하므로 후환을 막으려면 그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다. 난세를 만나 참담한 가난 속에 지내다 일찍 죽고 만 작자의 돈의 폐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작품 해설2

고려 무신 집정 때의 문인 임춘이 돈을 의인화하여 지은 가전체 작품으로, 돈이 생겨나게 된 유래와 돈이 인간 생활에 미치는 각종 이득과 폐해를 사람의 행동으로 바꾸어 보여 줌으로써, 사람들이 재물을 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지은이 임춘은, 공방의 존재가 삶의 문제를 그릇되게 하므로 후환을 없애려면 그를 없애야 한다고 결론 지음으로써, 돈의 폐해에 대해 비관적 인식을 보여 주고 있다.

임춘은 “공방전”에서 돈이 벼슬하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자기와 같은 불우한 처지에서는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는 세태를 비판하고, 벼슬을 해서 나라를 망치는 무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이라고 하겠다.

임춘은 무신란을 만나 겨우 목숨은 보전하였으나, 극도로 빈한한 처지에서 불우한 일생을 마친 구귀족의 후예였다. 몰락을 겪고 구차하게 살아가면서, 화려한 공상이나 관념적인 사고의 틀을 깨고, 구체적인 사물과의 일상적인 관계를 통해서 자기의 처지를 나타내는 방법을 택했다. 그의 ‘국순전’이 술을, ‘공방전’이 돈을 의인화한 것이라는 것은 그의 삶을 염두에 두면 그리 우연만은 아니다. 현실에 대한 그의 불만(관료들의 부정, 부패)은 자기 주위의 접하기 쉬운 생활에서부터 비롯될 수 있는 것이었다.

직접적인 서술이 아닌 의인화로서 풍자적인 교훈성을 지닌 “공방전”은, 형식적인 면에서 소설 정착의 전단계(前段階)이며, 내용적인 면에서 계세징인(戒世懲人)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작품 내용

공방의 집안은 수양산 속에 숨어 지내다 황제 때 공방이 채용되어 세상에 처음으로 나왔다. 공방은 한나라 때 홍려경으로 등용되어 오왕 비의 비호 아래 큰 이익을 보았고, 무제 때는 부민후를 지냈다. 그러나 공방의 성질이 탐욕스럽고 더러워, 돈을 중하게 여기고 곡식을 천하게 여기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근본(농사)을 버리고 장사 잇속만을 좇게 하였다. 또, 인물을 대함에도 어질고 불초함을 묻지 않고 재물만 많이 가진 자면 가까이 사귀었다.

그러다가 그것을 미워하는 이의 탄핵을 받고, 드디어 쫓겨나게 되었다. 당나라․송나라 때 다시 그의 무리와 아들이 채용되었으나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공방의 사후에도 그의 제자 무리들이 등장하여 세상에 작패가 끊이지 않았다.

 

작가 소개

자 기지(耆之). 서하(西河) 출생. 과거에 수차 낙방하였으며, 1170년(의종 24) 정중부의 난 때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 등과 함께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한문과 당시(唐詩)에 능하였으며, 이인로가 그 유고(遺稿)를 모아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6권을 엮었다.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시문(詩文)이 기록되어 있고, 두 편의 가전체 소설이 전한다. 예천 옥천정사(玉川精舍)에 제향되었고, 저서에 《국순전(麴醉傳)》, 《공방전(孔方傳)》 등이 있다.


 

공방전”의 주제적 의미

이 작품에서는 인간의 삶에서 돈이 요구되어 만들어져 쓰이지만 그 때문에 생긴 인간의 타락상을 역사적으로 살피고 있다. 작자가 사신의 말을 빌어 작품의 말미에서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이익을 좇는 자를 어찌 충이라 이를 것인가. 공방이 법을 만나고 주인을 만나 적지 않은 사랑을 받았으나 응당 이익을 일으키고 해가 됨을 덜어 그 은덕에 보답해야 할 것이거늘, 권세를 도맡아 부리고 사사로운 당을 만들었으나 충신은 경외(境外)의 사귐이 없다는 것에 어그러진 자이다.’라고 한 내용은 그러한 사실을 압축하여 제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공방의 존재가 삶의 문제를 그릇되게 하므로 후환을 막으려면 그를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 난세를 만나 참담한 가난 속에 지내다 일찍 죽고 만 임춘의, 돈의 폐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감상

이 작품은 서사 양식으로서의 ‘전(傳)’의 특성과 우회적인 요건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돈을 의인화시켜서 인간적인 품격을 부여하는 방식은 일종의 우의적인 표현법에 해당된다. 돈의 속성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과 각성을 의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의 사실성과 우화의 윤리성을 결합시킨 것이 바로 이 작품의 특징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공방’ - 둥근 모양에서 ‘공(孔)’이라 하고, 구멍의 모난 모양에서 ‘방(方)’이라 함 - 은 욕심이 많고 염치가 없는 부정적 성격의 소유자로 백성들로 하여금 오직 이익을 좇는 일에만 종사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는, 일반 선비들과 달리 천하게 여겼던 시정의 사람들과도 사귀기도 하는데, 이는 ‘공방’이 단순하게 ‘돈’을 드러낸다든가 탐욕스러운 한 전형적 인간을 내세운다기보다는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하기 위한 작자의 의도가 반영된 사물로 여겨질 수 있음을 뜻한다. 즉, 작자는 이 작품을 통하여 돈의 내력과 성쇠를 보여 줌으로써 사회상을 풍자하는 경세(警世)의 효과를 나타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돈이 요구되지만 돈 때문에 인류는 간사해지고 말썽이 생긴다. 따라서 돈이 두통거리이니 후환을 막으려면 그것을 없애야 한다는 의도가 드러나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하여 돈의 용도가 바르게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경제 관념을 엿볼 수 있다.


가전(假傳)에 대하여

교훈을 목적으로 사람의 일생을 압축 · 서술한 교술문학이다. 물건을 의인화하여 경계심을 일깨워 줄 목적으로 지어졌다. 앞서 생성된 패관문학이 개인의 창작물이 아님에 비하여 가전은 개인의 창작물이어서 소설에 한 발짝 접근된 형태이다.

가전의 대표작에는, 임춘-국순전(술 의인화). 공방전(돈 의인화). 이규보-국선생전(술 의인화).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 거북이 의인화). 이곡-죽부인전(竹夫人傳 대나무 의인화). 이첨-저생전(楮生傳 종이 의인화). 석식영암-정시자전(丁侍者傳 지팡이 의인화) 등이 있다.

 

잘풀어이규보 [李奎報]고려 문인 | 브리태니커

1168(의종 22)~ 1241(고종 28).

고려의 문인.

본관은 황려(黃驪). 자는 춘경(春卿), 초명은 인저(仁低),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9세 때 이미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14세 때 성명재(誠明齋)의 하과(夏課)에서 시를 지어 기재(奇才)라 불렸다. 소년시절 술을 좋아하며 자유분방하게 지냈는데, 과거지문(科擧之文)을 하찮게 여기고 강좌칠현(姜左七賢)의 시회에 드나들었다. 이로 인해 16, 18, 20세 3번에 걸쳐 사마시(司馬試)에서 낙방했다. 23세 때 진사에 급제했으나 이런 생활을 계속함으로써 출세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개성 천마산에 들어가 백운거사를 자처하고 시를 지으며 장자(莊子)사상에 심취했다. 26세 때 개성에 돌아와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당시 문란한 정치와 혼란한 사회를 보고 크게 각성하여 〈동명왕편 東明王篇〉·〈개원천보영사시 開元天寶詠史詩〉 등을 지었다. 그뒤 최충헌 정권에 시문으로 접근하여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고 32세부터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1207년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되었고 천우위녹사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를 거쳐 1219년 우사간(右司諫)이 되었다. 이때 부하의 무고로 좌사간으로 좌천되었다가 지방관의 죄를 묵인했다 하여 면직되었으나 최이(崔怡)의 도움으로 계양도호부부사병마검할(桂陽都護府副使兵馬黔轄)에 부임했다. 1220년 예부낭중기거주지제고(禮部郎中起居注知制誥)에 올랐고 국자좨주한림시강학사(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를 거쳐 1230년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를 지냈다. 이때 팔관회 행사에 잘못을 저지른 사건으로 한때 위도(渭島)에 유배되었다. 1232년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경성부우첨사지제고(判秘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로 복직되었고, 1237년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 등을 지냈다.

당시 계관시인과도 같은 존재로 문학적 영예와 관료로서의 명예를 함께 누렸다. 권력에 아부한 지조 없는 문인이라는 비판이 있으나 대 몽골 항쟁에 강한 영도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정권에 협조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는 우리 민족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외적의 침입에 대해 단호한 항거정신을 가졌다. 국란의 와중에 고통을 겪는 농민들의 삶에도 주목, 여러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문학은 자유분방하고 웅장한 것이 특징인데, 당시 이인로 계열의 문인들이 형식미에 치중한 것에 반해 기골(氣骨)·의격(意格)을 강조하고 신기(新奇)와 창의(創意)를 높이 샀다. 자기 삶의 경험에 입각해서 현실을 인식하고 시대적·민족적인 문제의식과 만나야 바람직한 문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백운소설 白雲小說〉·〈국선생전 麴先生傳〉 등의 저서와 다수의 시문을 남겼다.


 

 

 강의내용 4

 

잘풀어신광수 [申光洙]조선 문인 | 브리태니커

1712(숙종 38) 서울~ 1775(영조 15) 경기 교하.

조선 영조 때의 문인.

궁핍과 빈곤 속에서 전국을 유람하며, 민중의 애환과 풍속을 시로 절실하게 노래했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연(聖淵), 호는 석북(石北)·오악산인(五嶽山人). 아버지 호(澔)와 어머니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5세 때부터 글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나, 13세인 1724년 가세가 기울어 낙향했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1746년 한성시(漢城試)에서 〈관산융마 關山戎馬〉로 2등 급제했는데, 이 시는 당시에 널리 읊어졌으며 과시(科詩)의 모범이 되었다. 1750년 비로소 진사에 급제했으나, 이후로 다시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후 시골에서 칩거생활을 했으나, 갈수록 궁핍해져서 가산과 노복들을 청산하고 땅을 빌려 손수 농사를 지었다. 이때 몰락양반의 빈궁과 자신의 처지를 읊은 〈서관록 西關錄〉을 지었는데, 이 작품이 뒷날 역작인 〈관서악부〉를 짓는 계기가 되었다. 음보(蔭補)로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임명되었고 이때 벗들과 여강에서 소일하며 〈여강록 驪江錄〉을 지었다. 악부체 시인 〈금마별가 金馬別歌〉도 이 시기에 지어졌다.

1763년 사옹봉사(司瓮奉事)가 되었고, 다음해에 금부도사로 제주에 가서 45일간 머물면서 제주민의 고충과 풍물을 노래한 〈탐라록 耽羅錄〉을 지었으며, 4월에는 선공봉사(繕工奉事)가 되었다. 1765년에 예빈직장(禮賓直長)이 되고 1767년에는 연천(連川) 현감이 되었다. 1772년 2월 어머니의 권유로 기로과(耆老科)에 응시하여 갑과(甲科) 1등으로 뽑혔다. 3월에 돈령도정(敦寧都正)이 되었는데, 영조가 궁핍한 사정을 알고 가옥과 노비를 하사했다. 다시 병조참의에 오르고 9월에 영월부사(寧越府使)에 임명되었다. 1774년 관서지방의 풍속·고적·고사 등을 소재로 한 〈관서악부 關西樂府〉를 지었다. 1775년 우승지에까지 올랐다. 저서인 〈석북집〉은 시인으로 일생을 보내면서 지은 많은 시가 실려 있는데, 특히 여행의 경험을 통해서 아름다운 자연과 향토의 풍물에 대한 애착을 느끼고 그 속에서 생활하는 민중의 애환을 그린 뛰어난 작품집이다.

 


잘풀어

<칼의 노래>, <현의 노래>의 작가 김훈이 3년 만에 발표한 신작 장편소설. 병자호란 당시, 길이 끊겨 남한산성에 갇힌 무기력한 인조 앞에서 벌어진 주전파와 주화파의 다툼, 그리고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 앞에서 고통 받는 민초들의 삶이 소설의 씨줄과 날줄을 이루어, 치욕스런 역사를 보여준다.

1636년 병자년 겨울. 청의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진격해 오고, 조선 조정은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 수밖에 없었다. 소설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 동안 고립무원의 성에서 벌어진 말과 말의 싸움, 삶과 죽음의 등치에 관한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낱낱의 기록을 담았다.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이 더 가치있다고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 그리고 전시총사령관인 영의정 김류의 복심을 숨긴 좌고우면, 산성의 방어를 책임진 수어사 이시백의 기상은 남한산성의 아수라를 한층 비극적으로 형상화한다.

▶작품 자세히 들여다보기!
'죽어서도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소설은 작가 특유의 냉혹하고 뜨거운 말로 치욕스런 역사의 한장면을 보여준다. 또한, 지도층의 치열한 논쟁과 민초들의 핍진한 삶을, 연민을 배제한 객관적 시각으로 돌아보고 있다.

 

 


잘풀어이시백 [李時白]조선 문신 | 브리태니커

1581(선조 14)~ 1660(현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 아버지는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귀(貴)이며, 동생이 호조판서를 지낸 시방(時昉)이다. 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아버지와 함께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協守使)로 군사를 모집하여 정충신(鄭忠信) 등과 함께 안현(鞍峴)에서 반란군을 격퇴했다. 이 공으로 수원부사가 되었는데 위급한 일이 생길 경우 깃대에 방색기(方色旗)를 달고 자호포(子號砲)를 쏘는 것을 신호로 모이도록 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군사를 이끌고 신속히 동작나루에 도착, 인조를 강화도로 무사히 인도했다. 1629년(인조 7) 삼수미(三手米)를 국고에 수납하는 데 태만했다는 죄로 품계가 깎였으나, 이듬해 양주목사를 거쳐 1631년 강화부유수를 지내고 1636년 병조참판으로 남한산성수어사·호위대장·특진관을 겸했다. 이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서성장(西城將)으로 성을 수비했다. 공조판서·지의금부사를 지내고 1638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척화(斥和)를 주장했다 하여 아들 유(愉)를 심양(瀋陽)에 볼모로 보내게 되었는데 대신 서자를 보냈다가 2년 뒤 탄로가 나 여산(礪山)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다시 총융사로 등용된 뒤 한성판윤, 형조·공조 판서를 역임했다.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인조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삼으려 할 때 이경여(李敬輿)와 함께 원손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했다. 1650년(효종 1)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이 되었고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진 뒤 1655년 영의정이 되었다. 1658년에는 김육(金堉)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했다. 1660년(현종 1)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기년설(朞年說:만 1년)을 지지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잘풀어

정묘호란

인조반정후 일등공신이었던
승편부원군 김류
연평부원군 이귀
의 주류가 정권이 대립되던 시기에
정묘년(인조5년 1627년)후금국(누르하치는 죽고 그의 네째아들 홍타시가 대를 이었음)군사가 조선으로 쳐들어옵니다.
이 계기는
갑자년 이괄의 편에서 싸웠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만주로 달아나
후금국에 의탁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누르하치가 세상을 떠났는데도 문상을 오지 않아서 분개한 이유도 있음
그의 관한 소식을 들은 김류는 인조에게
파천하자고 제의 했고.이귀는 반대했습니다.
결국엔 김류의 권유에 의해 왕은 강화로 갑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국은 위협을 느끼고
조선에 화의를 제의 합니다.
양국은 형제국이다.라는 등의 약속
이걸 정묘호란이라 해요

병자호란

그러던중 왕비 인렬왕후한씨가 승하하셨습니다.
인조와 한씨 사이에는
소현세자,봉림대군(효종대왕)인평대군 용성대군이 있습니다.

인렬왕후 승하소식을 들은 후금국에서 조문을 하겠다고 나섰던것입니다.
후금국은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스스로 황제국이라 칭하였습니다.
청나라에서는 조상한다 하여 용골대 마부대(모두 사람이름)
사신들이 군사 2백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옵니다.
조선에서는 청나라 사람들을 오랑캐라 칭하고 경멸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불만을 느낀 청나라 사신들은 자신들을 황제국의 환대를 하라고
말합니다.
청나라 힘의 무서움을 느낀 조선은 이에 대해 기본적인 예를 갖추어
주자고 하고선 문상을 받게 합니다.
문상을 하던 도중 장막뒤에 있던 무장한 조선 군사를 발견하고는
달아났습니다.
사실 청나라 사신들이 오해한거죠
장막뒤에 있던 군사는 경호원이었으니까요
그리하여 광분한 청나라에서는 조선을 무찌르려고 합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던 조선으로서는 막질 못하죠
그때 임경업이 나타나 병력 이만을 주시면 적병을 막을수 있다고
했으나 조정에서는 들어주질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압록강이 얼어붙었을때
인조 14년 병자년 1636년 청나라 군사는 압록강을 거슬러 조선땅으로
쳐들어옵니다.
또다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갑니다.
남한산성에서 강화로 가려 했지만
날이 추운데다 진눈깨비가 내려 빙판이 졌기 때문에
강화로 갈수 없었습니다.
산성으로 돌아온 인조는 할수없이 항복하기로 결정합니다.
40여일간의 악전고투였죠
그리고 인조는 광주 송파 삼전도 나룻가에 나가게 됩니다.
거기서 인조는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게되고 신하의 예를 갖추게 됩니다.
-삼전도의 굴욕이지요-
그러면서 청나라는 철군할때
소현세자 빈궁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을 볼모로 삼고 심양으로 끌고갑니다.

이것이 병자호란이지요.

 

 

 

강의내용 5

 

잘풀어서울의 4대문

1396년(태조 5) 도성의 정남에 숭례문(崇禮門 : 남대문), 정북에 숙청문(肅淸門 : 숙정문), 정동에 흥인지문(興仁之門 : 동대문), 정서에 돈의문(敦義門 : 서대문)을 세웠다.

 


잘풀어巢父와 許由(소부와 허유)

古代중국의 신화 속 君主인 요(堯)임금은 나이가 들어 氣力이 약해지자 천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려 했다. 그는 바둑의 始祖가 된 자신의 아들 단주(丹朱)를 사랑했지만 나라와 백성을 다스릴 材木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요임금은 천하를 다스리는 大義를 위해 아들을 犧牲시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後繼者를 物色하던 요임금은 허유(許由)라는 현명한 隱者가 있다는 所聞을 듣는다. 허유는 바른 자리가 아니면 앉지 않았고, 당치 않은 음식은 입에 대지 않고 오직 義를 따르는 사람이었다. 요임금은 그를 찾아가 말했다.

 

“태양이 떴는데도 아직 횃불을 끄지 않는 것은 헛된 일이요. 청컨대 천자의 자리를 받아주시오.”

 

허유가 辭讓하며 말했다.


“뱁새는 넓은 숲속에 집을 짓고 살지만 나뭇가지 몇 개면 충분하며, 두더지가 황하의 물은 마셔도 배만 차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비록 음식을 만드는 포인(?人)이 제사 음식을 만들지 않더라도 祭祀를 主管하는 祭主가 부엌으로 들어가지 않는 법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허유는 기산(岐山) 이란 곳으로 자신의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요임금은 다시 그를 찾아가 구주(九州)라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물론 허유는 斷乎했다. 워낙 세상의 權勢와 재물에 욕심이 없었던 허유는 그런 말을 들은 자신의 귀가 더러워졌다고 생각해 흐르는 강물(穎川水)에 귀를 씻었다.


때마침 소 한 마리를 앞세우고 지나가던 소부(巢父)라는 사람이 이 모습을 보고 허유에게 물었다.


“왜 귀를 씻으시오?”

 

“요임금이 나를 찾아와 나에게 천하를 맡아 달라는구려! 이 말을 들은 내 귀가 혹여 더럽혀졌을까 하여 씻는 중이오. 이 말을 들은 소부는 큰소리로 껄껄 웃었다.


“왜 웃으시오?”

 

“당신이 숨어 산다는 소문을 퍼트렸으니 그런 더러운 말을 듣는 게 아니오?”

 

그러고 나서 소부는 소를 몰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한 방 먹은 허유가 물었다.

 

“소에게 물은 안 먹이고 어딜 올라가시오?”


소부가 대답했다.

 

“그대의 귀를 씻은 구정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어 올라가는 거요.”

 

그래서 요임금의 후임 權座는 결국 순임금에게로 전해졌고 요순(堯舜)의 治는 오늘날까지도 정치사에 龜鑑이 되고 있다. 漢族과 東夷族의 後裔들이 다 같이 요와 순이 자신들의 뿌리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兩代는 태평천하였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잘풀어『백헌집』~ 조선 중기 문신인 이경석(李景奭)[1595~1671]의 문집.

[간행경위]

이경석의 손자인 이우성(李羽成)이경석의 시문을 모아서 좌의정 최석정(崔錫鼎)에게 편차와 산정을 부탁했는데, 이우성이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우성의 아들 이진양(李眞養)이진망(李眞望)이 1700년(숙종 26)에 간행하였다. 서문은 최석정이 쓰고, 발문은 신완(申琓)이 썼다.

[구성내용]

문집은 원집 53권, 부록 3권, 합 18책이다. 권1~14는 시, 권15~50는 문, 권51~53는 별고(別稿)이며, 권말에 신완의 발문, 부록으로 연보 3권이 실려 있다.

저자의 작품 가운데 성남과 관련된 것을 살펴보면, 어느 해 그의 형인 이경직(李景稷)[1577~1640]이 병든 몸으로 가마를 타고 가다가 머문 판교 근처에 있는 어느 집에서 형을 그리며 쓴 시 「판교인가(板橋人家)」가 있다. 여기서 그는 “舁疾懷當日 新阡草色深 獨來成一宿 秋月亂蛩音(병들어 가마 타고 가시던 그날에도 길가에는 풀빛이 짙었었지. 나 이제 홀로 여기서 잠을 자려니 가을 달빛 아래 귀뚜라미 소리만 슬프구나)”라고 하여 판교의 한 촌가에서 묵은 집에서 자신이 혼자 다시 묵게 된 일을 통해 지금은 죽고 없는 형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다음으로 남한산성 아래에 있는 6대조 할아버지인 종실(宗室) 덕천군(德泉君)의 무덤에 성묘 못한 채 멀리서만 바라보고 쓴 작품 「육대조묘산(六代祖墓山)」에서 “天人讓王子 先祖德泉君 木拱山城下 雲連漢水濆 往年躬自掃 今日望徒勤 積慶叨餘澤 慙違數薦芬(천인(天人)이 왕자를 주시니 그분이 바로 할아버지 덕천군이시다. 나무들은 산성 아래로 절을 하듯 서 있고 구름은 한강의 물가와 이어졌구나. 지난해에는 몸소 가서 묘를 손질했건만 오늘은 삼가 멀리서 바라볼 뿐이로구나. 쌓으신 복으로 외람되이 은덕 받고 사는데 때때로 제사 올리는 일 어길까 부끄럽네)”라고 하여 직접 가서 성묘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그리고 있다.

 


또한 같은 때에 쓴 듯한 작품 「광릉유감(廣陵有感)」에서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치욕과 삼전도비를 지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씻고자 하는 뜻을 “山城直北廣陵津 丁丑年中屬上春 忍復追言當日事 秖今空泣舊時臣 遙瞻金粟悲秋柏 誰挽銀河洗戰塵 終日雨霑成獨坐 百憂纏繞膽輪囷(산성의 북쪽 광릉 나루터에서 쳐들어 온 일 바로 정축년에 초봄이었네. 어찌 차마 그때의 일을 되새기리오? 다만 지금 헛되이 눈물 뿌리는 옛 신하인걸! 멀리 보이는 산은 금속산(金粟山)[나라 현종의 무덤이 있는 곳]인 듯 구슬픈 가을 속에 잣나무만 보일 뿐이니 그 누가 은하수를 끌어다가 전쟁의 티끌 씻어줄거나. 온종일 빗속에 홀로 앉아서 온갖 근심에 가슴 속이 뒤틀어지네)” 라고 읊고 있다.
[출처]디지털성남문화대전


잘풀어애오개와 큰고개로 짐 실어날라

마포는 단순히 나루로서의 생활 문화가 아닌, 향락 문화, 무속(巫俗) 문화까지 지녔던 곳이다. 한강에는 예부터 많은 나루들이 있었지만, 그 나루들 중 마포가 비교적 궁성(宮城)과 장안에 가깝고도 운반이 편리해 전국에서 배에 실려 온 많은 물산들이 이 나루에서 부려졌다.

배에서 내려진 물건들은 장안으로 주로 실려 갔는데, 수레가 많이 이용되었다. 강나루 주민들 중에는 지게를 지고 와서 땔나무나 반찬거리를 사 가지고 가기도 하였다. 마포 나루의 물건들이 장안으로 실려 간 길을 지금의 길과 비교해 살펴보면 대충 세 갈래로 나타난다.

하나는 마포로에서 충정로를 거쳐 서대문을 통과해 새문안길로 이어지는 길이고, 또 하나는 마포로에서 서소문로를 통해 서소문을 통과하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만리재를 넘어서 남대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마포에서 남대문쪽으로 가려면 만리재길이 지름길이었으나, 고개가 너무 높아 애오개(애고개)로 돌아 넘는 경우가 많았다. 예부터 지금의 만리재를 '큰고개', 즉 '대현(大峴)'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작은 고개의 뜻인 '애고개'의 상대적인 땅이름이라 할 수 있다. 큰고개(만리재)와 애오개는 옛날엔 짐 실어 나르는 짐꾼들의 소리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수레 소리, 지게 작대기 소리, 거기에 힘겨워 내뱉는 짐꾼들의 거친 숨소리까지. [출처]다음 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