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비 이정표
삼전도비 이전 안내문
대한제국이 생기고 나서 삼전도비를 고종이 물 속에 던져버렸어요.
조선총독부가 '역사를 왜곡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그 삼전도비를 다시 땅으로 끌어올렸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땅 속에 파묻었고 박정희 대통령 때 다시 파내서 잠실 어디 공원 같은 곳에 세워놓았어.
삼전도비도 고생 많이 했어.
물속에 들어갔다 땅속에 들어갔다 하면서 글씨가 거의 지워졌지만 일본에는 탁본이 남아있어요."
참고로 말하자면 삼전도비의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이다.
병자호란 때에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가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는데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어
어문학적으로도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삼전도비(사적 제101호) 1
삼전도비
사적: 제101호(1957.2.1)
규모: 총고 5.7m, 신고3.95m, 신폭1.4m, 재료 대리석
삼전도비는 이곳 지명을 딴 것으로 원명은 대청황제 공덕비이다. 병자호란시(1636) 청태종이 조선을 침략하고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로, 처음에는 삼전도에 세워졌으나 1895년(고종32) 청.일전쟁 후에 메몰된 것을 다시 세웠다가 한강변이 침식됨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비문을 쓴 대제학 이경석은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라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더없는 명문이나 치욕의 내용이라 세세히 읽어 보는 이가 없고, 비 앞을 지날 때는 다들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영의정 이경석(李景奭, 1595년 11월 18일 ~ 1671년 9월 24일)
이경석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 성리학자이자 서예가로,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시호는 문충(文忠), 충청도 제천 출신이다.
1623년의 알성문과와 1626년의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영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정묘호란 후 승지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다. 1637년 12월 당시 도승지 겸 예문관 제학으로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항복하게 되면서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어 올렸다. 인조 반정 공신들의 전횡에 맞서 산림학자들을 적극 천거하여 등용하게 했다. 글을 잘 지었고 저서로는 <백헌집(白軒集)>등이있고 삼전도비외 여러 작품을 남겼다.
삼전도비(사적 제101호) 2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랴?
삼전도비를 쓰고서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라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하지만 그 당시로는 누구라도 임금의 명을 받아 써야만 할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자학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또한 인조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는 청나라 풍습이었으니, 인조의 정비 인렬왕후(仁烈王后)의 국상을 조문 왔던 용골대 등도 삼배구고두를 하였었다. 묘소는 청계산의 서남쪽 구릉인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51 속칭 대감능골에 있다.
삼전도의 비극을 놓고 훗날 두고두고 이런저런 말이 오갔습니다만, 항복밖에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20만 대군에 둘러쌓인 성 안에는 1만 3000명의 병사와 40일분의 양식밖에 없었습니다. 그 병사들마저 배를 주리고 추위에 떨며 몸으로 새벽 서리를 받아내야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성밖에선 청병(淸兵)들이 어미는 진중(陣中)에 붙잡아 두고, 그 어미 앞에서 갓난아이를 언 땅에 굴려 죽이는 짐승 같은 짓을 심심풀이로 해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항복 하지 않을 수 없었었던
오늘에도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사실입니다.
삼전도비(사적 제101호) 3
삼전도(三田渡)는 조선 시대 한강 상류에 있던 나루이다. 오늘날의 위치로는 서울 송파구 일대를 말한다.
1636년(인조 14) 12월∼37년 1월에 청(淸)나라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와의 전쟁으로 남한산성에서 잠시 버티다가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또는 줄여서 삼배구고(三拜九叩) 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삼배구고 (三拜九叩: 세번을 절하고 아홉번을 조아린다)
인류의 역사는 나라가 힘이 없으면 언제나 시련과 환란을 초래하기 마련, 삼전도비 역시 바로 그러한 우리의 암울한 역사를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637년 음력1월30일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던 인조(1623 ~ 1649)가 삼전도에서 마침내 청태종 홍타이시에게 신하를 뜻하는 푸른색 관복을 입고 항복의 예를 올리게 된다. 인조는 수항단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를 하며 항복의 예를 해야했다. 그러나 청 태종의 트집으로, 인조는 몇번이나 머리를 땅에 부딪쳐야했다.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조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삼전도비(사적 제101호) 4
1636년(인조 14) 12월∼37년 1월에 청(淸)나라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와의 전쟁으로 남한산성에서 잠시 버티다가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또는 줄여서 삼배구고(三拜九叩 : 세번을 절하고 아홉번을 조아린다)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조선 왕조가 창업한 지 246년, 임금이 적장 앞에 나가 머리를 조아린 일은 이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패(敗)하면 치욕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병자호란(丙子胡亂)때 60여만명의 남녀가 만주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인질로 청에 끌려갔고, (후에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들) 환향녀는 이혼문제를 낳았다. 서서히 화냥녀로 구개음화되었다)
삼전도비(사적 제101호) 5
삼전도비(三田渡碑) 일명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번지(당시 경기도 삼전도)에 있는 청나라의 전승비이며 송덕비(頌德碑)이다. 병자호란 때 승리한 청나라 태종이 자신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요구하여 1639년(인조 17년)에 세워졌다.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도 부른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선 국왕 인조는 만주족에 패해 머리를 땅바닥에 9번을 찧는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치러야 했으며, 삼전도비는 그것을 증언하는 역사적 산물이자 기념비다. 이후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삼전도비(사적 제101호) 6
370년 전 남한산성의 그 겨울은 매우 추웠습니다.
1637년 1월 30일 조선왕 인조(仁祖)는 성문을 열고 세자와 백관(百官) 등 500여명과 함께 삼전도(三田渡)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청(淸) 태종 홍타이치의 20만 대군에 포위된 지 45일 만이었다. 삼전도(現 송파)에는 청나라 병사들이 벌써 수항단(受降壇)을 높이 쌓아 놓고 거기서 인조는 평민의 옷을 입고, 황옥(黃屋)을 깔고 앉은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를 하며 항복해야했다. 그러나 청 태종의 트집으로, 인조는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몇십번 머리를 땅에 부딪쳐야했다. 그렇게 항복의 예(禮)를 올렸습니다.
또한 청태종은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를 세우라고 조선에 명하게 되고 비석은 당시 대제학이던 이경석이 비문을 짓고 참판 오준이 글자를 썼으며 참판 여이징이 전자(한자 서체의 하나)를 새겼다
삼전도비(사적 제101호) 7
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머리와 받침돌 조각이 정교해 조선 후기의 뛰어난 비 중 하나로 손꼽힌다. 치욕비(삼전도의 욕비(辱碑))라고도 불리며, 비를 만들 당시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였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 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 조정의 명으로 조선에서 건립하였다.
비의 전체 높이는 5.7m, 비신의 높이는 3.95m, 폭은 1.4m이고 무게는 32t이다. 비문은 1637년 11월 25일 인조 15년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오준(吳竣)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명칭비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만주어: Daicing gurun i Enduringge Han i gung erdemui bei()
몽골어: Dayičing ulus-un Boɤda Qaɤan-u erdem bilig-i daɤurisɤaɤsan bei
중국어: Daqing Huangdi Gongde Bei (大清皇帝功德碑)
삼전도비(사적 제101호) 8
원래는 한강변 삼밭나루터의 항복을 했던 곳에 세워졌다가,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여 조공 관계가 단절되자 강물에 수장시켰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3년에 일제가 다시 세워놓았고, 1945년 광복 직후에 주민들이 땅 속에 묻어버렸다. 1963년에 홍수로 다시 모습이 드러났고,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하다가 1983년에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에 옮겼다.이후 고증을 거쳐 2010년 4월 25일에 비석이 서 있던 원래 위치인 석촌호수 수중에서 30여m 떨어진 현재의 송파구 잠실동 47번지의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겼다
삼전도비(사적 제101호)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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