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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조선을 뒤흔든 명의 역사왜곡/분재사진 4장/역관 홍순언의 미담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조선을 뒤흔든 명의 역사왜곡

경향신문 오피니언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입력 : 2012-07-04 21:01:29 

 

 

“옛날 고려 배신 이인임의 후사인 이성계는….”

1394년(조선 태조 2), 명나라 사신이 조선을 위해 가져온 축문의 내용이 해괴했다. 이인임은 고려말 대표적인 친원파였고, 다름 아닌 이성계가 축출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성계의 아버지=이인임’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조선은 즉각 명나라에 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이것이 200년 가까이 조선의 속을 까맣게 태우는 외교현안이 될 줄은 몰랐다.

1402년(태종 3), 조선 사신 조온은 명 태조의 유훈인 <황명조훈(皇明條訓)>을 보았다. 경악했다. ‘이방원의 종계(宗系)가 이인임의 후손’이라는 내용이 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조선 조정이 또 발칵 뒤집혀졌다. 그로부터 110여년이 지난 1518년(중종 13), 조선 사신 이계맹은 명의 행정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사진·서울대도서관 제공)을 보고 억장이 무너진다. “이인임·이성계 부자가 (공민왕-우왕-창왕-공양왕 등) 고려왕 4명을 시해하고 나라를 찬탈했다”는 내용이었다.

 

 

지긋지긋한 왜곡이다. 충효를 내세운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명나라의 의도는 신생국인 조선의 ‘길들이기’였다. 불안했던 요동(遼東)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안전막이었던 것이다. 졸지에 ‘을’이 된 조선은 ‘갑’(명나라)을 상대로 힘겨운 외교전을 벌여야 했다.

명나라는 어지간히 조선의 애간장을 녹였다. 예컨대 ‘종계’의 개정만 허락하고 ‘4왕 시해’는 의도적으로 개정에서 누락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1588년, 조선의 주장을 담은 <대명회전> 개정판의 반포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선조는 “완성된 책을 가져오라”며 사신 유홍을 보냈다. 명나라는 “황제가 아직 책을 보지 않았으므로 줄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유홍은 ‘피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애원’(泣血궤請)해 겨우 책을 받아냈다. 그러나 명나라는 끝내 <대명회전>의 본문은 손대지 않았다. ‘명태조의 유훈’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본문’이 아닌 ‘부록’에 조선의 주장을 상술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200년 가까운 처절한 외교전은 ‘절반의 성과’로 끝나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 정도로도 “이제야 금수(禽獸)의 지역이 예의(禮義)의 나라로 변했다”고 기뻐했다. 과연 ‘저자세, 굴욕외교’로 점철된 194년간의 외교전이었다고 돌팔매질을 던져야 할까. 아니 주변국의 집요한 역사왜곡에 속수무책인 작금의 외교와 견주면 그래도 노력은 가상했다 할 수 있을까.

 

 

 


 

짱나1394년(조선 태조 2년) 명나라 사신이 가져온 축문의 내용...“옛날 고려 배신 이인임의 후사인 이성계는….”...이는 해괴망측...이인임은 친원파이고, 이성계가 축출한 인물인데...이성계의 아버지라고 하니...조선은 즉각 시정을 요구했다...ㅠㅠ...^-^

 

그러나, 1402년(태종3년) 명 태조의 유훈인 <황명조훈(皇明條訓)>에  ‘이방원의 종계(宗系)가 이인임의 후손’이라는 내용이 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조선 조정이 또 발칵 뒤집혀졌다...ㅠㅠ...^-^

 

 그로부터 110여년이 지난 1518년(중종 13),  명의 행정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사진·서울대도서관 제공)에 “이인임·이성계 부자가 (공민왕-우왕-창왕-공양왕 등) 고려왕 4명을 시해하고 나라를 찬탈했다”는 내용을 보았다...지긋지긋한 왜곡이다. 충효를 내세운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ㅠㅠ...^-^

 

명나라의 의도는 신생국인 조선의 ‘길들이기’였다. 불안했던 요동(遼東)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안전막이었던 것이다. 졸지에 ‘을’이 된 조선은 ‘갑’(명나라)을 상대로 힘겨운 외교전을 벌여야 했다....ㅠㅠ...^-^

 

1588년 조선의 주장을 담은 <대명회전> 개정판의 반포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렸다...그러나 명나라는 끝내 <대명회전>의 본문은 손대지 않았다. ‘명태조의 유훈’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본문’이 아닌 ‘부록’에 조선의 주장을 상술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200년 가까운 처절한 외교전은 ‘절반의 성과’로 끝나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 정도로도 “이제야 금수(禽獸)의 지역이 예의(禮義)의 나라로 변했다”고 기뻐했다...ㅠㅠ...^-^

 

주변국의 집요한 역사왜곡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러거나 말거나 안달하지 말아야 되나!!!

 

오키요즘 SBS 드라마 "대풍수(2013년1월2일 방영분)"에서 이성계가 이인임을 죽이기 위해 목지상(지성)과 동분서주 한다...지금 우왕이 최영을 설득하여 군사들이 적은 이인임을 만나자고 계략을 꾸미고...최고의 호위문사는 이미 제거하고...ㅎㅎ...흥미진진하다...그런 이인임을 명나라에서는 이성계의 아버지라고 왜곡시켜 기록하고 수정을 안해준다니...외교란 힘든 것...ㅠㅠ...^-^

 

- 2012년 8월16일(목)요일 오후 3시...수산나 -


 

향나무 분재

 

매실분재

 

단풍분재

 

등나무분재...수령13년이라고 합니다...^-^ 

 

[조용헌 살롱] [887] 역관(譯官) 홍순언의 미담

조선일보/오피니언/조용헌  

입력 : 2013.05.19 23:05

조용헌
남자는 여자 문제 때문에 패가망신하기도 하지만, 여자의 도움으로 크게 덕을 본 사례도 있다. 16세기 조선 선조대의 역관이었던 홍순언(洪純彦) 이야기가 '통문관지(通文館志)'를 비롯한 여러 기록에 나온다. 홍순언은 북경에 통역관으로 갔다가 하루는 기생집에 들어갔다. 눈에 띄는 여자가 있어서 하룻밤 같이 자려고 하는데, 방에 들어온 그 여인의 복장이 소복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남쪽 절강(浙江)이 고향인데 아버지가 북경에서 염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장례 비용을 마련하려고 오늘 술집에 나오게 되었다."

호협(豪俠)한 기질이 남달랐던 홍순언은 그 말을 듣고 가지고 있던 공금까지 모두 털어 300금(金)을 여자에게 선뜻 내주었다고 한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1억원 정도 되었을까? 거금을 주고서도 그날 밤 여자를 손대지 않았다. 홍순언은 귀국하여 공금횡령죄로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 뒤로 몇 년의 세월이 흘러 홍순언은 다시 북경에 가게 되었다. 동료 역관들이 돈을 거둬 공금을 갚아주고, 그 대신 홍순언은 종계변무(宗系辨誣)를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엄명을 받았다.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회전'에 이성계의 족보가 엉뚱하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잘못된 기록을 시정해 달라고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중국은 쉽게 고쳐주지 않고 200년간 질질 시간을 끌고 있던 문제였다.

홍순언 일행이 자금성 입구인 조양문(朝陽門)에 들어서자, 성문 밖에 환영하는 비단 장막이 구름처럼 걸려 있었다. 명나라 예부시랑, 즉 외교부 차관 석성이 홍순언을 맞이하러 나왔던 것이다. 석성의 부인도 마중 나와 홍순언에게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그 부인을 보니 기생집에 나왔던 그 여인이 아닌가! 원래 명문가의 딸이었던 이 여인은 그 효성심이 알려지면서 외교부 차관의 부인이 된 것이다. 부인으로부터 '보은(報恩)'이라는 글자를 수놓은 비단 100필을 선물로 받았고, 석성의 노력으로 200년을 끌던 종계변무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 공으로 중인 신분이었던 홍순언은 파격적으로 당릉군(唐陵君)에 봉해졌다. 을지로 2가 일대가 임금으로부터 받은 사패지였고, 사람들은 이 일대를 보은단동(報恩段洞)이라고 불렀다.

 

동료 역관들이 돈을 거둬 공금을 갚아주고, 그 대신 홍순언은 종계변무(宗系辨誣)를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엄명을 받았다.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회전'에 이성계의 족보가 엉뚱하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잘못된 기록을 시정해 달라고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중국은 쉽게 고쳐주지 않고 200년간 질질 시간을 끌고 있던 문제였다.

 

그 부인을 보니 기생집에 나왔던 그 여인이 아닌가! 원래 명문가의 딸이었던 이 여인은 그 효성심이 알려지면서 외교부 차관의 부인이 된 것이다. 부인으로부터 '보은(報恩)'이라는 글자를 수놓은 비단 100필을 선물로 받았고, 석성의 노력으로 200년을 끌던 종계변무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 공으로 중인 신분이었던 홍순언은 파격적으로 당릉군(唐陵君)에 봉해졌다. 을지로 2가 일대가 임금으로부터 받은 사패지였고, 사람들은 이 일대를 보은단동(報恩段洞)이라고 불렀다.

 

- 2013년 5월20일 월요일...조선일보를 읽고 첨가...수산나 -

 

본국으로 돌아올 때 압록강을 건너려 하는데 그곳에서 석성 부인의 친필 서신과 예단ㆍ보은단 수십 필 및 진귀한 물품을 받았다. 이것은 홍순언이 안 받을까 염려하여 북경에서 주지 않고 강가에 두고 간 것이다. 홍순언은 이를 가지고 돌아와 비단을 팔아 큰 부자가 되고 집을 잘 짓고 살았다. 사람들이 이로 인해 홍순언이 살던 마을을 보은단동이라고 불렀다. 담장을 잘 단장하였기 때문에 “고은 담장골”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줄여서 곤담골이라고 불렀고 한문으로는 미장동이라고 부르다가 미동이 되었다.[출처]메트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