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49] 바흐와 평균율(平均率)
조선일보/오피니언/주경철 서울대교수 서양근대사
입력 : 2010.03.12 23:12
바흐(Bach)는 독일어로 실개천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베토벤은 작곡가 바흐의 이름을 두고 "그는 실개천이 아니라 바다(Meer)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말한 바 있다. 한 작은 음악회에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연주를 들었을 때
베토벤의 이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이 위대한 작품은 원래 하프시코드나 클라비코드라는 고악기를 위해 쓴 곡이지만 지금은 피아노로 많이
연주되어서 '피아노 음악의 성서'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사실 이 곡은 당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던 새로운 조율법인 평균율의 보급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평균율은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듣는 서양 음악의 음계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평균율의 장점은 작곡이나 연주를 할 때
자유롭게 조(調)를 옮길 수 있어서 풍요롭고 변화가 많은 곡들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바흐는 아주 열심히 이 방식을 이용했고 또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유럽에서 19세기 이후 평균율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게 된 데에는 바흐의 공헌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서양 음악의 기본 원리가 처음 개발된 곳은 중국이었다. 명나라의 황자(皇子)로 태어난 주재육(朱載堉·1536~1611)은 음악·수학·역학 연구에
매진하였고, 1584년에 간행된 율학신설(律學新說)에서 그가 개발한 평균율 이론을 개진하였다. 아마도 이 이론을 유럽에 전한 것은 당시 중국
황실에까지 들어와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었을 것이다. 정작 중국에서는 이 음악 이론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유럽의 수학자들과 음악가들은
곧 이 이론의 혁신적인 장점을 이해했고 이로 인해 결국 서양 음악이 새롭게 경신되었다. 이제는 평균율에 따르지 않는 서양 음악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다. 평균율 이전에 존재하던 도리아·프리지아·리디아·믹소리디아 같은 다양한 선법(旋法)들과 그에 따르는 고음악들은
거의 사라져 갔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일상적으로 듣고 배운 음악체계는 이처럼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져 유럽으로 전해진 다음 전 세계로 퍼져 간 것이다.
바흐(Bach(1685~1750))는 독일어로 실개천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베토벤은 작곡가 바흐의 이름을 두고 "그는 실개천이 아니라 바다(Meer)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말한 바 있다.
유럽에서 19세기 이후 평균율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게 된 데에는 바흐의 공헌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그런데 놀랍게도 이 서양 음악의 기본 원리가 처음 개발된 곳은 중국이었다. 명나라의 황자(皇子)로 태어난 주재육(朱載堉·1536~1611)은 음악·수학·역학 연구에 매진하였고, 1584년에 간행된 율학신설(律學新說)에서 그가 개발한 평균율 이론을 개진하였다....아마도 이 이론을 유럽에 전한 것은 당시 중국 황실에까지 들어와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었을 것이다.
음악에서 평균율이 무엇인지...나~는 모~르겠네...ㅠㅠ...평균율은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듣는 서양 음악의 음계 그 자체라 할 수 있다고 하네...ㅋㅋ...^-^
- 2013년 1월15일 화요일 수산나 -
독일어로 실개천이라는 뜻의 바흐(Bach(1685~1750))가 살았을 당시의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
1693년, 1696년-안용복,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일본에 주장...우리나라 숙종(19, 21)시대 사건.....^-^
1697년-장길산 농민운동, 대마도주가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보냄...^-^
1708년-대동법 전국적으로 실시
1712년-백두산정계비 건립
1725년-탕평책 실시
1750년-균역법 실시
독도 영유권
3. 독도문제의 발단...조선 태종 때 [공도정책]...섬을 비우라는 정책...^-^
4. 한일간 독도 문제의 전개 ①
안용복 [安龍福]조선 어부 브리태니커
독도와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일본에 확인시켰다. 동래부 출신으로 동래수군에 들어가 능로군(能櫓軍)으로 복무했으며, 왜관(倭館)에 자주 드나들며 일본말을 익혔다.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일본어민이 울릉도에 침입하자 이를 막다가 부하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때 에도 바쿠후[江戶幕府]에게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주장하여 바쿠후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書啓)를 받았으나 귀국 도중 나가사키[長崎]에서 쓰시마도주[對馬島主]에게 서계를 빼앗겼다. 같은 해 9월 쓰시마도주는 예조(禮曹)에 서계를 보내 울릉도(일본명은 다케시마[竹島])에서 조선어민의 고기잡이를 금지시킬 것을 요청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히고 외딴 섬에 왕래를 금지하는 공도정책(空島政策)에 일본도 협조할 것을 요청한 예조복서(禮曹覆書)를 보냈다. 1696년 안용복은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다시 일본어선을 발견하고 마쓰시마[松島]까지 추격하여 영토 침입을 꾸짖었으며 스스로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島監稅官)이라 칭하고 하쿠슈[伯州] 태수로부터 영토침입에 대한 사과를 받고 귀국했다. 귀국 후 사사로이 국제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할 위험에 처했으나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의 도움으로 귀양을 가는 데 그쳤다. 1697년 대마도주가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보냄으로써 조선과 일본 간의 울릉도를 둘러싼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4. 한일간 독도 문제의 전개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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