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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23] 사람 일은 얼굴에 새겨지고-'장만 초상(작자 미상)'-두물머리 떠드렁산과 이괄 전설 4장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23] 사람 일은 얼굴에 새겨지고, 세상엔 거저먹는 일 없다

 조선일보/오피니언/사외칼럼/손철주 미술평론가

입력 : 2012.09.02 23:31

 

'장만 초상' - 작자 미상, 비단에 채색, 240×113㎝, 17세기, 경기도박물관 소장.
이 초상화를 보는 이라면 누구나 모자 아래 시커멓게 그려놓은 곳으로 눈길이 가게 돼 있다. 다른 데도 아니고 얼굴에 저게 뭘까. 알겠다. 큼지막하게 한쪽 눈을 가린 것은 안대(眼帶)다.

요즘으로 치면 액션영화에나 나올 만한 분장인데, 조선시대 초상화에 저리 버젓하게 등장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이분, 이력이 만만찮은 어른이다. 인조 때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로 병권(兵權)을 오래 잡아 국방과 안보에 관한 식견이 남달랐다. 그는 장만(張晩·1566~1629)으로 형조판서와 병조판서도 지냈다.

장만이라는 이름이 생소한가. 그의 사위가 병자호란에서 주화파로 나섰던 최명길(崔鳴吉·1586~1647)이다. 그래도 고개가 갸웃해진다면 그의 이름을 소리 내 읽어보라. '필요한 걸 미리 갖춘다'는 뜻인 우리말 '장만'은 그에게서 나왔다는 속설이 있다. 그만한 까닭이 충분하다. 장만의 일생은 왜란과 호란을 다 거쳤는데, 고비마다 군사전문가로 변방을 잡도리하며 뼈 빠지게 대책을 올렸다.

그런데 눈은 무슨 일로 탈이 났을까. 그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다 병든 몸을 혹사하는 바람에 실명했다. 그 일로 장만은 1등 공신이 됐고, 조정은 그에게 이 초상화를 헌정했다.

초상화는 꽤 고식(古式)이다. 푸른색 관복에 붙은 흉배가 앞가슴을 덮을 만큼 큰데, 수 놓인 공작 한 쌍이 그의 1품 품계를 알려준다. 바닥의 꾸미개는 화려한 기하학적 문양이다. 정작 장만의 얼굴은 시난고난한 흔적이 또렷하다. 가까이서 보면 마마 자국을 뒤집어썼고, 턱으로 내려오는 선이 가파르며, 수염 올올이 성기다. 수(戍)자리의 고역이 길어선지 홀쭉한 낯이다.

장만이 지은 시조가 있다.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워라/ 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만 하리라.' 배를 몰든 말고삐를 잡든, 세상에 거저먹는 일이 없다. 밭 갈기인들 편하랴. 사람 일은 얼굴로 가서 새겨진다.

 

 자기짱인조 때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로 병권(兵權)을 오래 잡아 국방과 안보에 관한 식견이 남달랐던 장만(張晩·1566~1629)...병자호란에서 주화파로 나섰던 최명길(崔鳴吉·1586~1647)이 그의 사위...'필요한 걸 미리 갖춘다'는 뜻인 우리말 '장만'은 그에게서 나왔다는 속설이 있다....ㅎㅎ...^-^

 

 그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다 병든 몸을 혹사하는 바람에 실명했다. 그 일로 장만은 1등 공신이 됐고, 조정은 그에게 이 초상화를 헌정했다...^-^

 

- 2012년 12월24일 월요일 오전 0시20분...수산나 -

두물머리 풍경 1

 

두물머리 족자섬(떠드렁산) 안내문

 

[두물머리 족자섬(떠드렁산)과 이괄의 난 관련 전설]


명당자리는 효자에게 얻어진다.
삼일천하를 했던 이괄이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말을 청개구리같이 거꾸로만 행하여 아버지의 속을 태웠다고 한다.

아버지는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어서 유명한 지관으로 알려졌던 사람인데,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명당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러든 중에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 에서 남한강을 오른쪽으로 끼고 양평시내 방면으로 따라가면 양평시내 조금 못 미쳐 조그마한 동산이 강가

의 길옆에 붙어 있다. 이 동산을 남한강 상류에서 떠내려 오다가 길 가장자리에 붙었다고 하여 지금도 ‘떠도랑산’ 이라고 부른다. 이곳에 묘 자리가 있었다. 그런데 이 묘 자리는 명당이 틀림없지만, 하관을 할 때에 관을 엎어서 머리쪽이 강가로 오도록 거꾸로 써야만 될 자리였다.

세월은 흘러흘러 지관도 나이가 들어 노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아들 이괄은 아버지의 병환이 심상치 않자 묘를 어디다 써야 할지 미리 준비를 해 놔야 할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 이괄은 병석에 누워있는 아버지께 조용히 말을 꺼냈다.

“아버지께서는 남의 묘 자리를 많이 봐주시었는데, 혹시 아버지가 묻힐 곳을 생각해 둔 곳이 없으신지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내가 죽으면 양평 남한강 강가에 붙어 있는 떠도랑산 에다 묻어 달라”고 하면서, 이놈이 애비 말이라면 매사를 거꾸로만 하는 놈이라 하관할 때에 관

을 똑바로 놓고, 머리 쪽을 위쪽으로 해서 묻어달라고 해야만 거꾸로 묻고, 관도 엎어서 묻을 것으로 생각하고 똑바로 묻어달라고 했다.

아버지가 죽으니 아버지께서 말한 대로 떠도랑산에 천광을 해놓고서 이괄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버지의 말이라면 모든 것을 거꾸로 해서 속도 많이 썩여드렸는데, 마지막 유언까지야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 유언대로 관을 똑바로 하고, 머리 쪽을 위로하여 장례를 치렀다.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이괄은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승승장구 승진을 거듭했다.

그 후 이괄은 현실정치에 반기를 들고 난(亂)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삼일천하에 그치고, 역적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나라에서는 역

모가 생기면 조상의 산소 탓이라고 여겨 역모(逆謀)자 들의 조상묘소를 찾아내어 파내던 때라 이괄의 아버지 묘소도 관가에서 찾아내어 파헤쳤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관이 썩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관뚜껑을 뜯어보니 시체가 엎어져 있고 등에 비늘이 돋았고, 머리가 강물이 흐르는 아래

쪽으로 반이나 틀어져 있었다고 한다. 처음 매장 할 때에 관을 거꾸로 썼다면 벌써 용이 되어 앞쪽 강으로 빠져나가서 승천하였을 것이고, 이들 이괄도 정권을 잡았을 것이라고 했다.

어느 풍수지리를 안다는 사람이 지어냈거나 부모님께 효성을 다 하라는 뜻에서 지어낸 이야기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