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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20] '어사또의 전설'이 된 까닭, 단호한 얼굴에서 드러나다-'박문수 초상'/현충사 느티나무 2장-이인좌의 난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20] '어사또의 전설'이 된 까닭, 단호한 얼굴에서 드러나다

조선일보/오피니언/사외칼럼/손철주 미술평론가 

입력 : 2012.07.31 23:28

 

'박문수 초상' - 작자 미상, 비단에 채색, 40.2×28.2㎝, 18세기, 개인 소장.
구름무늬 곱게 수놓은 흉배에 한 쌍의 학이 날갯짓한다. 이를 보면 당상관에 오른 문신의 초상이다. 허리에 두른 띠도 품계를 귀띔해준다. 다섯 줄의 금색을 치고 그 위에 무소뿔로 만든 장식을 곁들였다. 곧 1품이 두르던 서대(犀帶)이다. 깃이 둥근 관복 속으로 흰옷이 목을 감쌌는데, 머리에 쓴 관모는 불쑥 턱이 솟아 그러잖아도 높은 벼슬이 더 우뚝해 보인다. 한눈에도 지체가 훌륭해 뵈는 이 사람은 과연 누굴까. 조선 영조 때 병조·호조·예조 판서를 두루 지낸 박문수(朴文秀·1691~1756)다.

박문수는 이인좌의 난(亂) 당시 세운 전공(戰功)으로 조선 왕조의 마지막 공신에 오른 인물이다. 젊어서 일찌감치 영조의 눈에 든 그는 나랏일에 늘 마음을 다잡았고 군사정책과 세무행정에 밝아 개혁을 이루어냈다고 실록은 전한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박문수의 붙박이 이미지는 어사(御史)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수백 번의 어사출또가 있었다 해도 박문수 하나를 당할 재간이 없을 정도다. 겨우 몇 차례 임무를 수행하는 데 그쳤음에도 그는 어사또의 전설이자 롤 모델이 돼버렸다. 혹 그의 얼굴에 씌어 있기라도 한 것일까.

박문수의 초상 중에서 이 얼굴은 만년의 모습이다. 이마에 주름살이 분수같이 갈라지고 눈썹 끝은 먼 산처럼 물러나 있다. 눈머리는 새의 부리를 닮아 날카롭고 입술은 강건한 대춧빛으로 물들었다. 굳은 표정으로 마치 다른 사람이 하는 짓거리를 노려보는 듯한 눈빛이, 아니나 다를까 단호하다. 화가의 솜씨는 섬세하다. 골상은 찬찬히 선묘로 지어냈고, 안색은 자국이 남지 않는 붓질로 완성했다. 어사는 여차하면 지역 관리의 목줄을 쥐고 흔든다. 박문수의 감찰은 공사(公私)와 시비(是非)를 분간했다. 또 백성의 이익을 앞세웠다. 그의 행적은 뒷날 야사와 민담으로 한껏 부풀려졌다. 그래도 전설은 빛바래지 않는다. 백성이 그 까닭을 안다.

 

  자기짱조선 영조 때 병조·호조·예조 판서를 두루 지낸 박문수(朴文秀·1691~1756)다....그는 어사또의 전설이자 롤 모델이 돼버렸다....그의 행적은 뒷날 야사와 민담으로 한껏 부풀려졌다...^-^

 

- 2012년 12월24일 월요일 오전 1시10분...수산나 -

현충사 느티나무 1

 

현충사 느티나무 2

 

[이인좌의 난]

 

알려진대로 영조 임금은 왕위에 오르자 가정 먼저 자신을 곤경에 몰아 넣고 수많은 대신들을 죽게 했던 신임옥사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소론 세력을 물리치고 노론 인사들을 등용하는 '을사처분'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노론 세력이 지나친 욕심을 부리자 영조 임금은 다시 노론 세력을 물리치고 소론 세력을 등용하는 '정미환국'을 일으킵니다. 이 대 소론측은 노론 세력을 뿌리채 뽑아버리기 위하여 노론의 영수들을 처단할 것을 임금에게 주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론의 급진 인사들과 정권에서 오랫동안 소외되어 있던 남인 세력이 결탁하여 난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입니다.

 

이인좌의 난은 경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정치적 기반에 위협을 받게 된 이인좌 등 과격 소론 세력들이 남인들을 포섭하여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 탄(坦)을 추대하고 무력으로 영조 임금과 노론을 제거하고자 군사 세력을 동원한 모반을 꾀하다가 오히려 1727년에 정미환국으로 다시 노론이 밀려나고 온건 소론 세력이 기용되면서 동조자가 줄어드는 과정에서 모의가 노출되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계획이 탄로나자 이인좌 등은 반군을 이끌고 청주성에 입성하여 세력을 규합한 후 한양으로 진군하다가 관군에게 궤멸되었습니다.

 

한편 밀풍군 탄은 1723년(경종 3)에는 사은사(謝恩使)로, 1726년(영조 2)에는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로 청나라를 다녀오는 등 나름대로 당시 종실을 대표하던 어느 정도 인망이 있던 인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밀풍군 탄이 반란군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정보는 이인좌의 난 당시 포도대장으로써 도성에서 반란군에게 내응하기로 되어 있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소론의 남태징(南泰徵)이 발설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남태징은 오히려 이인좌의 난 발발 당시 도성 안에서 유언을 퍼뜨리는 자를 색출하여 옥에 가두고 왕에게 보고한 사실과 또한 역적에의 가담여부를 가리는 신문에서 끝내 승복하지 않았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역적공모의 죄명은 의문시되는 인물입니다. 이러한 기록으로 부터 판단해 보면 영조 임금은 이인좌의 난을 이용해 소론의 핵심인물 중 하나인 남태징과 중요한 종실 인물인 밀풍군 탄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인좌의 난 당시 밀풍군은 한양에 머물고 있었으며 청주성에는 코배기도 안 비쳤었다는 사실도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줍니다.

 

결과적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후 영조 임금은 왕권을 회복하여 탕평책의 명분을 강화시킬 수 있었으며 이로부터 사도세자 사건이 일어나기 전 까지 정국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출처]다음 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