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양미술산책·성화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11]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이스라엘 민속의상 등 3장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11]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조선일보/사외칼럼/김영나 서울대교수 서양미술사 

입력 : 2009.07.15 03:18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양혜규 작가가 우리나라를 대표해 전시를 하고 있다. 이제 '여류 화가'라는 호칭이 촌스럽게 느껴질 만큼, 여성 미술가들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약하는 세상이 됐다. 서양에서 여성 화가를 기록한 최초의 문헌은 로마의 대(大)플리니우스가 쓴 대백과전서 '박물지'이다. 이 책에는 고대 그리스에서 활약했던 4명의 여성 화가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중세에는 수녀들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소포니스바 안귀솔라와 같은 몇몇 여성 화가들이 있었으나 초상화나 정물화와 같이 제한된 주제를 그렸다. 여성 화가가 극소수였던 가장 큰 이유는 미술의 기본적인 훈련이었던 누드모델을 그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물지만 활약상이 보이는 여성 화가는 아버지나 남편이 화가라서 그들에게 배우거나 화실에서 작업할 수 있었던 경우였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남성들과 비교해 손색없이 걸출했던 첫 번째 여성 화가는 17세기 이탈리아에서 활약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3)이다. 그 역시 화가였던 아버지에게서 기초 훈련을 받았으나 원근법 교습을 위해 아버지는 딸을 친구인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보내는 실수를 범했다. 아르테미시아는 타시에게 강간을 당했고 이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렸으며 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인물들은 대부분 구약에 나오는 강인한 여성이다. 재판 직후에 그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1612)는 유대 여성 유디트가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칼로 베는 장면이다. 극적인 광선과 고통에 일그러진 홀로페르네스의 생생한 얼굴 표정은 아르테미지아가 이 그림을 통해 심리적인 복수를 하고 있다는 해석을 낳기도 한다. 그 후 그는 역사화나 종교화와 같은 대작을 그리면서 이름을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기록은 당시에는 별로 많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 미술사학계에서 여성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재발견된 아르테미시아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전설적인 존재로 떠오르고 있다.

 

화풀어 1970년대 이후 미술사학계에서 여성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재발견된 아르테미시아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전설적인 존재로 떠오르고 있다. ...남성들과 비교해 손색없이 걸출했던 첫 번째 여성 화가는 17세기 이탈리아에서 활약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3)이다...재판 직후에 그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1612)는 유대 여성 유디트가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칼로 베는 장면이다. 극적인 광선과 고통에 일그러진 홀로페르네스의 생생한 얼굴 표정은 아르테미지아가 이 그림을 통해 심리적인 복수를 하고 있다는 해석을 낳기도 한다.

 

 

2012 안성세계민속축전 이스라엘 민속의상

 

2012 안성세계민속축전 중부유럽 민속의상

 

이스라엘국(히브리어: מדינת ישראל 메디나트 이스라엘, 아랍어: دولة إسرائيل 다울라트 이스라일[*])은 중동에 있는 국가이다. 7백만 명의 인구 다수가 유대인으로 구성된, 세계 유일의 유대교 국가이나, 국민 중에는 상당수의 아랍인이 포함되어 있다. 수도는 예루살렘이며 최대 도시는 텔아비브이다. 요르단,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와 국경을 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 베들레헴이 있는 나라이다. 1948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개별적인 유대인과 아랍인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이 나라가 건국되었으나, 그로 인하여 주변 이슬람 국가들과의 대립으로 심한 분쟁 상태에 빠지게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현대 이스라엘은 19세기 시온주의 운동을 배경으로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영국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기 전까지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은 서로 충돌하였고 영국은 유대인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이르군하가나 등 민병대를 조직하여 아랍인들과 분쟁을 일으켰고, 영국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자 이스라엘은 즉각 이스라엘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였고, 서방과 미국으로부터의 무기지원을 받아 아랍 연맹을 물리치고 제 1차 중동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2차 중동전쟁(시나이전쟁)과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스라엘에 복수를 다짐하던 안와르 사다트가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다시 중동에는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1973년 10월 6일, 드디어 이집트는 유대인들의 속죄일 욤키푸르 당일 이스라엘에 기습을 감행하기에 이르렀였다.(4차 중동전쟁) 하지만 미국과 서방의 지원을 받던 이스라엘은 비교적 약한 시리아군이 포진한 곳을 공습하면서 전세를 역전하기에 이르렀으며 끝내 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까지 승리로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 또한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놀라운 속도로 상처를 회복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팔레스타인과의 분쟁 결과, 1993년에 PLO와 자치에 합의하여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가자 지구웨스트뱅크에 세워졌으나 현재까지도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